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아카데미의 결정에 전적으로 공감한 탁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보스턴 글로브’에서 ‘스포트라이트’라는 탐사보도 전문팀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 벌어진 아동 성추행 사건을 수십 년간 조직적으로 은폐하며, 가해 성직자들을 비호해왔다는 사실을 파헤친 사건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선정적이고 감정적으로 뜨겁게 흐르기 좋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절제와 품위를 지키며 사건의 핵심을 깊이 있게 응시한다는 사실이다.
사건과 관련된 당사자들을 쉽게 괴물로 만들거나 영웅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모두 거부하고, 이들의 인간적 면모와 갈등, 프로페셔널리즘, 사려 깊은 배려, 고민과 성찰, 후회와 실수 등을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이 사건을 단순히 한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나 일탈로 다루지 않고 쉽게 특종을 터뜨릴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다 무시하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피해자를 양산하는 ‘시스템을 멈추기 위해’ 그 시스템에 주목하며 취재해가는 과정이 감동적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취재팀원 중 한 사람은 자신이 평소 지역사회 속에서 친분을 유지하고 좋은 관계 속에 있던 사람들이 이 사건을 덮으려던 시스템의 공모자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려면 그들의 증언과 확인이 꼭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이 이상은 스포일러라 더 말할 순 없지만…
존경받는 간사에서 공공의 적으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전병욱 사건이 떠올라서 가슴이 먹먹하고 아팠다. 외부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부인으로서 이 사건의 전개과정 속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부분과 이 영화의 특정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다.
사실 전병욱 사건이 드러나기 전, 나는 교회에서 꽤나 존경받던 간사였다. 목사들 말 잘 듣고, 오랜 기간 헌신하면서 나름 팀 인원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던, 소위 말하는 ‘부흥’을 주도했던 간사였으니까.
그러나 이 사건을 겪으면서 평소 좋은 친분을 유지했던 사람들과 더이상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기존의 나이스한 친분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제보가 쌓일 때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도, 피해자들의 제보를 받고도 묵살했던 사람들이 나랑 친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일전에 글로도 고백했지만, 심지어 피해자의 결정적인 제보와 가슴 아픈 눈물의 고백을 듣고도 묵살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참조: “오빠…내가 겪은 일은 천국에 가서 밖에는 이야기할 수 없어요”) 신기하게도 영화 ‘스포트라이트’에도 유사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뒤늦게 나의 실수와 직무유기를 후회하고 진실의 편에 서고, 피해자와 약자의 편에 섰을 때 돌아오는 건 싸늘한 인간관계의 파탄이었으며, 교회를 흔들고 감히 목회자들을 비난하는 싸가지없고 위험한 ‘공공의 적’으로서의 오명이었다. 어떤 집단에서 ‘이지메’를 당하며 ‘공공의 적’이 되는 그 감정은 아무리 멘탈이 강하고 마음이 담대해도 절대로 적응되거나 단련되지 않는 아픔이다.
전병욱 사건이나 가톨릭 교회가 아동 성추행 사건을 집단적으로 덮으려 했던 이런 사건에서 그 사건과 연루된 당사자들이 겪는 갈등과 아픔은 매번 이런 비슷한 양상을 띄게 된다.
개인적으로 친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이런 류의 사건에서 진실의 반대편에 서서 강자와 권위자들의 편을 들고 교회의 덕을 빙자해서 사건을 덮으려 하거나, 피해자들을 매도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도덕적인 개인도 집단이 되면 이기적이 된다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들조차 집단이 되면 이기적이 된다고 말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윤리적 결정에 동참할 수 있는 도덕적 개인들의 모순을 통찰력 있게 간파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비윤리적이 될 수 있는 인간의 이런 모순을 잘 아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비유를 들거나, 너희 무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행한 너희의 행동이 예수께 한 행동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집단주의’를 뛰어넘어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교회라는 ‘다수의 집단’을 지키거나, 다수가 평안하기 위해 억울한 몇 사람쯤은 상처받고 떠나도 되고,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시끄러운’ 그들이 양보해야 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내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 우정을 쌓아왔던 관계들이 또 다른 측면의 진실이 드러났을 때 위태롭게 위협을 받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러나 공의를 추구하고 정의의 편에 서며, 약자를 보호하고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할 때, 그런 개인들의 나이스한 관계는 심각한 위협에 봉착한다. 그때 정말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의 개인적 친분과 나이스한 관계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진실의 편’에 서는 건 가능할까? 글쎄… 난 어렵다고 본다.
니버의 말처럼 인간 안에 있는 근원적 결핍과 본성은 도덕적 개인들이라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비윤리적 결정을 내리며 피해자와 약자들을 뭉개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집단의 이익과 안정을 도모하려는 도덕적 개인들의 비윤리적 공모와 행동에 브레이크를 거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진실’을 직시하고 ‘약자’와 ‘피해자’의 편에 서서 ‘집단의 폭주’를 막는 것이다.
또한 난 그것이 비윤리적 결정에 공모한 도덕적 개인들을 위해서도 최선이라고 믿는다. 집단의 이해관계로 인해 무뎌진 그들의 양심과 오판을 깨우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의 편에 서서 ‘피해자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를 직접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집단의 잘못을 지적하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건, 그리고 약자들의 편에 서는 건…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말끔하고 숭고하기만 한 게 아니다. 그 과정 속에서 무수히 깨어지는 기존의 인간관계와 자존감의 상실을 경험하는 기분 더럽고 피곤한 노역이다. 웬만하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얻는 것도 크다. 스포트라이트 팀처럼 용기 있고 진실한 ‘진짜 동지’, ‘진짜 친구’들을 얻게 되니까. 그리고 난 소중한 친구들을 얻었다.
※필자 권대원: 수년째 전병욱 목사 면직운동을 해오고 있는 삼일교회 집사, 다수의 여성도를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전병욱 목사는 지난 2월 사건 발생 6년 만에 예장합동교단 평양노회 재판에서 어이없는 판결로 면죄부를 얻다시피 했다. 삼일교회는 이에 총회상소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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