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라는 신조어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휴먼시아 거지’의 줄임말로 모처의 임대주택 단지 아이들을 놀리고 따돌리는 표현이라고 한다. 듣고 나서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사는 동네, 평수, 부모 직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폄하하는 어른들의 그릇된 모습이 다름 아닌 아이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었다. 허 참, 임대주택이 뭐라고.
잠시 고민하다 지구평화(?)에 조금이나마 일조할지도 모르겠다는 공명심에, 미국의 렌탈 아파트와 주거문화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임대주택 vs. 렌탈아파트
같은 표현이라도 영어로 하면 느낌이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저 원룸 살아요~’라고 하면 자립하여 독립된 공간을 갖추고 대학 앞이나 강남의 교통 요지에 사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저 단칸방 살아요~’라고 하면 방이 하나라는 뜻은 같은데도 연말에 연탄과 쌀을 지고 방문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일반인들에게도 임대주택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이기보다는 공공 임대주택의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강한 듯하다. 이번에 정부가 기업형 임대주택과 관련된 계획을 발표하면서 ‘뉴스테이’라고 새롭게 명명한 것도, 이러한 선입견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름만 영어로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 ‘기업형 임대주택’이 뭐하는 녀석이고,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외국의 선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의 틀린 것을 찾자는 의미라기 보다, 이미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외국의 선례와 다른 점을 찾아 보자는 의미다.
마침 필자는 2010년 한국에 미국형 고급 임대주택을 개발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뉴욕, 시카고, 동경의 여러 렌탈하우스들을 둘러보고 케이스 스터디를 한 적이 있다. 그 후에는 뉴욕에 수년 간 머무르면서 많은 렌탈아파트에 직접 산 경험도 있다.
미국의 주거 문화가 생소한 분들이 있을까 봐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미드 〈프렌즈〉의 한 에피소드를 가져와 봤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뉴욕 렌탈아파트의 대략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간략한 스토리: 주인공 로스는 어여쁜 아가씨 집에 라면을 먹으러(?) 갔다가 문을 열자마자 화들짝 놀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혀진 집에서 애완용 햄스터를 방목하는 여자 때문에 깔끔한 로스는 멘붕이 온다. 그 후 다시 이 집을 방문한 로스는 이번에는 그녀와 라면을 제대로 끓이나 했는데,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과자 봉지 소리에 놀라 미쳐 난리를 치고, 여자는 자신의 햄스터가 죽었을까 봐 봉지를 열지만 ‘그냥 쥐’라며 안심하고 내려놓는다. 결국 두 남녀는 찬물에 불린 라면처럼 끝이 나고, 다음날 아침 로스의 동생 모니카(뭐든 치워야 직성이 풀리고 그걸 통해 희열을 느끼는 오타쿠 결벽증 환자)가 찾아와 말한다. “어제 오빠한테 네 집에 대한 얘기를 듣고 얼마나 더러운지 궁금해 죽는줄 알았다. 니네 집을 내가 청소해도 되겠느냐.”
맨해튼에는 삐까뻔쩍한 집들도 많이 있지만, 대중적인 렌탈아파트의 모습은 이와 비슷하다. 우리나라 원룸과 같이 방은 하나. 뒷편에 자세히 보면 속옷이 널려있는 스토브가 있는 주방이 있다. 그 뒤로 화장실로 추정되는 방이 하나 보인다. 크기는 대략 400SQ(12평)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따로 방이 없는 원룸을 뉴욕에서는 ‘스튜디오’라고 부른다. (거실 외에 방이 하나 있으면 ‘원베드’다.) 가격은 위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실제 프렌즈의 장소로 거론되는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의 시세로는 대략 2,000~2,500불(한화 240~300만 원) 정도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원베드라면 3,000~4,000불까지도 쉽게 올라간다(한화 400만 원 이상).
화려한 맨해튼의 겉모습과 달리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삶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많은 건물들에는 세탁 시설이 없기 때문에 큰 바구니를 안고 인근의 세탁편의점(코인세탁)을 이용해야 한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지저분한 맨해튼답게 지하철 선로에서 쥐 구경하는 건 언제든 가능하고 아파트에 쥐가 출몰하는 것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영상에 보면 로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몸을 긁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뉴욕살면서 가장 진절머리를 치게 되는 ‘베드 버그’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벼룩’인데, 한 번 물렸다 하면 미친 듯이 가렵기도 하지만 알을 뿌리고 다니기 때문에 그 후폭풍이 장난이 아니다. 침대와 매트리스는 깔끔하게 갖다 버리고, 모든 옷은 고온 살균하거나 냉동실에 얼려버려야 한다고 한다. 집주인은 그 집뿐만 아니라 맞닿은 집들에 몇 백만 원이 소요되는 방역을 의무적으로 시켜야 하고, 새 세입자에게는 ‘베드 버그’가 나온 집이라는 걸 법적으로 고지해야 한다. 화려한 맨해튼의 역설이다.
맨해튼은 대표적인 임대인 우위의 시장인 탓에, 공실률은 매우 낮고 그만큼 건물주 님들의 횡포도 심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점차 레지덴셜 리츠 회사와 대형 레지덴셜 회사들이 맨해튼 내의 건물들을 사모으면서 임차인들은 브랜드화된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격은 좀 더 비싸졌다.
이러한 대형 렌탈 아파트는 로비와 함께 경비원이 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기다란 복도를 따라 호텔처럼 좌우로 방이 늘어서 있는데, 한 건물에 보통 200~300유닛이 들어가 있다. 스튜디오, 1베드, 2베드, 소수이기는 하지만 3~4베드 룸이 섞여 있다. 보통 어메니티 시설로 세탁실, 경비실(택배)이 기본적으로 있고, 럭셔리 아파트에는 피트니스 시설과 커뮤니티 시설(게스트라운지) 등이 추가로 들어가 있다. 맨해튼은 암반 위에 지어진 탓에 지하를 파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고, 더욱이 주차장 설치가 법적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주차장은 없는 경우가 상당수다. 있더라도 비싼 곳은 주차비만 한 달에 600~700불이 넘어간다(80만 원).
가장 인기가 많은 크기는 2베드로 보통 한 달에 4,000~7,000불(500~800만 원) 정도 하며, 한 가정이 들어가거나 싱글 2명이 룸메이트로 나눠서 내는 경우가 많다. 젊은 사람들은 거실에 커튼을 치고 방으로 쓰면서 3명, 혹은 4명까지 같이 살며 월세를 아끼는 경우도 있다. 1인당 200만 원 남짓이다.
계약시에는 보증금으로 월세 한두 달치를 걸고, 임대기간은 통상 1년이다. 입주 마지막 달에는 임대사무소에서 인상된 렌트를 통보하고 계약을 연장할 것인지 물어보며 새로운 계약서를 보내준다.
맨해튼이 그나마 미국에서는 가장 서울과 같은 도심의 형태를 띠고 있고,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 의존도가 높은 곳이라 자세히 언급했지만, 아무래도 젊고 잘나가는 싱글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보니 미국의 더 일반적인 주거 형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 일반적인 렌탈아파트는 다인 가족을 위한 도심 외곽지역에 위치한 것일 것이다.
집을 사는 이유도, 방식도 너와 난 너무 틀려
사실 미국의 주거 형식은 문화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먼저 미국 문화를 알아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미국은 비교적 살기가 팍팍하지 않은 탓에, 일반적인 중상층의 경우 대학을 졸업하여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나면 결혼을 하고 집을 구입한다. 히지만 결혼한다고 부모님이 집을 사주거나 돈을 보태주지 않는다.
부모님의 원조가 없으므로, 젊은 사람은 모아둔 돈이 많지 않아 집을 사려면 할부로 살 수밖에 없다. 젊을 때는 이것저것 돈 쓸 데가 많으니 매달 할부금을 낮춰 잡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급적 오랜 기간에 나눠서 매달 갚는 방식이 유리하다. 여기에 더해 정부가 세금 감면의 혜택과 저리의 이자를 지원하기 때문에 30년 짜리 모기지 프로그램을 모든 사람들이 쓰게 됐고 일반적인 문화가 되었다.
미국은 집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투자 수단이 아니라 거주의 공간이기 때문에 주택시장 자체가 실수요 위주로 형성되어 있다. 집값에서 땅값이 차지하는 비중도 한국과는 반대로 매우 낮다. 즉 건물이 집값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땅값이 올라가는 속도보다 건물이 낡아서 가치가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면 집값은 내려가게 된다.
도심지가 아닌 이상, 집 지을 땅은 널려 있기 때문에 땅값은 폭등하기가 쉽지 않고, 집짓는 비용이 급등하지 않는 이상 주택시장은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설령 수요가 넘치게 된다 해도 미국의 일반적인 목조주택은 생각보다 빨리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금방 지어버리면 된다.
우리에게는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당연했던, “집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선진국 사람들이 들으면 갸우뚱하는 이유다. (물론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와 같이 사람이 몰리고, 주택공급이 부족해 집값이 폭등한 도시들도 있다. 단지 이들 도시 이야기를 일반화시키기는 곤란하다는 것.) 일본 사람들도 집은 자동차처럼 낡아가는 소비재의 하나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집을 사는 대신 빌리는 건 도시화와 시대 흐름에 따른 산물
싱글로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서 살다가 그 심심함에 미쳐버리기 직전에 뉴욕으로 도망쳐 나온 후배가 있었다. 미국은 직장회식도 없고 퇴근 후 대부분의 여가 시간이 가정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후배의 경우처럼 5시 퇴근 이후에도 놀 수 있는 거리가 있는 도시는 점차 더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미국의 중소 도시와 비도심 지역은 쇠락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반면, 주요 도시, 특히 외국과의 접점이 있는 도시들은 최근까지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곳들은 결혼/무거운 관계/정착보다는 싱글/동거/가벼운 관계/임시 거주의 성격이 강하다. 국제적 도시인 만큼 해외로의 이동도 빈번하고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자유로운 영혼(노마드족)들의 공간이다. (그러나 화려한 그늘에서는 언제 회사에서 댕캉 잘릴지, 어디로 옮겨야 할지 알 수 없는 불안정을 늘 끼고 산다.)
또한 결혼은 하되 자식은 낳지 않는 맞벌이 딩크족(Double Income, No Kids), 교외로 빠져 나갔다가 다시 도심으로 되돌아오는 중산층과 같이, 기존의 아메리칸 드림이 구축해온 단란한 가정의 모습은 점차 퇴색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집에 얽매이지 않고 쉽게 옮겨살 수 있는 자유와 옵션을 선호하고 오래 쓸 수 있는 튼튼한 가구보다는 가볍고 저렴한 1회용 가구의 IKEA를 선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 동부쪽(비싼 지역)에서는 4:3:3 공식이라는 게 통용된다고 한다. 소득의 40%는 세금 및 의료보험으로, 집세는 30%, 나머지로 밥 먹고 옷 사입고 데이트하고 여행하고 저축하고 생활을 한다는 의미다. 즉, 집에는 소득의 30% 정도를 쓴다. 집을 구입한 사람은 매달 자동차 할부금처럼 모기지 이자와 원금을 갚아 내고, 집을 빌린 사람은 매달 집세를 내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돈을 집에 쓰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렌탈하우스의 인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선 당장 편리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임대사무소에서 임대 및 관리를 도맡아, 집 보러 오는 사람에게 언제 다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쁘게 꾸며진 쇼룸(모델하우스)을 바로 보여주고, 집주인에게 수표를 써서 풀칠해서 우편으로 보내야 하는 불편함(미국은 우리나라처럼 송금이 편리하지 않음)을 단박에 해결한 온라인 결제시스템을 갖췄다. 요즘 같이 온라인을 통해 물품 주문이 많아지는 세태에 단독주택의 경우 택배를 받는 일이 큰 불편인데, 이곳에서는 등기소포까지 대신 받아다주고 비싼 집세에 걸맞는 새로운 서비스를 계속해서 연구해주니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그렇다면 미국에서 이들 렌탈하우스, 임대주택을 실질적으로 만들고 관리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리츠(REITs) 회사들이다. 이 리츠라는 것은 쌤쏭전자와 같은 주식회사다. 주식을 팔아서 그 돈으로 집을 사고 짓고 임대 놓아 그 수익금을 주주들에게 배당한다.
주택 리츠(Residential Reits) 중 가장 규모가 큰 Equity Residential의 경우, 자산규모가 40조가 넘고 미국 주요 도시권역에 85,000개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개발 부지를 매입하고, 수요에 따라 집을 짓고, 임대하고, 관리한다.
사람들의 주거 수요를 면밀히 조사하고 새로운 상품에 반영할 뿐만 아니라 임대 사업을 하기 위해 유지보수가 용이한 인테리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수 있는 최신 디자인을 곁들인다. 전문 애널리스트는 세입자가 튕겨나가지 않으면서 최대한 낼 수 있는 렌트가 얼마일지 눈 시뻘겋게 뜨고 연구를 하고, 전문 펀드매니저가 조단위로 돌아가는 자금의 운용을 맡아 신규개발 자금을 조달받고, 운영 수익을 주주들에게 배당한다.
호텔등급을 나누듯 렌탈아파트 등급을 나눠 비슷한 레베루(?)의 사람들끼리 묶어 살게 하기도 하고, 여러 곳에 흩어진 아파트 정보들을 레미안 같은 하나의 브랜드를 통해 광고하고 통합 웹사이트를 운영해 온라인에서 입주신청을 바로 받기도 한다. 특히, 대도시권역의 시내 요지에 비싼 집들이 많다보니, 이들을 럭셔리아파트(Luxury APT)라고 부르기도 한다.
뉴스테이의 미래
이번에 정부에서 준비하고 있는 ‘뉴스테이’, 한국형 렌탈아파트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름만 영어로 바꾼다고, 건물만 짓는다고 될 일이 아니란 건 다들 잘 알 것이다. 문화가 바뀌고 경제적 인센티브나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
2007년부터 필자가 한국에 도입하려고 준비했던 렌탈아파트 사업을 결정적으로 좌절시켰던 분은 지주 중의 한 분으로 무조건 고급 대형 빌라를 지어 팔아야 한다며 세상의 흐름에 눈과 귀를 막은, 자칭 ‘내가 최고의 부동산전문가'(나이 80세) 꼰대 할배였다. 하지만 소유에서 임차로, 대형에서 소형으로, 전세에서 월세로 넘어가는 대세는 피할 수 없다. 이미 이 할배의 주장과 정반대로 세상은 흘러가고 있었다. 편의점이 골목골목 들어서면서 불과 몇 년 전 동네 슈퍼에서 500~600원에 사먹던 데자와가 지금은 12,00원에 편의점에서 팔리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업스케일에 쉽게 적응하고, 지갑도 생각보다 쉽게 열지도 모른다.
오피스텔 건물을 통째로 인수해서 운영하는 본격적인 서구식 렌탈 아파트가 서울역(트윈시티)에 등장했다. 앞으로 렌탈아파트에 대한 많은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이어질 것이다. 임대주택 내의 고급 게스트라운지에서 생일 잔치를 하는 꼬마가 아파트 사는 친구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나올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그때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모 아파트 광고가 새롭게 이해될지도 모른다.
원문: 남성태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