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에 선보인 로버트 하인라인의 명작 『스타쉽 트루퍼스』에 등장한 강화복(파워드 슈트)은 SF 역사상 가장 멋진 발명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우주라는 적대적 환경에서 강력한 전투 능력을 유지하고 싸울 수 있는 병사를 위해서 만들어진 이 시스템은 이후 <스타 크래프트>를 비롯한 많은 작품에 차용되었고, 근래에는 <아이언맨>을 통해 친숙해졌지요.
오래전부터 세계 각지에서는 이 강화복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개발을 계속해 왔습니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지만, 대개는 <스타쉽 트루퍼스>의 영향 때문인지 군사용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죠.
그러나 일본의 한 벤처기업은 일본이라는 환경에서 실생활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회사 이름인 사이버다인(<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스카이넷을 개발한 회사)과는 달리 사람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서 강화복을 만들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하이브리드 보조 관절(Hybrid Assistive Limb), 즉 HAL입니다. (HAL9000: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명령의 오류로 인해 승무원들을 해친 컴퓨터)
강한 힘이 아닌 일상을 위한 강화 슈트
HAL은 처음부터 ‘강한 힘’보다는 더 적은 힘으로 보행이나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 개발했습니다. 목적한 대상은 루게릭병처럼 근력이 약해지는 희귀 질병이나 노년층. 다시 말해 힘 없는 이들이 최소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 결과 HAL은 단순히 강화복으로서가 아니라 ‘의료 기기’로서 주목받게 되었고, 실제로 루게릭병을 비롯한 여러 질환자를 대상으로 시험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사 이름(사이버다인)과 제품 이름(HAL)과는 달리, 진정으로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도구로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HAL9000: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명령의 오류로 인해 승무원들을 해친 컴퓨터)
이 제품은 일본에서 3,000만원 정도에 구매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상용화된 것은 좋지만, 여하튼 자동차 1대 값에 달하는 가격은 부담이 되기 마련이죠. 가뜩이나 치료에 많은 돈을 써야 하는 환자들에게 더 큰 부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운 해답이 나왔습니다. 바로 일본 후생성 장관 자문 기관에서 이 HAL을 의료 보험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4월부터 적용될 예정인 이 보험 대상은 루게릭병 외에 일부 질환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보험 적용으로 인하여 HAL이 더 대량으로 보급된다면 전체적인 가격이 낮아질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업체에서도 참여하여 훨씬 좋은 제품들이 꾸준히 생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환자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동시에 일본의 로봇 산업을 지원하는 엄청난 효과가 기대되는 것입니다.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식의 변화’
흔히 SF 작품에서는 인공 장기나 각종 기술 혜택이 일부 부자들에게만 집중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성형술이 발달하자 부자들만 잘 생긴 모습으로 살게 되며, 수명 연장술도 역시 갑부들만 혜택을 받습니다. <은하철도 999>처럼 사이보그 시술을 받은 부자들이 인간을 사냥하는 장면도 종종 등장하지요.
하지만 일본에서 채택한 ‘HAL’의 보험 적용은 이 같은 SF의 장면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SF 속의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기술 혁신’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 즉, 복지라는 제도의 채택임을 느끼게 해 줍니다.
SF 속 기술은 사람들의 삶을 좋게 만들어줄 수 있지만, 반대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기술의 발전은 일자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더 많은 일자리를 줄이고 극소수 사람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상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될 경우 인류에게는 ‘디스토피아’만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값비싼 재활 의료 기기인 HAL에 대한 의료 보험 적용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삶이 좋아질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러한 혜택을 통해서 기술 발전을 더욱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될 수 있다면, HAL만이 아니라 수많은 재활 의료 기기들이 사람들을 돕게 될 것입니다. 아시모 같은 로봇이 발전하여 만들어질 로봇 간병인을 복지 제도로 지원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은 기술 발전을 더욱 가속하면서 우리의 삶을 위한 기술로서 활용될 수 있겠지요.
영화 속에서 군사 컴퓨터를 만들어 인류를 위기에 빠뜨린 ‘사이버다인’사가 현실에서는 병자들을 돕는 재활 의료 기기를 만들어내고(사실 터미네이터의 기술은 뛰어난 의수에도 충분히 사용될 수 있었을 겁니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을 해치던 HAL이 현실에서는 의료 도구로서 도움을 주는 세계…
SF에서 보여주는 과학적 상상력은 우리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그 가능성을 어떻게 이끌어나갈까는 결국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원문: 표도기의 타임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