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 게이” 논란에 파묻힌 차별금지법 결국… 이라는 기사에서 볼 수 있듯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 아마도 일시적일 – 승리를 쟁취했다. ‘국가 질서를 파괴하고 사회를 무너뜨리는’ 동성애자들과, ‘종북’ 세력들과, 그리고 이를 방조하고 사회 혼란을 야기하려드는 차별금지법 발의자, 찬성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욕설과 비난이 쏟아졌다. ‘몰락하는 교회’ ‘무너지는 사회’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물들이는 죄악’을 허용할 수 없어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에 ‘반대’한다는 그들의, 동성애자들을 향한, 밑도 끝도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의 댓글, 저주와 멸시와 분노가 뒤섞인 댓글들을 보면, 이 사람들이 정녕 신을 믿는 자들인지 아니면 악마의 현신인지 궁금해진다. 정말이지, 지옥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기까지 한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승리했다. 우리의 한심한 ‘진보적’ 민주통합당은 지난 대선 당시 “동성애·동성혼의 법제화에 절대 반대하는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의 건의에 대해, 민주당은 기독교계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동성애·동성혼을 허용하는 법률이 제정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데 이어, 이번에도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우기는커녕, 그들을 배신하고 기독교 기득권 세력에 달라붙어, 어떻게든 민주당을 살리려는 처절한, 하지만 무의미할뿐더러 사회적으로도 대단히 해로운 몸부림을 쳤다.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한국의 인권 의식
한국에서 차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 소수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외국인, 귀화한 한국인, 혼혈, 여성, 전라도 출신, 장애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등, 오히려 너무 우리 생활에 만연해 있어서 차별을 차별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이 한국이다. 특히 동성애와 관련하여, “딱히 동성애를 혐오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친구 중에 게이가 있으면 찝찝할 것 같다.”라는 소리를 해놓고선, 차별적 발언이라는 지적을 받으면 “난 호모포비아가 아니다.”라고 강변하거나, “게이를 보고 징그럽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게 한국의 인권 의식 수준이다. 대형 교회들은 동성애가 죄라고 주장하는데 아무 주저함도 없고, 심지어 서울대에서는, 동성애 인권을 보장하자는 포스터에, 동성애혐오적인 스탬프를 찍어놓고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일까지 일어나는 판이다.
한국의 인권 보장, 특히 동성애와 관련한 인권 보장이 엉망이라는 사실은 국제적 관점으로 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UN에서는 2011년 여름, ‘동성애 차별금지 결의안’을 채택했다. 반기문 의장은 지속적으로 각국에 동성애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안을 만들 것을 촉구해왔으며, 지난 12월 8일에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도덕적 폭력이고 중대한 인권침해이며 공중보건의 위기”이며, “국제인권법에 따라, 모든 국가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것을 포함하여 폭력과 차별로부터 모든 국민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반드시 취해야 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2011년 11월에 나온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에 관한 유엔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적 지향과 성적 정체성을 근거로 일어나는 모든 종류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이를 예방, 해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지난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을 맞아 성 소수자의 인권 옹호를 위해 미국이 앞장서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미국 오하마 주에서는 2012년 3월 28일부터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할 수 없게 하는 조례가 발효되었다.
심지어 미국과 유럽 각국은 차례차례 동성애자의 결혼을 제도화하고 있으며, 최근엔 아일랜드 헌법회의에서 동성결혼 허용안이 79%의 찬성률로 가결되었고, 17일 밤엔 뉴질랜드 의회에서 동성혼 제도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동성혼 제도화를 논하는 서구 선진국들에 비하면, 이제야 겨우 동성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자’는 한국의 담론 수준은 너무나도 뒤떨어져있고, 낮은 단계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차별금지법안의 구체적 내용
이쯤 되어 다시 한 번 최원식 의원 외 11명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을 보자. 제안 이유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평등이라는 헌법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별, 나이, 용모, 지역, 학력, 혼인상태, 종교, 정치적 성향, 가치관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 예방하고 불합리한 차별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기본법을 제정하고자 함.”이라 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체 뭘 가지고 ‘차별’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법에서 정하는 ‘차별’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링크)
제4조(차별의 범위)
1.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연령·장애·병력·피부색·용모 등 신체조건, 인종·언어·출신국가·출신민족·출신지역 등 출생지, 기혼·미혼· 별거·이혼·사별·재혼·사실혼 등 혼인상태, 출산형태 및 가족형태, 종교, 정치적 견해, 전과·성적평등·성적지향·성별정체성·학력·고용 형태 등 사회적 신분, 그 밖의 사유를 이유로 차별하는 행위
2. 제1호에 해당하는 이유로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의 영역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가.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나. 고용(모집, 채용, 교육, 배치, 승진·승급, 임금 및 임금외의 금품 지급, 자금의 융자, 정년, 퇴직, 해고 등을 포함한다)
다. 재화·용역 등의 공급이나 이용
라. 법령과 정책의 집행에 있어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차별하는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
3. 외견상 성별·학력·지역 등에 관하여 중립적인 기준을 적용하였으나 그에 따라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정당한 사유 없이 불리한 결과가 초래된 경우
4. 성별, 인종, 피부색, 출신민족, 장애를 이유로 신체적 고통을 가하거나 수치심, 모욕감, 두려움 등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5. 성별·학력·지역·종교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 등 불리한 대우를 표시하거나 조장하는 행위
제1호에 해당하는 이유로 인터넷, 소셜 미디어 등 온라인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그러니까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불합리한 이유로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에게 불이익과 고통을 주지 마라. 2013년, 현대에 와서 이 정도는 당연하게 여겨져야 마땅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간단한 논리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앞서 익히 보아 알 수 있듯, 엄청난 사회적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부터 따라가도 한참 늦은 판에 오히려 저항을 받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에겐 동성애를 비난하고, 막을 권리가 있다?
보수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지 않겠다. 그들 주장이 많은 부분에서 허위인데다가, 그 논리적 구성이 너무나도 조악하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의 주장이 기본적으로는 어떤 ‘특정한’ 종교적 윤리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 믿는 가치 판단 기준은, 물론 그것을 믿는 특정한 집단에는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동성애가 죄라고 적혀 있든, 안 적혀 있든, 예수가 동성애를 했든 안 했든 그건 어쨌든 이 논의에는 별 상관이 없다. 여기서 퀴어 신학을 말하고자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동성애 차별 금지에 대한 논의에 있어, 굳이 기독교의 도덕 체계가 동성애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엄밀히 따질 생각은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기독교인들의’ 도덕이자 윤리이고, 그것을 기독교 바깥으로 가지고 나와 일반 사회에 적용한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굳이 논할 가치가 없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꼭 반박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첫째는,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꼭 한 번씩 나오는 논리. “동성애를 혐오할 권리는 왜 보장해주지 않는가. 우리는 동성애를 비난할 권리가 없는가. 우리는 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할 수 없는가. 이건 역차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기본권 개념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에서 나오는 궤변이고, 이런 권리는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에 들어서, 인간은 끝없는 투쟁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하나하나 쟁취해왔고, 덕분에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권리들은 국제법 혹은 헌법에 명문화되어, 인간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권리들이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인 간의 이해와 권익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의 가치관이 다르고 모두의 이해관계가 다른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권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인간들의 권리를 100% 보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인 간의 관계에 있어서 발생하는 권리의 ‘충돌’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끊임없이 논해져 왔다.
기본권의 충돌, 그리고 기본권의 유사충돌
하지만 이런 ‘기본권의 충돌’과는 그 뜻을 달리하는 개념이 있다. A가, 지나가던 B를 주먹으로 때렸다고 가정하자. 이때 A는 자신의 행동을 ‘내게는 맘에 안 드는 인간을 때릴 자유가 있다’며 변호하는 것이 가능할까? 굳이 복잡한 논리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한 사람이 그저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남을 때릴 권리가 없다는 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강간이나 살인도, 성적자기결정권에 따라서 혹은 행복추구권에 따라서,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것들일까? 그게 과연 인간의 기본권일까? 이때 쓰이는 개념이 ‘기본권의 유사충돌’이다.
마치 사인 간의 권리, 위에 가정한 상황으로 말하자면, 때린 A의 권리 (‘적극적 행복추구권’?)과 맞은 B의 신체권・인격권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왜? 애초에 A에게는 그런 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A가 말하는 ‘기본권’이, 보호영역에서 벗어나 (즉 남을 때려가면서까지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헌법이 보호하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것), 기본권의 구성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즉,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주장할 수 있는 기본권’으로 인정받지 못한 권리는 ‘권리’가 될 수 없다는 소리다.
‘차별할 권리’ 혹은 ‘혐오할 권리’는 과연 존재할까? 앞서 말했듯, A에게는 단지 B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여 B의 기본권을 짓밟을 권리가 없다. 이는 호모포비아-성 소수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게이짓’이 싫다는 이유로, 동성애가 ‘더러워보인다’는 이유로 혐오 발언을 내뱉을 권리,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차별할 권리는 없다. 설령 동성애가 ‘죄’ 이자 ‘장애’ 이자 ‘에이즈의 주범’이자… 라는 나름대로의 ‘이유’(사실인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는가,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가 있더라도, 그게 특정 집단을 향한 일방적인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누구에게도 자의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만이 있을 뿐이고, 이는 세계인권선언을 포함한 각종 국제인권법에서 선언하고 있는 내용이며, 인권과 관련된 한국의 법들도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동성애’는 과연 공공의 힘으로 제약되어야만 하는 (제약될 수 있는) 기본권인가?
위대한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 “자유론”에 나오는, 이 저작 전체를 개괄하는 한 부분을 인용해보겠다. “이 논문의 목적은 하나의 아주 단순한 원칙을 주장하는 것인데, 이 원칙은 사회가 강제와 통제의 방법 – 그 수단이 법적 처벌의 형태로 가해지는 물리적 힘이건, 아니면 공론의 도덕적 강제이건 – 으로 개인을 다루는 방식을 절대적으로 억제할 자격이 있다. 이 원칙이란, 인간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으로 어느 한 사람의 자유에 정당하게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자기 보호를 위한 경우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문명화된 공동체의 어느 한 구성원에게 그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이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타인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경우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략)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그에게 더 좋다는 이유로, 그것이 더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이유로, 타인들이 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거나 혹은 심지어 올바르다는 이유로 그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도록 강제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펭귄클래식 코리아, 권기돈 역 54p)
밀이 주장한 이 ‘원칙’은 현대의 우리가 말하는 인권, 자유 개념과 거의 합치한다. 이에 따르면, 성 소수자들의 사랑은 (그 자체가 사회와 개인들에게, 객관적으로 명백히 나타나는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국가나 종교와 같은 어떤 세력이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이자 ‘자유’이며, 타인들에게 그럴 자격도 부여되지 않는다. 오히려, 동성애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자들의 ‘차별’이야말로, ‘타인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주고 있는 이상’ 이 원칙에 따라 제한되어야만 하고, 이미 다른 국가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공공연히 말하지 못하게 된다’라는 것을 차별금지법의 반대 근거랍시고 내세우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게 차별금지법의 핵심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그것은 때로 그들이 그들의 혐오 발언에 대해 ‘자신들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거나 멸시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회개하게 하고 구원해야 할 죄인이자, 불쌍한 어린양으로 본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주장은, 밀의 말처럼 13 그 의도가 ‘순수할’ 수는 있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 평신도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 자체에 관해서는 이런 견해를 갖고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발언들이 성 소수자에 대한 몰이해와 그들의 편협한 윤리 체계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성 소수자들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주고 있는 이상, 이는 다른 ‘의도된’ 혐오 발언들과 다를 수 없고, 따라서 권리로서 존중할 수 없다.
정치 세력으로서의 보수 기독교와 무너지는 그들의 도덕적 신뢰
어떤 집단 내부의 특수한 교리 혹은 도덕 체계를 들어, 그 체계 안은 물론 밖에까지 그 가치 판단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다양성이나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극단적인 폭력 행사로까지 치닫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나, 혹은 독일의 나치당이 그렇고, 물론 한국 기독교도 이 경우엔 포함된다.
파시즘 연구의 대가라 일컬어지는 로버트 팩스턴 교수는 그의 저서 “파시즘 (The Anatomy of Fascism)”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파시즘을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점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 정의하고 있다.
그의 저서에서는 어떤 것을 두고 파시즘이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따지기 위해 이탈리아와 독일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을 전부 살펴보고 있고,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 기독교를 파시즘이라 칭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그럼에도, 각종 파시즘 집단들과 현재의 한국 기독교는, 위의 정의로부터도 읽을 수 있듯,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의 권위는 계속해서 추락해가고 있다. 노예는 해방되었고, 여성도 성직자가 되었다. 전도하러 나오는 기독교 신자들은 마치 귀찮은 파리떼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미 자본, 정치를 아우르는 ‘권력들’과 결탁하고, 으리으리한 건물을 짓고, 각종 성 추문을 일으켜, 종교로서 갖고 있던 도덕적 권위는 잃어버린지 오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로서는 내세울 수 있는 게 동성애에 관한 강박적 성서 해석과 윤리체계 강요밖에 남지 않았고, 이를 가지고 기독교 내부의 기강을 다시 세우고 종교로서의 권위를 재차 주장할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차별에 민감한 사회였다면, 인권 감수성이 풍부한 사회였다면, ‘동성애청정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노골적으로 동성애를 ‘나쁜 것’ ‘병과 같은 것’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보며 죄악시하는 보수적 기독교 세력은 외면받고, 끝내는 망해버리고 말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국민의 고작 25%가 동성결혼에 찬성하는 한국의 보수적인 풍토는 그들에게 절호의 환경을 제공해주고 말았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지난 12월, 그리고 바로 이번 일에서도 볼 수 있듯, 아주 성공적으로 기득권 정치세력과 손을 맞잡고 그들의 원하는 바 (마치 나치가 했던 것과 같은, 특정 그룹의 배제와 존재 부정)를 이뤄내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 세력의 레토릭
동성애 반대를 주장하는 보수 세력의 레토릭은, ‘동성애를 ‘허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를 혼란과 위험에 빠뜨린다’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이런 레토릭에 대해 “제안된 변화가 어쩌면 그것 자체로는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들거나 이런저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며, 간단히 ‘위험 명제’라 칭한다. 향간에 떠돌아다니는 ‘차별금지법 반대하라’는 문자메시지나, 최근에 한겨레에 실린 한기총 대표의 인터뷰를 보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위험’을 말하며 대중 (그리고 신도들)을 상대로 ‘협박’을 하는지 알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를 만들 때 곽노현 당시 서울시교육감에게 ‘당신 열두살 딸이 임신해 오면 어쩔 거냐’고 내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답이 없어요. 남의 일 하듯이 만드니까 사회가 혼란이 옵니다. 이걸 법으로 통과시키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합니다. 좌파가 누구냐?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 사회 혼란으로 말미암아 북한을 유익하게 만드는 사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입니다.”
-임신한 청소년을 학교에서 징계하느냐 마느냐, 동성애를 하느냐 마느냐는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는데요.
“관련 없습니다. 그런데 (확산되면) 사회적으로 혼란이 옵니다. 그게 누구를 이롭게 합니까? 정치, 사회, 문화 어느 쪽이라도 혼란이 오면 이익을 보는 곳은 북한입니다. 좌파는 그런 일만 고집하면서 해왔습니다. 그래서 한기총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단 말인가요.
“그렇게는 생각 안 합니다. 빵 한쪽을 훔친 것일 뿐이지만 그런 범죄를 통해 사회가 혼란해집니다. 의원들은 소수 인권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다수 인권이 더 중요합니다. 교회는 ‘동성연애를 해선 안 됩니다’고 말합니다. 성경 레위기를 보면, 여자와 여자가 여색을 하고, 남자와 남자가 남색을 하면 즉시 사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소위 말세 아닙니까? 그동안 기독교인들이 ‘정신 차리자’ 하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법안 통과되면 그럴 수 있습니까? 벌금 3000만원 먹어요. 못합니다.”
-동성애 자체에 대한 비판인데 교회는 가장 낮은 자의 손을 잡아줘야 하지 않나요.
“학력, 전과 등의 차별은 기독교가 적극 나서야 합니다. 동성연애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목사가 창녀촌에 가서 창녀들 손 어루만져주면서 이런 거(성매매) 하지 말라고 합니다. 동성연애자들한테도 손을 잡고 ‘게이 노릇 하면 되겠나’ 하면서 기도해주고 위로합니다. 웬만하면 돌아옵니다. 하지만 법이 제정되면 전도를 못합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북한에게 이득이 된다, 교회에 위기가 온다, 혹은 질서가 무너진다 등, 딱히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나 논리적 구성도 조악한데다가 (보면 알겠지만 이들의 말은 어떤 논리적 근거를 가진 추측이라기보다는 망상에 가깝다. 위에서 인용한 논리대로라면, 이렇게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기독교와 한기총은 극좌다), 가치판단 기준 또한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하지만 하나 공통된 부분은, 이 모든 이유로 인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끝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로직이다.
이 명제는, ‘기독교가 탄압을 받게 된다’는 식으로 변형되어 보수적 기독교 신자들에게 빠르게 스며들었고, 논리나 객관적 사실과의 합치 여부와는 전혀 관계없이, 위기감 (공포감)을 통해 신자들의 집단행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일으키게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국회 입법 예고 사이트의 댓글들을 보면 ‘전통 윤리가 흔들린다’ ‘사회가 무너진다’는 등, 대부분이 이 사회를 파국으로 이끌 ‘위험’을 말하며 입법을 중단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듯, 이 명제는 복지정책의 수립과 재분배, 여성의 권리 신장, 교육의 확대, 더 과거로 거슬러가서는 보통선거권 일반화 얘기에서까지 빠지지 않고 등장해왔다. 이 레토릭들은 인류의 발목을 잡고, 진보를 다소 늦추고 기득권의 생명을 조금 더 늘리는 데 일정의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레토릭들의 수명이 그리 길었던 것은 아니었고, 위험이 과장되었거나 혹은 거짓이었다는 것이 증명됨과 동시에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성직자가 되는 것을 허용하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고, 교회 예배때 전자기타나 드럼을 동원해서 춤을 추고 CCM을 부르는 게 위험하다고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애초에 개신교 그 자체도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사이비였다. 그럼에도 교회는 진보해왔다. 해방신학이 나오고, 여성신학이 나오고, 이제는 퀴어신학이 발달하고 있다. 교회는 엄숙한 분위기의 성소에서, 점차 콘서트장처럼 변해갔고 예배의 분위기는 더욱 자유로워졌다. 이런 부분들을 봤을 때, 과연 동성애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것이 교회와 사회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는 게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맺으며 – 지금부터의 이야기
이 글의 맨 첫 부분에서, 난 보수적 기독교들의 이번 승리가, 일시적일 것이라고 썼다. 물론 그럴 것이다. 많은 서구 국가들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 나아가 동성혼에까지 찬성하고 있다. 동성애가 지나온 길은, 흑인 노예들과 여성 해방이 지나온 길과 닮았다. 성경은 노예제와 여성 차별을 말하고 있지만, 시대가 지나고 ‘인간’ 그리고 인간이 가진 권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고찰, 논의가 이루어지며 그 텍스트들의 절대성은 부정되었다. 동성애도 결국은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그 시기가 빨리 오느냐, 다소 늦게 오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확신에도 불구하고, 당장 동성애자에 대한 보수 기독교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온 힘을 다해 제지할 필요가 있으며, 하루라도 빨리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 수립을 관철시켜야만 한다. 지금도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 성 소수자들이, 제대로 된 방패막이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이런 차별과 혐오 발언에 직면해야 하고 있기 때문이고, 게다가 보수 기독교는 벌써부터 차별을 더욱 넓혀가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한 동성애자 청소년, 육우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아까운 생을 마감하기 전, 한기총은 동성애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죄악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한기총의 행태, 그리고 보수적 기독교의 야만적 행태에 큰 분노와 슬픔을 느끼고, 이를 고스란히 글로 남겨놓았다. 그리고 이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사랑과 용서를 말하는 기독교가, 사회적 약자의 편이 되어주지 못할망정, 혐오와 차별, 배제와 억압을 목놓아 부르짖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보수적 기독교의 편협한 세계 속에 고통받는 성 소수자는 없고, 그 자리에는 오로지 고쳐야 할 병자, 구원받지 못할 죄인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 죄도, 아무 병도 없는 성 소수자는 그렇게 죄인, 병자로 낙인 찍혀버린다. 이는 성 소수자들은 물론 성 소수자가 아닌 기독교인에게도, 기독교인이 아닌 이에게도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는 과거에도 이런 과오를 되풀이해왔다. 마녀와 지동설을 말하는 학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죽였다. 이런 비극이 아직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깊이 반성해야만 하고, 그들이 대체 무슨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반드시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또한, 보수 기독교의 이런 비상식적인 행태에 분노하는 우리들도, 더 조직적이고 끈질긴 투쟁에 나서야 할 것이다. 동인련을 비롯해, 동성애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단체들은 얼마든지 있고, 성 소수자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진보적 기독교 교회와 단체들도 있다. 그들을 후원하고, 응원하고 연대해야만 한다. 성 소수자의 차별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의 권리, 인간의 보편적 권리, 그리고 이 사회의 진보로 이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맹목적 신앙과 위기감을 바탕으로 집결하는 보수적 기독교의 조직력은 우주라도 정복할 기세인데, 이에 반해 진보적 목소리는 너무도 파편화되어 있다.
앞서 말했듯 지난 17일엔 뉴질랜드에서 동성결혼 제도화 법안이 가결되었는데, 찬성 77표로 국회를 통과하는 그 순간의 영상f을 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이렇게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너져내리는 사회를 볼 수 있는가? 북한의 남한 침략 계획을 볼 수 있는가? 증오와 멸시를 볼 수 있는가? 구원받지 못할 죄악을 볼 수 있는가?
반면 한국 보수 기독교는 어떤가. 그들이 올리고 퍼나르는 ‘동성애의 진실을 알리는 동영상’ 등에서, 사랑을 볼 수 있는가? 인류애를 느낄 수 있는가? 예수의 희생과 구원의 기쁨을 볼 수 있는가? 뉴질랜드 의회의 동영상을 보는 내 눈엔 그저 사랑과 감사, 기쁨만이 보였고,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 우리가 싸워서 얻어내야 할 것은 억압과 차별로 인한 눈물이 아닌, 이런 함성, 이런 기쁨, 그리고 이런 감동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를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연대 투쟁밖에는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보수적 기독교의 그 오만 때문에 누군가가 눈물 흘리고,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하는 것, 성 소수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결국 인류의 보편 정신, 그리고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다. 인류의 행복, 그리고 기독교의 미래는 결코 배척과 혐오, 차별, 억압에 있지 않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하루 속히 부디 좁은 성경과 교회 안의 세계에서 벗어나, 바로 자신의 주변에 있을 소수자를 향해 공감과 연대의 손을 내밀길, 그래서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악을 범하지 않고 진정한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