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다 문득 주방을 둘러보면 셰프들은 오늘도 바쁘다. 조리대 앞에 선 그 기세등등한 풍채가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다 보면 한참이다. 우뚝 선 흰 모자들이 오르락내리락. 신나는 구경이다.
갑자기 냉장실로 향하던 한 셰프가 움푹 몸을 숙인다. 주방과 냉장실 사이 낮은 천장에 그 긴 모자가 걸리지 않도록 살금살금 지나간다. 셰프들은 왜 저런 모자를 쓰는 걸까? 출발은 거기에서. 셰프의 그 요상한 모자에 관한 이야기다.
‘셰프 모자’의 기원
셰프의 모자, 일명 토크(Toque)의 기원은 영국 헨리 8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헨리 8세는 요리에 관한 내용과 순서 등을 메모하여 식탁 위에 놓고 그 순서대로 음식을 즐겼다.
이처럼 요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의 식탁에 어느 날 올라온 수프 한 그릇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수프에서 나온 머리카락 한 가닥은 다혈질이었던 헨리 8세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고 왕실 요리사는 그 자리에서 참수형에 처해진다.
그때부터 왕실 요리사들은 의무적으로 모자를 써야 했다. 나중에 가서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탈레랑의 개인 요리사가 흰색 모자를 주방의 위생과 청결에 필수 요소로 주장하면서 오늘날 토크가 탄생했다는 설이다.
토크의 어원은 아랍어의 ‘둥근 모자’라는 데서 시작되었으며 좁은 챙의, 또는 챙이 없는 모자를 의미한다. 셰프 모자가 토크라 불리기 전 프랑스에서는 ‘나이트 캡(casque a meche)’ 또는 ‘스타킹 모자’로 불렀다.
토크는 셰프 모자뿐 아니라 오랜 세기 동안 무슬림 신자들, 교황의 모자를 지칭하는 말이었고 오늘날에는 승마 모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주방 위생 관리를 위해서인 건 알겠다. 그런데 왜 두건도 아닌 헤어 네트도 아닌, 챙 없이 위로 우뚝 솟은 토크를 택한 것일까?
왜 하필 ‘그 모자’인가
한 요리사는 토크와 머리 사이의 공간 덕분에 주방의 그 엄청난 열기로부터 머리만은 시원하게 유지할 수 있어서 셰프들이 토크를 쓰는 거라고 농담을 던졌다. 정말 그럴까?
미국의 명문 요리학교 ICE의 마이클 레이스코니스 셰프는 “토크는 주방에 있는 다른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나타내는 표식”이라 말했다. 실제로 고전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라 불리며 1800년대 가장 명성을 떨쳤던 셰프 중 한 명인 마리 앙뚜앙 까렘은 18인치(45.72㎝)나 되는 토크를 썼다. 한때 서울 시내의 한 호텔 식당에는 70㎝ 토크도 있었다.
주방은 엄격한 위계질서가 자리 잡은 곳이다. 칼, 포크 등 ‘흉기’를 들고 불과 씨름하는 전장에 군기는 당연하다. 군기를 잡으려면 명확한 계급 구별이 필수다. 그 표현의 용도로 우뚝 선 토크를 사용한 것이다.
토크의 또 다른 흥밋거리는 모자의 주름 수다. 토크의 주름 역시 주방에서 요리사의 계급과 기량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는 마리 앙뚜앙 까렘이 썼다는 100개의 주름이 잡힌 토크에서 유래했다.
과거에는 셰프가 달걀로 할 수 있는 요리의 개수와 동일하게 토크의 주름을 잡았다. 달걀은 가격면에서나 영양면에서 최고의 재료이고, 다양한 조리 방법으로 어느 식사 메뉴나 코스에 적용되는 가장 훌륭한 레시피 주제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에 들어서 토크는 또 다른 혁명을 맞이한다. 필연적인 레스토랑 산업의 번영과 함께 부엌은 점점 더 커지고 셰프의 일과 장비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토크 역시 그에 발맞춰 셰프가 전공하는 요리마다 다양한 형태로 탈바꿈했다.
옷에는 혼이 깃든다고 했다. 토크는 음식에 대한 열정, 셰프의 그 마음과 역사를 함께 해왔다. 최고의 접시를 위한 셰프들의 우뚝 선 토크의 행진을 앞으로도 기대한다.
원문: 셰프뉴스 / 필자: 박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