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배우의 얼굴은 달랐다. 조각 같은 꽃미남이 대세인 시절이 있었고, 마초적인 근육남이 잘 나가던 때도 있었다. 다정한 남자가 인기이던 때가 있었고, ‘츤데레’ 스타일이 호감형으로 보이던 때도 있었다. 지금 떠오르고 있는 남자 배우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이 사랑받고 있다. 팔레트의 색깔에 비유하면 흰색 같은 얼굴이다. 흰색은 다른 색깔이 묻으면 그 영험한 느낌이 금세 사라지지만, 오롯이 남으면 독야청청 빛난다.
성형으로 비슷해진 얼굴, 조각처럼 깎아지른 얼굴에 식상해질 무렵, 사람들은 맑은 얼굴에 호기심을 보였고 이들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스크린에 순수한 남자들이 늘어난 이유다. <동주>의 강하늘, <응답하라 1988>의 박보검, <오빠생각>의 임시완은 팔레트의 흰색을 닮은 배우들이다. 반듯한 이미지로 충무로 ‘대세남’이 된 세 명의 배우들을 한 명씩 살펴보자.
별을 노래하는 시인, 강하늘
이준익 감독은 영화 <동주> 개봉을 앞두고 기자간담회에서 요절한 시인 윤동주를 영화화하기로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배우가 강하늘이었다고 말했다. 외모가 비슷한 것뿐만 아니라 맑은 느낌까지 표현할 수 있는 배우는 강하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윤동주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수줍어하면서도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능욕의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자아 성찰하는 외유내강 청년인데 강하늘은 순수한 시인의 모습 그대로다. 그가 낭송하는 윤동주의 감성적인 시어들은 스크린에 맑은 기운을 불어넣는다.
강하늘은 윤동주를 연기하기 위해 그의 삶을 연구했는데 그가 찾아낸 시 창작의 원동력은 자기애였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보면서 자기애가 강하다고 생각했어요. 스스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시 안에 반성이라는 미학을 표현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영화에서 윤동주는 자신에게 철저하고 자신의 내면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강하늘의 얼굴이 가진 반듯한 이미지는 이를 설득하는 데 효과적이다.
<동주>와 같은 날인 17일 개봉하는 <좋아해줘>에서도 강하늘은 순수한 남자를 연기한다. 천재 작곡가이지만 연애 숙맥인 모태솔로 역할이다. 박현진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강하늘에 대해 “저 얼굴로 연애를 안 해봤다는 게 판타지”라면서도 강하늘이기 때문에 납득이 되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그가 가진 반듯한 이미지가 비록 판타지일지언정 관객이 믿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강하늘이 대중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2014년 드라마 <미생>을 통해서였다. 그전까지 드라마, 뮤지컬, 영화에서 단역을 소화하며 연기력을 키워가던 그는 <미생>에서 스펙 좋지만 어리숙한 신입사원 장백기 역할로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이후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야비한 욕망에 눈먼 선비 역할, <스물>에서 대기업 입사를 꿈꾸며 스펙 쌓는 엄친아 취준생, <쎄시봉>에서 여학생들이 괴성을 지르게 하는 미성의 소유자 윤형주 역을 맡았다. 세 편의 영화에서 강하늘이 연기한 배역의 폭은 넓었다. 그런데 셋 중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한 작품은 <스물>뿐이었다. <스물>에서 그는 가장 꾸밈없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순수하고 반듯한 역할을 할 때 더 빛나는 배우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1990년 서울에서 태어난 강하늘(본명 김하늘)은 중학생 때 처음 연극을 접하고 나서 배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국악예고에 편입해 연극반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중앙대 연극과를 졸업한 그는 2007년 KBS 드라마 <최강! 울엄마>를 통해 본격적인 연기 세계에 발을 디뎠다. 영화 데뷔작은 2011년 이준익 감독의 <평양성>이다. 황정민의 아내 김미혜가 대표로 있는 샘컴퍼니에 속해 있다.
반듯한 바둑기사, 박보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바둑기사 최택은 과묵하고 사회성 제로인 청년이지만 누구보다 반듯하다. 처음에 답답해하던 시청자들도 나중엔 덕선이와 맺어지는 택이를 응원했는데 이는 박보검이 가진 순수한 매력 덕분이었다.
1993년생으로 올해 스물네 살인 박보검이 연기를 시작한 것은 열아홉 살이던 2011년 영화 <블라인드>부터였다. 지금의 반듯한 이미지와 달리 첫 배역은 뜻밖에 불량소년이었다. 동갑내기 유승호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 도입부에 춤추기 좋아해 경찰 누나(김하늘)에게 잡혀가는 소년이 잠깐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박보검이다.
하얀 피부와 소년 같은 눈망울 때문인지 박보검은 성인 연기자들의 아역을 자주 연기했다. <차형사>에선 강지환의 아역으로 싸움 잘하는 학생이었고, 드라마 <스틸사진> <참 좋은 시절>에선 각각 남궁민과 이서진의 어린 시절을 맡았다. 드라마 <각시탈>에선 학도병에 징용되는 소년으로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기도 했다.
박보검이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 처음 각인시킨 작품은 1700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모은 영화 <명량>이었다. 영화 중반 이순신 장군(최민식)에게 토란을 건네며 대장선에 태워달라고 간청하는 소년이 바로 박보검이다. 덕분에 그는 ‘토란소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반듯한 이미지가 가장 두드러지게 쓰인 영화는 아마도 <차이나타운>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빚을 못 갚고 도망간 아버지가 돌아올 거라고 믿는 순수한 소년을 연기한 박보검은 빚 독촉을 위해 찾아온 불량한 여자 일영(김고은)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공손한 표정으로 파스타까지 직접 만들어 대접한다. 김고은도 관객도 어리둥절한 상황이지만 이때 박보검의 해맑은 미소를 보며 마음을 열지 않기란 쉽지 않다. 영화에서 일영은 박보검을 만난 뒤 엄마(김혜수)와 척을 지게 되는데 만약 박보검의 반듯한 이미지가 없었다면 납득하기 힘든 설정이었을 것이다.
<차이나타운> 개봉 당시 김혜수는 이 영화 속 박보검의 성격이 실제 박보검의 성격과 꼭 닮았다고 말했다. 눈물 많고 반듯한 청년이라는 것이다. <블라인드>의 김하늘 역시 싹싹하고 인사성 밝은 박보검이 대성할 거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왕의 ‘보검’처럼 크고 귀하게 쓰이라는 뜻의 본명인 박보검은 원래 가수가 되고 싶어 피아노치며 노래하는 영상을 싸이더스에 보냈는데 싸이더스에서 역으로 그에게 배우를 권해 여기까지 왔다. 그와 이미지가 비슷한 유승호, 이현우 등과는 동갑내기 친구 사이다.
평화를 노래하는 군인이 된 장그래, 임시완
한국전쟁 한복판에서 고아들을 모아 어린이 합창단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이한 감독의 <오빠생각>은 제목만큼이나 착한 영화다. 임시완이 연기한 한상렬 소위는 전쟁 중 모든 것을 잃었지만 아이들 앞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인물이다. 한상렬이 아이들과 교감할 때 임시완의 반듯한 이미지는 관객을 무장해제시킨다.
임시완이 지금껏 맡아온 배역들은 하나같이 소신 있고 거짓말하지 못할 것 같은 인물들이었다. 연기자로 신고식을 치른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그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유생이었고, 드라마 <연애를 기대해>에선 연애하기 힘들어하는 흔한 남자였으며, 드라마 <트라이앵글>에선 입양된 사실을 알게 된 후 냉소적이지만 한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남자였다.
그가 반듯한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구축한 작품은 영화 <변호인>과 드라마 <미생>이었다. <변호인>에선 시대에 저항하는 대학생으로 모진 고문을 견뎌야했고, <미생>에선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남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비정규직으로 이 시대 청년들의 아픔을 대변했다.
두 작품을 통해 그는 신념을 가진 반듯한 청년의 이미지를 얻었다. 특히 그는 장그래 캐릭터로 앞날을 두려워하는 청춘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됐다. 비록 한때 이를 오용해 고용노동부의 장그래법 홍보 광고에 모델로 참여했다가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내 사과하고 하차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자신이 영화와 드라마에서 구축한 소신 있는 이미지와 실제 자신과의 괴리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중이 좋아하는 건 제 이상적인 모습이죠. 실제로 그 모습에 조금이나마 따라가려고 애써요.”
혼자서 공상을 즐기고, 나서기보다는 속으로 삭이는 일에 더 익숙한 그이지만 필요할 땐 당당히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연기를 통해 다양한 사람을 연구하면서 자신을 좀 더 깊게 채워가려 한다.
1988년 부산에서 태어난 임시완은 연예인이 되기 전엔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부산대 기계공학부에 입학해보니 고등학생 때와 다를 바 없이 공부만 하는 대학생활이 지겨워 쇼핑몰을 운영했고, 가요제에 출전하기도 했다. 이때 그를 눈여겨본 현 소속사에서 그를 발탁해 2010년 ‘제국의 아이들’의 멤버로 데뷔했다.
그가 연기를 시작한 초기에는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지만, 그가 배우로서 자신의 영역을 어느 정도 구축한 지금 그를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국의 아이들 멤버 광희가 입버릇처럼 부러워할만큼 그는 이미 충무로의 대세 배우로 자리잡았다.
강하늘, 박보검, 임시완 등 최근 몇 년 새 주목받은 세 명의 젊은 남자배우들의 공통점은 청정 탄산수같은 순수하고 반듯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성격이 이미지와 같을 수도 혹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배우의 이미지는 스스로 관리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해 갈까? 지금까지 구축해온 반듯한 이미지를 유지할까 혹은 연기 변신을 꾀할까? 이들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원문: 유창의 창작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