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영 아나운서가 트위터로 당연한, 하지만 누구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에 공감하며 예전 글을 살짝 다듬어 본다.
야구계의 선정적 여성 소비, 비단 아나운서뿐일까?
비단 여자 아나운서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새 야구계에서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은 매우 선정적이다. 먼저 시구자다. 매일 홈팀 선발투수보다도 먼저 시구자가 마운드에 오른다. 홈 구단 측에서 섭외한 시구자는 대개는 십중팔구 여자 연예인이다. 홈팀의 모자와 저지에 핫팬츠를 걸친 시구자들은 홈팀 투수로부터 투구폼을 배우는 장면부터 시구하고 난 뒤 관중석에서 관전하는 모습까지 하나하나가 화보다. 때로는 마스코트와 함께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퍼포먼스는 마스코트 볼에 뽀뽀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사랑싸움을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부럽다, 턱돌이…
다음은 치어리더다. 시구쇼가 지나가고 나면 경기가 s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관중석의 치어리딩 팀이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복장은 늘 몸매가 강조되는 탑과 짧은 치마, 안무는 섹시함이 돋보이는 현란한 댄스다. 오늘은 ’00대 000′ 치어리더가 포털 화면을 크게 장식했으니, 내일은 ’00 여신’이 스포츠면 메인에 뜰 차례다. 인기 좋은 치어리더의 사진은 추신수나 류현진 기사보다도 더 메인에 자주 걸린다. 특히 강명호 형님은 엄청난 퀄리티로 남성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배트걸이다.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상의에 아찔한 핫팬츠 차림으로 선수들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다. 바닥에 떨어진 배트를 주워오는 일에 하필 왜 미모의 여성이 필요한지, 시원한 복장은 누구를 위해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무튼 그 중 몇몇은 이미 스타덤에 올랐다. 물론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구단에 감사하는 내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이제는 단아한 차림의 아나운서 ‘여신’들이 등장할 차례다. 먼저 나오는 여신들은 그날의 수훈선수나 이긴 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다. 질문의 밀도를 봐서는 스튜디오에 있는 캐스터와 해설자가 직접 인터뷰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때가 많지만, 야신, 종범신, 양신, 김배신 등 신들이 많은 야구장이라 ‘여신’도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인터뷰가 끝나면 화면은 스튜디오로 옮겨가고, 여신 가운데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여신들이 등장해 그날 벌어진 야구 경기를 정리한다.
여풍은 좋다. 하지만 왜 예쁘고 벗어야만 한단 말인가?
물론 그라운드에 부는 ‘여풍(女風)’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가령 인기 연예인의 시구는 한국 프로야구 고유의 볼거리가 된 지 오래다. 주한 외국인 중에는 한국 야구장 특유의 응원 문화가 좋아서 프로야구 경기장을 찾는다는 사람도 꽤나 된다.
스포츠 전문 여성 캐스터들은 다소 딱딱할 수 있는 프로그램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물론, 대중들이 야구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돕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탁월한 전문성을 보여주는 여성 캐스터도 상당수다. 무엇보다 야구장에 여성 팬 비율이 급증하면서 야구장 내 폭력사태나 욕설 같은 부정적인 응원 문화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건 고무적인 변화다.
문제는 야구에서 여성들이 소비되는 ‘방식’에 있다. 왜 시구자는 언제나 ‘젊은’ ‘여성’ 연예인이어야 하는가? 왜 그렇게 나와서 마스코트와 한다는 게 항상 뽀뽀 아니면 포옹인가? 굳이 낯뜨거운 부러운 장면을 연출해서 얻는 게 무엇일까?
응원단 역시 마찬가지다. 응원단이 존재하는 본래의 목적은 섹시댄스 경연이나 노출 경쟁이 아니다. 야하기보다는 밝고 건강하고 상큼하고 발랄하게, 성인 남성은 물론 여성이나 어린이들도 전혀 거북함이나 민망함 없이 함께 즐길 수는 없을까? 물론 요즘 같은 때에 그런 식의 ‘건전한’ 응원을 해갖고는 스포츠면의 한 귀퉁이도 장식하기 어렵기는 하다. 무엇보다 강명호 형님이 택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야구 중계 중간마다 화면이 좇는 관중마저 거의 언제나 ‘미모의 여성 관중’이다. 배트걸은 일하기 불편한 ‘하의실종’ 패션으로 먼 거리를 뛰어와서 쪼그려 앉는 동작을 수십 차례 연출한다. 미국 야구에도 배트걸은 있지만, 배꼽티와 핫팬츠를 입고 눈요기를 제공하는 사례는 전혀 없다. 수수한 반바지나 운동복 차림으로 경기 진행을 돕는 역할에만 치중한다.
또한 여성 아나운서들은 그들이 지닌 방송인으로서의 전문성이나 야구에 대한 애정보다는 ‘외모’와 그날의 ‘패션’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 때문에 정작 뛰어난 실력을 갖춘 방송인이 외모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경우도 생긴다. 어떤 방송국은 아예 시작부터 야구 전문가인 스타 출신 해설위원들보다는 ‘여신’ 아나운서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노골적인 여신 마케팅이다.
전국민을 위한 메이저리그, 남성을 위한 한국 프로야구?
이런 사례들은 프로야구라는 콘텐츠가 철저하게 ‘성인 남성’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야구장을 찾고 야구중계와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보며 포털 사이트의 야구 코너를 방문하는 이들 대부분을 성인 남성으로 상정하고,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기준으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남성 위주의 야구장 풍경 속에 날로 급증하는 여성 팬이나 미래의 고객인 어린이 팬이 배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구장은 성인 남성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여성 관중도 이제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중도 상당수다.
미국의 경우만 봐도 야구장은 철저하게 가족과 어린이 관중 위주의 ‘건전한’ 분위기를 지켜 나가고 있다. 거기에는 성인 남자들이나 보고 환호할 섹시 댄스나 눈요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여 아나운서의 볼륨감 넘치는 의상이 에이스 투수 소식보다 앞자리에 놓이는 일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 프로야구는 반대로 당장의 상업적인 이익과 클릭수를 위해 ‘섹시’를 내세운 구경거리가 끊임없이 늘어난다. 치어리더 노출과 마스코트와 시구녀의 스킨십이 야구 자체보다도 더 비중 있게 다뤄진다. ‘여성’ 시구자와 ‘여성’ 아나운서 등 온통 ‘여성’을 부각하는 성차별적이고 선정적인 마케팅이 난무한다. 선정성 경쟁을 부추기는 언론과, 이에 편승하는 프로야구 일부 구단들의 합작품이다. 대놓고 말로 하지 않는다 뿐이지, ‘애들은 가라’고 떠미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태인 셈이다.
메이저리그와 한국 프로야구는 역사, 기원, 지역성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한 시구를 예로 들어보자. 재작년 텍사스 구장에서 외야수 조시 해밀턴이 공을 관중석으로 던졌고, 그 공을 잡으려고 몸을 기울이던 남자가 사망했다. 그리고 3개월 후 사망한 남자의 아들은 텍사스 구장에서 시구를 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이가 입장했고, 해밀턴은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줬다. 현재의 문화가 한국적인 응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이라고 꼭 여기에 멈춰있을 이유는 없다.
31년 전, 국민 모두를 위한 프로야구 정신으로 돌아가자
1982년 출범 당시 프로야구는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낭만을. 국민에겐 건전한 여가 선용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31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애초의 목표에 가장 잘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팀은 아이러니하게도 신생 구단인 NC 다이노스다. NC의 홈인 창원 마산구장에는 섹시한 시구녀나 몸매를 부각하는 의상을 입은 응원단, 하의실종 배트걸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마산구장에는 경기 진행을 도와주는 창원지역 어린이들, 그리고 어린이와 가족 단위 관중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가 매주 주말마다 마련되어 있다. 치어리딩 팀이 있지만 노출이 지나친 의상이나 선정적인 안무는 피한다. 대신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안무와, 관중들이 다 같이 함께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응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실제로 NC로 옮긴 치어리더 김연정은 “노출의상을 입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는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다.
NC의 ‘어린이-가족 중심’ 전략은 주말 경기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단 경기 시작 전에는 그라운드에서 사전에 신청한 일반 팬들이 캐치볼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경기 시작 선언은 미리 선정된 연고지역 초등학생이나 장애인 등이 맡아서 한다. 선수 소개 역시 주말에는 어린이 팬이 도맡는다. 심판에게 공을 가져다주는 일이나 배트보이 역시 지역 어린이 팬들의 몫이다.
적어도 마케팅 하나만 놓고 보면, 30년 넘는 역사를 지닌 기존 팀들보다 막내 NC가 훨씬 깨끗하고 신선하며 미래 지향적이다. 지금의 어린이 팬이 자라서 장차 프로야구를 먹여 살리는 고객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NC는 시작부터 미래의 고객을 염두에 둔 구단 운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야구장은 섹시 마케팅 없이도 얼마든지 야구장이 팬들의 사랑을 받는 즐거운 공간이 될 수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데 장애가 되는 문화는, 이제 좀 걷어버려도 좋지 않을까?
부연: 왜 꼭 야구장에 부는 ‘여풍’이 배꼽티나 핫팬츠를 입은 미모의 ‘여신’들에 국한되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전국에는 30여 개 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500여 명의 여자야구 선수들이 있고, 야구 관련 단체나 프로 구단 소속으로 부지런히 일하는 직원들이 있다. 미국의 경우 다저스 단장 후보까지 거론됐던 킴 응(Kim Ng)처럼 야구계 고위층에 속한 여성들도 존재한다. 야구장에 여성이 있을 자리가 단지 응원석에만 존재한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 편집자 주 : 이 글은 작년 프레시안에 올라간 ‘섹시녀가 점령한 프로야구, 애들은 가라?’를 원저자 동의하에 수정 가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