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아기 장수 우투리’ 설화를 기억할 것이다. 아기 장수 우투리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있다. 날개 달린 아기는 장차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해줄 영웅이 될 아기다. 하지만 우투리는 흔히 연상되는 영웅의 모습과는 달리 두 돌쯤 지난 귀여운 아기의 외형을 가지고 있다.
최근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만화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 코믹 히어로물 <원펀맨> 역시 아기 장수 우투리처럼 평범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사이타마는 상대를 주먹 한 방으로 날려버리는 괴력을 보이지만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후반의 평범한 청년이다. 극한 훈련으로 머리가 다 빠진 대머리인 데다, 빨간 장갑을 끼고 노란 복장을 한 영 폼이 나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영웅상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당대의 경제적, 사회적인 조건의 반영물인 것이다. 아기 장수 우투리는 바위 속에 들어가 새 나라를 세우고자 수련하던 중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설화가 조선 시대에 끊이지 않고 전승된 이유는 지배층의 횡포에 대한 저항 의식과 역사적 전환에 대한 기대가 지속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원펀맨은 어떤 캐릭터와 내러티브로 일본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반영했을까?
원펀맨과 영웅 서사구조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 내려온 영웅 신화는 세계가 공유하는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의 신화를 연구한 조셉 캠벨은 이를 17단계로 정리했고,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이를 12단계로 압축했다. ‘(1)보통 세상 → (2)모험에의 소명 → (3)소명의 거부 → (4)조력자와의 만남 → (5)모험으로의 출발(관문 통과) → (6)시험, 협력자, 적 → (7)심연에의 접근 → (8)묘약의 획득 → (9)새로운 시련과 조력자 → (10)승리와 부활 → (11)묘약과의 귀환 → (12)새로은 자아의 완성’이 그것이다. 공통된 서사구조가 존재하는 것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직면하는 사회 문화적인 배경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영웅 서사에서 주인공은 그가 속한 보통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특별한 세상으로 모험을 떠난다. 보통 세상은 주인공의 내적, 외적 갈등을 뜻하기도 한다. 모험으로의 여행에는 유혹자와 적이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주인공은 파란만장한 시련을 겪게 되고 죽음에 직면하기도 한다. 조력자를 만나 이를 극복해 가던 주인공은 결국 깊은 심연에 이르게 되고 비범한 힘을 가지게 해주는 묘약을 얻게 된다.
이를 통해 주인공은 가장 강력한 적을 물리치고 그가 떠났던 보통세상으로 묘약과 함께 귀환한다. 주인공은 영웅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세계와 화해한다.
원펀맨을 영웅신화 서사구조 12단계에 대입해보면 이렇다.
구직자인 사이타마는 매번 면접에서 떨어진다(보통세상).
우연히 괴물에게서 아이를 구하고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한다(모험에의 소명).
혹독한 훈련을 통해 얻은 강한 힘으로 히어로로 활동한다(정의감이라는 내적 조언자를 지표로 삼음).
제자 제노스의 조언으로 공식 히어로 시험을 본다(관문 통과).
필기시험을 망쳐 최하위 등급인 C급을 받는다(시험, 협력자, 적).
강한 상대와 싸우다 패한 상급 히어로들의 면목을 지켜주기 위해 그들의 공을 가로채는 사기꾼 연기를 하고, 자신의 힘에 공허함을 느끼며 다른 히어로와 어울리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다(시련).
조셉 캠벨이 도식화하고 크리스토퍼 보글러와 노드롭 프라이가 보완한 영웅신화 서사구조가 동양의 영웅 서사구조에 완벽하게 적용되기는 어렵다. 원펀맨의 주인공은 서사 구조에 딱 들어맞는 서양의 영웅과 달리 보통 인간에 더 가깝다. 시련을 주는 대상도 시대가 지나면서 전형적인 악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원펀맨의 경우 뛰어난 능력 때문에 다른 히어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고, 함께 어울리지 못하며, 자신이 공을 세워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 외롭고 평범한 존재로 기억될 뿐이다. 이러한 캐릭터가 영웅상으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웅─부조리한 현실의 반영
영웅은 현실 집단에 드러난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영웅상은 당대의 사회적 혼란과 미래에 직면하게 될 불안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영물이다. 서양 영웅의 대표적 캐릭터인 슈퍼맨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의 후유증을 극복하던 시기에 등장했다. 대공황은 심각한 경제난과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했고, 사회는 슈퍼 개혁자를 원했다. 또한, 슈퍼맨은 외계에서 태어났지만, 주위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데 이것은 기회를 얻고자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등 이민자의 입장과 잃어버린 나라로 돌아가게 해줄 메시아에 대한 기독교적 갈망이 투영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 패배로 훼손된 국민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전자 기계 기술로 고도성장을 이룩하면서 낙관적인 자기 확신의 거울이 되어 줄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일본의 만화작가인 데즈카 오사무가 1952년 만화잡지 <쇼넨>에 연재한 ‘철완 아톰’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장기 불황의 그늘 아래 일본 사회에는 새로운 인간 유형이 등장하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를 뜻하는 ‘히키코모리’, 아르바이트나 시간제 근로로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터족’, 득도한 것처럼 현실적인 욕망을 억제하며 활력 없이 산다는 ‘사토리 세대’와 같은 일본 청년들이다.
원펀맨? ‘사토리’ 세대의 일본형 영웅이 아닐까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원펀맨의 주인공 사이타마는 취업을 위한 면접에서 수없이 떨어졌던 인물이다. 그는 구직활동을 멈추고 어렸을 적 꿈이었던 히어로가 되기 위해 3년간 혹독한 수련을 통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게 되고 수많은 악당들을 물리친다. 이런 서사를 접하면서 오늘의 일본 젊은이들이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완 아톰’과 달리 사이타마는 ‘취미’로 히어로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만화 속에서는 히어로도 승단심사를 거쳐야 하고 이를 위해 남의 공을 가로채기도 한다. ‘원펀맨’ 사이타마는 이런 상황을 덤덤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비난하거나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모든 걸 이룬 것 같지만 여전히 보통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움과 끝없는 내적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 청년들은 이런 유형의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있다. 이런 공감은 영웅은 ‘취미’이고 ‘허상’일 뿐, 어떤 영웅도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체념과 암울함이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원펀맨은 우리나라 청년들에게도 인기 있는 만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이 만화가 널리 읽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까?
원문: 단비뉴스 / 글: 김이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