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주갤을 들어가서 글을 읽는데, 요 며칠 ‘홈플 대란’에 대한 글로 도배가 되고 있다. 홈플러스에서 엄청난 프로모션과 물량공세로 수입 맥주를 밀어내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할인 폭이 너무 커서 ‘대란’이라는 말까지 붙였다. 거의 실시간으로 지점별 상황을 업데이트해가면서 어떤 점에 어떤 맥주가 어느 정도 물량이 남아있는지까지 이야기했고, 홈플 대란동안에 구입한 맥주들의 사진까지 올리면서 꽤나 흥분하고 있다. (참고로 이번 홈플 대란 동안에 나는 홈플러스에 가서 맥주를 사지 않았다.)
맥주 업계와 마트 관련 일을 오래 해 온 내가 볼 때에는 이번 사태가 심상치 않다. 생각할 수록 더욱 불길한 쪽으로 생각이 뻗어나가고 있다.
한국 맥주 시장에서 대형마트의 비중은?
먼저 우리나라 맥주 시장을 이해하고, 그 다음으로 마트의 수입맥주 코너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맥주 물량의 대략 90% 정도를 국산맥주, 10% 정도를 수입맥주로 보면 된다. 아직도 그러냐고? 10년 전 얘기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니다. 여전히 90% 가 국산맥주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대형마트에서 누가 요즘 국산맥주를 사냐? 대부분 수입맥주 아니냐?
매대 사이즈만 봐도 수입맥주가 국산 맥주를 압도하고 있지 않느냐?
심지어 편의점에서도 국산보다 수입맥주가 더 많이 팔리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다. 위의 반론은 맥주 시장의 채널별 점유율 혹은 공헌도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맥주가 가장 많이 팔리는 채널은 한식집/고깃집/횟집과 구멍가게들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한식집/고깃집/횟집에서는 회식을 하거나 법인카드를 쓸 때 엄청난 양이 소비된다. 구멍가게들은 팔리는 양이 많지는 않으나, 전국 방방곡곡에 숫자가 워낙 많다. 맥주는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마트에서보다는 집에서 가까운 구멍가게에서 한두 병씩 사다가 마시는 경우가 꽤 많다.
위에서 말한 맥주가 가장 많이 소비되는 두 채널에서는 국맥의 점유율이 압도적이다. 마트는 전체 맥주시장에서 약 15-20% 정도 차지한다. 일반인들이 볼 때는 생각보다 굉장히 작은 수치일 것이다.
이마트가 하면 우리도 한다 – 홈플러스
마트에서 엄청난 규모의 수입맥주 매대를 가져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비자들을 마트로 유인하기 위해서다. 마트에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Traffic Build 상품과 수익성을 높이는 Profit build 상품이 있는데, 수입맥주는 단연코 Traffic Build 상품이다. 그리고 수입맥주를 Traffic Build 목적으로 가장 먼저 사용한 곳은 이마트였다.
수입맥주가 Traffic Build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로 수입맥주 시장 자체가 성장성이 좋다. 최근 5년간 거의 연간 30% 이상 성장했다. (참고: 관세청)
두번째 이유는 최근 2-3년 동안 소셜커머스와 모바일 쇼핑의 부상으로 마트에 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부쩍 줄어들었는데, 술은 인터넷으로 구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맥주를 사려면 결국 마트나 편의점을 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트까지 가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려면 온라인에서 판매하지 않는 상품이 적합하고, 편의점은 체널의 특성상 다양성을 제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트에서는 ‘품종 다양성’ 이라는 전략과 함께 수입맥주 시장을 Traffic build로 사용한 것이다.
우리나라 마트 3사 중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이마트는 가끔 실험적인 전술을 시도할 때가 있다. 마켓 리더이기 때문에 실패해도 메꿀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마트의 경영자인 정용진 부회장은 고급스런 취향과 입맛을 가지고 있다. 그는 크래프트 맥주나 스페셜티 커피와 같은 새로운 트랜드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기업가다. 그가 이끄는 이마트는 크래프트 맥주 섹션을 엄청나게 늘렸고, 각종 수입맥주를 늘렸다. 신세계 L&B라는 와인 수입을 위한 자회사가 있기 때문에 크래프트 맥주의 수입이나 특이 맥주 수입을 늘리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마트가 하면 홈플러스와 롯데마트가 바로 따라한다. 수익성이나 다른 효과를 고려하지 않고 일단 따라한다. 이것은 합리적인 결정도, 비합리적인 결정도 아니다. 1등이 한다고 무조건 하는게 합리적인가? 라고 반문한다면, ‘그럼 안 할꺼냐?’ 라고 물어보고 싶다. 무조건적인 모방이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말한다면,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계산도 안 해보고 따라하는 게 괜찮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홈플러스는 원래 영국계 테스코의 자회사였다. 테스코는 글로벌 소싱, 즉, 테스코 글로벌 전체적으로 맥주를 수입하기 때문에 수입맥주 소싱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이마트가 열을 올리고 있는 카테고리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수입맥주 섹션을 이마트 수준, 아니 그보다 더 크게 늘렸을 것이다.
‘1등이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도 그만큼 잘 할 수 있다’
대기업에서 이보다 더 단순한 논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마트/홈플러스가 하면 롯데마트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들도 동참했고, 수입맥주를 늘려나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전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홈플러스는 작년에 국내 사모펀드 (PE) 인 MBK로 넘어갔다. PE들은 숫자를 꼼꼼히 따져보고 비즈니스를 한다. 아마도 그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국내에서 아직은 수입맥주 판매의 회전율이 그렇게 높지 않음을…
한국 맥주시장, 다양성은 시기상조!?
나는 평소에 마트에서 수입맥주 매대를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취향과 입맛에 비해서 너무 많은 종류를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마트에 준하는 미국의 마트는 아마도 월마트나 타겟 정도일텐데, 월마트/타겟보다 우리나라 마트들의 수입맥주 매대가 다양성이 더 높았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사실 우리나라 수입맥주 섹션은 미국의 하이엔드/프리미엄 마트인 홀푸드나 트레이더 조와 비교해도 그다지 뒤지는 수준이 아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마트에서의 수입맥주는 필요 이상으로 다양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한국 소비자가 트라피스트 맥주, 미켈러, 독피시헤드, 파이어스톤 워커를 즐겨 마신단 말인가? 이런 맥주를 갖추지 않으면 맥주를 사지 않고 돌아갈까? 왜 굳이 이런 맥주들이 모든 사람들이 가는 마트에 있어야 하는가?
그러다가 작년부터 방향성을 찾은 것이 바로 ’10,000원에 4캔, 골라담기’ 였다. 한국 소비자들에게 아직 마트의 다양성은 too much 였고, 이보다는 잘 나가는 몇몇 대표 수입맥주를 싸게 파는 것이 훨신 효과가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대 수혜자는 아사히, 기린, 하이네켄, 호가든, 산토리, 칭따오와 같이 기존에 소비자들의 top of mind에 들어 있던 유명 수입맥주들이었고, 그 다음으로 혜택을 본 것은 어부지리로 여기에 들어가게 된 second tier 수입맥주들이었다. 예컨대 파울라너와 같은 맥주는 인지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골라담기 상품에 끼어들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꼼꼼한 계산을 바탕으로 하는 홈플러스의 새로운 주인이 이 사실을 간파한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직 한국시장은 다양성 보다는 가격+몇몇 인기 맥주의 행사가 더 효과적이다. 그리고 다양성이 중요한 변수라고 하더라도 굳이 마트가 그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는 그 사실 말이다.
향후 전망
여기부터는 소설이지만, 아무래도 이번 ‘홈플 대란’이 끝나면 많은 수입맥주가 홈플러스에서 디리스팅(de-listing), 즉, 매대에서 내려질 것 같다. 그리고나면 아마도 그런 맥주들을 두번 다시는 홈플러스에서 못 볼 가능성이 높다. 대형마트는 한번 디리스팅한 맥주를 다시 리스팅 시켜주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이번 홈플 대란은 안팔리는 상품 떨궈내기 (run-out)이다. 병맥주의 유통기한은 제품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6개월에서 1년, 길면 1년 이상인 경우도 있다. (내 상식으로는 트라피스트의 경우에는 유통기한, 혹은 상미기한이 좀 더 긴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 포함시킨 것은 의외이다. 그냥 계속 놔두고 팔릴 때까지 기다려도 될 텐데 굳이 포함시킨 것을 보면 그만큼 안 팔렸나보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과연 이마트와 롯데마트도 이 물결에 동참할 것인가? 라는 점이다.
먼저, 롯데마트는 수입맥주 ‘밀어내기’에 동참할지도 모른다. 다만, 너무 심하면 롯데그룹의 맥주인 클라우드 판매량에 타격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할 것 같다. 그러니까 롯데마트 주류카테고리 바이어 입장에서는 헷갈리는 상황이다. 1등은 수입맥주를 유지하고, 2등은 프로모션으로 팔아제낀다. 아마도 프로모션 자체에 동참 안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카테고리를 축소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마트는 업계 리더로서 트렌드를 앞서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따라서 이 물결에 동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하더라도 홈플러스 따라하기가 아니라 뭔가 다른 방향으로 하고 싶어하거나, 가격 할인 폭을 더 확대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마트가 동참한다면 그 여파가 기대된다. 과열된 수입맥주 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미 다양한 맥주에 길들여진 소비자 입장에서는 다른 대안 채널을 찾을 수도 있고, 그냥 포기하고 가짓수가 줄어든 수입맥주 시장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주택가 주변에 소규모 바틀샵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거나 미국/일본처럼 리쿼샵이 생길 가능성도 농후하다. 지금까지 국내 주류점은 와인/위스키 중심이라서 고객 방문빈도율이 낮았지만, 맥주를 포함한 바틀샵 형태로 하면 극복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
한가지 착각하면 안되는 점은, 그렇다고 해서 수입맥주 시장이 축소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수입맥주의 양적 팽창은 계속되지만, 다양성은 좀 줄어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품종이 소량씩 팔리는 long tail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들이 더 잘팔리는 시장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
여러 모로 흥미로운 상황이다.
원문: MBA 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