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에게 희망을 주는 ‘붉은 여왕’ 이론
2월 25일 내심 설렜다. ‘붉은 여왕’의 취임식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붉은 옷을 입고 오지 않아서 실망했지만. 그래도 붉은 여왕이 제위에 오르면 한국에도 기생충 붐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도 품어보았지만 기생충학에서 미래 따위 창조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내가 붉은 여왕에 설레었던 이유는 그나마 지금의 기생충학이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준 이론 중 하나가 바로 붉은 여왕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섹시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내용도 꽤 잘 빠졌다. 여기서 붉은 여왕은 진지한 궁서체로 우리가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그 붉은 여왕이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여왕이다. 여왕님 말씀하시길.
“느림보 나라 같으니! 자,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섹스를 통한 유성생식은 딸(…) 무성생식과 어떻게 공존하며 진화했는가?
밀덕후들에게는 군비경쟁이라는 단어가 더 쉽게 이해되겠지만, 섬세한 마인드의 생물학자들은 동화에서 이 비유를 빌려 오기로 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진화는 상대적이라는 이야기다. 즉 진화는 다른 생명체의 진화에 영향을 주고 받는다.
한 작고 귀여운 아기 기생충 한 마리가 당신의 장에 구멍을 내려 한다 생각해보자. 그럼 우리는 소화액을 더 뿜어내거나 면역계를 활성화하거나 하는 방향으로 기생충에 저항한다. 우리가 저항에 성공하면 기생충은 또 그 소화액이나 면역계를 회피하거나 적응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이렇게 서로의 전략에 대해 적응해가며 진화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보면 둘은 그저 계속 같은 자리에 있는 셈이다.
진화야 그렇다 치고 결정적으로 이 가설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붉은 여왕 가설을 바탕으로 성의 발생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섹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사실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성이란 건 굉장히 비효율적인 번식 방법이다.
아니 좋고 나쁜 걸 떠나서 비효율적이라는 점에는 공감할 거다. 밀당에 데이트 비용에. 솔로가 되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이런 비효율성 떄문에 성의 탄생과 유지는 붉은 여왕 이론이 나타나기 전까지 많은 논란을 낳았었다. ‘섹스가 뭐죠?’ 같은 이공계생들의 눈물 어린 질문이 아니라 정말 학문적으로.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일반 생태계에서도 이건 똑같이 적용된다. 외부적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유성생식 – 그러니까 섹스를 하는 놈들 – 과 무성생식 – 딸치면 애가 생기는 놈들 – 하는 놈들을 풀어놓으면 무성생식이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그런데 여기에 기생충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붉은 여왕님의 게임이 시작되는 거다.
기생충은 놈들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열심히 진화해서 기생충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성생식은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에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무리 번식을 많이 해도 다 기생충에 걸리게 된다. 하지만 유성생식은 반반무많이 유전자를 섞어 두기 때문에 기생충이 적응하기도 힘들고 진화 속도도 빠르다. 즉 기생충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섹스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생충에 저항하기 위해 섹스가 나타나 지금까지 유지되어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슬픈 결말 : 유성생식은 위대하다. 우리가 할 수 없을뿐…
붉은 여왕 이론이 재미있는 것은 생물학 내에서도 여러 분야에 적용될 수 있고, 그 외 사회현상에도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한쪽이 중간에 멈추게 되면 파국을 맞게 되는 제로섬 게임 속에서 얼핏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어떤 현상이 탄생해 지속될 수 있다는 개념.
그리고 단순히 붉은 여왕 이론이 멈추면 파국을 맞는다는 개념에서 멈추지 않고 이런 끊임 없는 진화의 달리기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 기생충을 비롯한 여러 병원성 생물들을 우리의 입맛에 맞게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하는 학자들도 나오고 있다.
여왕 특집인데 생물학 이야기만 계속 나와서 뜬금없어 하는 분들을 위한 요약.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붉은 여왕님 덕분에 섹스하고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 그런데 나는 감사할 일이 없네…
편집자 주 : 죄송합니다. 여왕 특집 하려고 했는데 아이템 고갈로 망했습니다. 그래도 글을 주신 변태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