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설날은 양력으로 1월 27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족의 대이동’은 매한가지라서 그 해에도 서울역은 설을 쇠러 고향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요즘과 차이가 있다면 지금이야 자가용도 있고 버스도 많고 비행기도 특별기를 띄우지만 1960년 당시에는 철도가 거의 유일한 지방행 교통수단 이었다는 것이겠다. 서울역은 충청도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총 집결지였다. 그 아수라장의 귀성전쟁에 비하면 요즘의 귀성전쟁은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날이었다. 내일 고향에 이르지 못하면 안된다는 각오에 충만한 귀성전쟁의 용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서울역을 메우고 있었다. 철도청도 대목이었다. 서울에서 10시 50분에 떠나는 호남선 열차의 표 판매량은 평소의 세 배였다. 입석 표도 동날 만큼 표를 팔아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사람들을 태우려면 당연히 기차를 더 연결해야 했다.
덜컹 덜컹 차량들을 부산하게 연결하여 완성한 시간은 불과 출발 5분 전. 이것은 무엇을 얘기할까? 당연히 그때에야 개찰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4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역무원의 거친 목청과 통제 앞에 육상 선수 스타트 자세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땅 신호와 함께 개찰구를 향해 내달았다는 뜻이다. 시간은 5분밖에 남지 않지 않았는가.
와아아아 사람들은 내달렸다. 좌석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맹렬하게 달렸다. 좌석이 있다 한들 뒤늦게 탔다가는 좌석 근처도 가지 못하고 몇 시간을 두 발로 버팅기는 고문을 당해야 할 판이었다. 모두가 럭비 선수가 됐고 육상 선수가 됐다. 노약자들은 버둥거리며 뛰었지만 젊은이들의 힘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때 계단 한켠에서 한 명이 크게 비틀거리더니 허우적거리며 넘어졌다. 발을 헛디딘 것이다. 한겨울이었고 계단 곳곳엔 얼음도 맺혀 있었기에 넘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악 악 비명 소리가 나면서 사람들이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그 위를 또 다른 사람들이 넘어져 그 위를 덮었고 억지로 그 무더기에 합쳐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주던 사람들은 파도와 같이 내밀리는 인파의 무게에 결국 그 위에 엎어져 비명을 질렀다. 이미 아래에 깔린 사람들의 입에선 비명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숨이 막혀 가는 동안에도 귀성객들은 몰려들었다. “사람 죽어!” “밀지 말란 말이야 임마.” “경관! 경관!” 악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향에는 가야 했고, 기차는 타야 하는 사람들의 홍수는 좀체로 통제되지 않았다.
그 현장에 한 기자가 있었다. 설 귀성 풍경을 촬영하러 서울역에 죽치고 있던 조선일보 정범태 기자. 그는 한국 사진 저널리즘의 대부라고 불리워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다. 우리 기억에 선연한 여러 사진들이 그의 셔터에서 나왔다. 석 달 뒤 벌어진 고대생들의 4.18 시위에서 깡패들에 맞아 널부러진 학생들을 찍은 것도 그였고 월남에 파병되는 아들 앞에서 막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섰던 어머니를 포착해 낸 이도 그였다. 그는 서울역에서 사람들이 뒤엉킬 때 그곳에 있었다. 그의 회고를 그대로 옮겨 본다.
“ 두번째 개찰구를 돌때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줄이 끊어졌다고 아우성이더군요. 개찰구를 넘어가 보니 밟혀죽고 쓰러진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어요. 그때부터 침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45장짜리 필름에서 34-35장을 들여 현장을 다 찍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나는 그의 프로 근성에 일점 시비를 걸 생각이 없다. 거기서 카메라를 놓고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 반대편에 설 것이다. 기자는 기록하는 사람이고 카메라는 인명 구조 도구가 아니라 역사와 진실을 담는 그릇이다. 그 현장에서 기자는 그의 ‘특종’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의 다음 행동에서는 조금 의아해진다. 찍을 만큼 찍은 뒤, 그의 표현대로 그 아수라장 뒤에서 기차에 올라타 난간 붙잡고 있는 이들까지 찍은 뒤였다면 그는 기자가 아닌 한 시민으로 돌아오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그의 회고에서 그는 기자로서의 책임감을 넘은 이기심을 보여 준다. 그의 회고를 다시 그대로 옮겨 본다.
“어느 정도 사진을 찍었는데 기자는 나 혼자 밖에 없으니 현장만 깨끗이 치우면 그만이다. 사고 수습을 위해 현장에 나온 철도국 직원들에게 사상자들을 빨리 옮기라고 고함을 쳤다. “빨리 병원으로 옮기세요. 여기는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으로!” “여기도 빨리! 용산 철도병원으로 가세요!” “서대문 적십자병원, 그리고 서울대병원!!” 마치 사고수습본부에서 나온 요원처럼 소리를 지르며 가끔씩 잽싸게 셔터를 눌러댔다.”
물론 그가 사람들의 생명보다 특종을 중시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회고 군데 군데에서 배어 나오는 ‘특종 독점’의 욕망의 그림자가 그 빛나는 기자 정신에 아롱져 보이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도 특종을 했다는 생각에 기쁨이 한량이 없었다”고 표현했다. 과장임에 분명하고 실제 그러기야 했을까 애써 두호하면서도 ‘기쁨이 한량이 없었다‘는 표현은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내가 그 후배였으면 술자리에서 몇 대 맞더라도 “선배 그 따위로 말하지 마쇼. “라고 술잔을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프로의 세계는 비정하다고 한다. 입사 면접 때 “나는 사진으로 말할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어떤 임무도 사진으로 증명할 것이다.” 고 면접관을 쏘아보았던 기자 정범태는 진정한 프로였다. 비정하고 지독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 장면을 찍어내지 못했을 것이고, 그가 휴머니즘을 발휘하여 카메라 내려놓고 사람들 구호에 나섰다면 사람 한 둘은 구했을지 모르나 그 장면을 역사에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프로였다.
하지만 나는 1960년 1월 26일의 저 특종사진들을 볼 때마다 내가 프로가 될 수 있을까를 자문하게 되곤 한다. 과연 30명이 넘는 생명이 꺼져가는 과정을 보고서도 특종을 잡았다는 기쁨에 젖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구하려는 마음보다는 특종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뭐해 빨리 사람들 옮기시오!”라고 부르짖을 수 있을까. 결론은 나는 프로가 못된다는 것이다.
1960년 1월 26일 고향길에 숨져간 원혼들의 명복을 빈다
원문: 산하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