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노래 가사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수은등이 손짓하는 제2 한강교 / 오작교 사연 싣고 강물은 굽이친다/ 한 많은 백사장아 봄을 묻지 마라. 아아 오늘도 기다리네. / 그님이 돌아오실 제2 한강교./ 견우성이 눈물짓는 제2 한강교/ 보라는 발자욱에 세월은 흘러간다. 노 잃은 뱃사공아 한을 품지 마라 / 아아 불빛이 흔들리네 그 님이 돌아오실 제2 한강교.” 김세레나의 1966년 앨범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2 한강교 건설의 첫 삽이 떠진 것은 1962년, 준공은 1965년 1월 25일이었다.
이 일대에는 서울 지역 한강의 3대 나루터라 할 양화진이 있었다. 수운(水運)을 통해 바다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울에 들어오는 초입에 있던 이 양화진은 역사적으로, 특히 근대 이후 간간히 그 존재를 드러낸다.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고 목잘라 죽인 것이 오늘날의 ‘절두산’ 아래 양화 나루터 근처였고 그들을 처형하기 전 망나니들이 칼을 씻은 우물이 있던 곳이 오늘의 합정동이었다. 조선의 개화를 꿈꾼 재기 넘치는 인물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당한 뒤 그 시신이 실려 와 토막 났던 곳이 바로 양화진이었고 구한말 수운이 편리한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를 설치해 달라는 주한 외교 사절들의 요청에 응하여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다. 그러니 김세레나 노래처럼 그 백사장에는 한도 많았을 것이고 나루터를 떠난 사공의 한숨 소리도 여전히 배어 있었을 것이다.
합정동과 영등포 당산동을 잇는 제2 한강교의 목적은 다양했다. 서울에서 김포공항이나 인천 방향으로 가려고 할 때, 또 당인리 화력 발전소에 물품을 실어나르려고 할 때 등등 다리의 필요성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또 포화상태의 제1 한강교 교통량을 분산하고 영등포 등 도시 외곽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요긴한 다리였다.
그러나 이 다리 건설의 첫 번째 목표는 국방을 위한 것이었다. 평야 지대로 인민군의 기갑 부대의 주요 공격 축선이 될 수 있는 서부전선, 즉 ‘문산 일대로의 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하고자 함’이 다리 건설의 주된 이유였던 것이다. (한강 다리 1백 년 – 서울특별시) 그리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 다리는 오로지 군사용으로만 사용되게 못 박혀 있었다. 즉 ‘유사시 군용 다리’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전쟁의 공포와 상흔은 그렇게 칼자국처럼 도시의 심장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곧 도로를 까는 일이었다. 한강이야 임자가 없으니 맘대로 공사해서 도로를 놓으면 그만이지만 그 다리의 남안(南岸)과 북안의 땅은 거의 임자가 있었다. 아무리 관(官)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하지만 다리 양쪽에 널린 사유지들을 수용하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이었다. 정부에서는 매입 단가를 평당 4천 원 정도로 책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민들은 어림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 세 배인 1만 2천 원은 받아야 한다고 공론이 돌아갔고 역시 그 일대에 땅을 일부 소유하고 있던 한 회사의 총무부장은 주민들의 위세에 묻어가 한몫 수입을 올릴 생각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경영주에게 불려간다.
“우리가 그 땅을 평당 얼마 주고 샀나?”
“네? 평당 3원 주고 샀었지요. 생판 아무것도 없었을 땐데요.”
이 말을 하자마자 총무부장은 벼락같은 호통을 듣는다.
“임자는 평당 3원에 산 것을 4,000원에 가져가겠다는데 1,300배의 이익을 취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가. 나라에서 필요하다는데 당장 서울시에 내주지 못하겠는가.”
회사의 이름은 유한양행. 그리고 총무부장에게 호통을 친 회장의 존함은 유일한이었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또는 명성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라고 했던 그의 어록이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유한양행은 “땅값 인상 투쟁”에서 빠졌고 다른 지주들도 대충 그에 상응하는 액수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제2 한강교는 지어지기 시작했고 공사 3년만인 1965년 1월 25일 완공됐다.
이로써 서울 도심에서 김포공항에 이르는 거리는 4km, 시간은 20분 정도가 단축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홍제동~신촌 구간의 도로가 개설되어 이 다리와 직결됨으로써 영등포~서부전선의 거리가 약 6km 정도 줄어들었으며, 시간도 48분이 단축되어 연간 3000만 원 어치 가량의 휘발유가 절약되었다고 한다. <한국건설 기네스(Ι)길> (이덕수 지음-도서출판 보성각 중)
제2 한강교의 건설로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들이닥친 동네는 오늘날의 동교동, 서교동과 합정동 일대였다. 서교동과 동교동은 일제 때부터 이 일대는 비가 오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진창 밭으로 변해 버렸던 허허벌판이었다. 연세대학교 일대의 신촌 지역에서 오래 거주한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시내버스의 종점도 신촌 시장 일대에 있었고 그 뒤는 그저 채소밭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교동과 동교동 사이에는 제2 한강교로 향하는 대로가 뚫렸고 다리의 북안(北岸) 합정동에는 강변도로가 놓이게 된다. 합정동의 동명(洞名)은 과거 천주교 박해 시절 천주교인들의 목을 치던 망나니들이 그 칼을 씻거나 물고문에 이용했다는 우물 합정(蛤井), 이 으스스한 우물도 강변도로 개발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주변이 단장된 뒤 제2 한강교는 ‘카퍼레이드’의 다리로 주목받게 된다. 김포공항에서 시청으로 들어오는 최단 거리에 놓인 제2 한강교는 ‘국위선양’을 한 스포츠 스타나 기능 올림픽 선수단, 또는 환심을 사야 할 외국 국가 원수가 들어올 때마다 벌여 주었던 카 퍼레이드가 단골로 펼쳐진 다리였다. 1974년 국제 콩쿠르 대회에서 입상한 정명훈도 공항에서 제2 한강교를 넘어 시내로 들어가는 카퍼레이드를 펼쳤고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한 탁구의 샛별 이에리사를 위시한 선수단도 제2 한강교를 자랑스럽게 지났다. 최초로 북한을 이겼던 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 선수단을 위해서는 100여 대의 군용 지프가 김포공항에 총출동했고 이들은 경찰 사이드카의 엄호를 받으며 제2 한강교를 통해 한강을 도하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그 이름도 전설적인 무하마드 알리가 나비처럼 가뿐하게 수도 서울에 입성한 것도 제2 한강교를 지나서였고 오늘날 양화대교를 지나는 수많은 ‘봉고차’의 유래가 된 아프리카 가봉의 봉고 대통령 (봉고 대통령이 직접 밝힌바, 한국 정부가 새로이 개발된 신차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의 카 퍼레이드도 제2 한강교를 넘어서 의기양양하게 시내로 들어갔다. 남북한의 외교전이 치열하던 시절, 국제무대에서 한 표가 아쉬웠던 우리나라에 왔던 외국 손님들에게 카 퍼레이드는 기본이었고 제2 한강교는 단골이 되었다. 그 일대의 학생들은 툭하면 수업 작파하고 길거리에 늘어서서 태극기를 흔들어야 했던 것이다.
제2 한강교는 1980년대 이후 한강 개발 사업이 펼쳐지고 다리들이 많이 늘어서게 되면서 숫자로 구별이 힘들게 되면서 ‘양화대교’로 개칭된다.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일종의 관문 구실을 했으며 영등포 일대와 동교, 서교,망원, 성산동 인근 지역을 환골탈태시켰던, 최초의 우리 기술과 자본으로 만든 다리 양화대교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후 일제히 시행한 안전도 검사에서 “서울 시내 15개 교량 중 최악의 상태” (1994년 10월 28일 경향신문 보도)라는 불명예를 쓰고 대대적인 보수 작업의 대상이 된다. 결국 1965년 완성됐던 양화대교 구교는 완전히 헐고 재시공에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던 제2 한강교, 양화대교는 21세기 들어도 그리 편안하게 있을 운명이 아니었다. 경인운하가 완공되면 수천 톤짜리 유람선이 한강에 들어올 수 있다는 이유로 서울시장 오세훈이 수백억을 들여 양화대교의 교각을 일부 잘라내 버리고 다리를 디귿(ㄷ)자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다리는 다리대로 지나는 사람은 지나는 사람대로 엄청난 고생을 한 후 결국은 돈만 날린 채 원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건설한 지 몇 년 만에 다리에 구멍이 났던 제2 한강교의 추억을 되살리는 역사의 되돌이표였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시내를 다녀오려면 대개 양화대교를 지나야 하고 다리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북한산을 바라보며 내가 서울의 도심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다리를 지났던 수십만 수백만의 한국인, 외국인 모두 그랬을 것이다. 가끔 택시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널 기회가 있을 때 혹 택시 기사분의 연세가 지긋하신 분을 만난다면 양화대교의 추억을 떠 보시라. 아마 도착할 때까지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양화대교는 그만큼의 오랜 역사와 사연들이 배어 있다. 실로 많은 부끄러움과 슬픔, 또 한켠으로는 영광과 기쁨의 추억 위에 세워져 있는 다리였다.
원문: 산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