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를 살려 준 영국군?
1차대전 당시 유명한 영국군 헨리 텐디는 독일군 병사 한 명을 살려줬는데 그가 바로 히틀러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저도 아직 공부가 한참 모자라는군요. 아마 한글위키가 출처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글 위키의 참조자료가 되어야 할 영문 위키에서는 그런 주장이 의심스럽다는군요.
한글 위키는 2014년 4월에 발간된 이 책의 내용을 참조한 모양입니다. 제목 그대로 헨리 텐디는 히틀러를 죽이지 않았고 그래서 히틀러가 세계 최악의 살인마가 될 수 있었다는 내용이겠죠.
재미있는 것은, 헨리 텐디의 전기작가는 이런 주장에 대해 주요 증거를 들며 날조라고 반박했다는 것입니다. BBC에서도 책이 발간된 후에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 지에 대해 취재를 했더군요.
아래는 우연히 히틀러의 손에 들어간 그림인데, 히틀러가 자신을 구해준 영국군 병사가 헨리 텐디라며 지목한 그림입니다.
papers at the Bavarian State Archive show Hitler had been on leave between 25 September and 27 September.
“It’s likely he chose that date because he knew Tandey had become one of the most decorated soldiers in the war,” said Dr Johnson.
“If he was going to have his life spared by a British soldier, who better than a famous war hero who had won a Victoria Cross, Military Medal and a Distinguished Conduct Medal in a matter of weeks?
“With his god-like self-perception, the story added to his own myth – that he had been spared for something greater, that he was somehow “chosen”. His story embellished his reputation nicely.”
바이에른주 문서기록보관에 따르면 히틀러는 25~27일 휴가였었기 때문에 부대 복귀 중인 28일에는 헨리 텐디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히틀러가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기 작가의 추측으로는 1차대전의 영웅을 인용하는 것이 자신의 신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등병 계급으로 빅토리아훈장 등 3개를 받은 유명인이었습니다.
British Telecom archives add more doubt – Pte Tandey did not have a telephone.
루머에 따르면 챔벌레인 수상이 전화를 했을 때에 어린 조카가 전화를 받았다고 했는데, 영국통신 문서기록으로는 헨리 텐디는 전화기가 없었다는군요.
He was quoted in an August 1939 edition of the Coventry Herald as saying: “According to them, I’ve met Adolf Hitler.
“Maybe they’re right but I can’t remember him.”
But a year later, he appeared to be more certain, when a journalist approached him outside his bombed Coventry home, asking him about his alleged encounter with Hitler.
“If only I had known what he would turn out to be,” Pte Tandey is quoted as saying.
“When I saw all the people and women and children he had killed and wounded I was sorry to God I let him go.”
The newspapers seemed to say it all:
“Nothing Henry did that night could ease his sickening sense of guilt.”
“It was a stigma that Tandey lived with until his death”
“He could have stopped this. He could have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
However, there is no evidence, not even anecdotal, he was either hounded or avoided after the claims.
마지막으로 헨리 텐디가 자신이 용서한 독일병사가 히틀러라는 것을 알고는 평생 가책을 느끼며 살았다고 했는데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합니다.
1939년 8월에 코벤트리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내가 히틀러는 만났다고 말하네요. 그들이 맞겠지만 어쨌든 기억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고, 일년 후에 독일의 공습 후에 다시 기자가 접근해서 히틀러와의 인연을 묻자
“그가 죽인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를 놓아준 것을 후회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기레기는 헨리가 고통스런 죄책감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죽을 때까지 풀지못할 낙인이었다 등등 써 댔지만 실제로는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비난을 피하려고 한 적이 없답니다. 더 구체적인 증거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헨리 텐디와 히틀러의 인연은 ‘카더라’에 가깝겠군요.
히틀러 자살 조작설
두 번째 이야기는 검증을 할 필요없는 수준이라 그냥 재미로 보시면 됩니다. 국내 모 인터넷 매체가 ‘히틀러 자살은 조작… 아르헨티나서 천수를 누렸다’는 기사를 뿌리면서 각종 음모론과 서프라이즈 광팬이 흥분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래와 같은 내용인데 클릭 수에 집착하는 매체다 보니…
그러나 이와는 달리 히틀러가 스스로의 죽음을 조작한 뒤 북아프리카 스페인령인 카나리아제도의 테네리페섬으로 도망을 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 대중지인 익스프레스등은 최근 기밀 해제된쪽짜리 미 연방수사국(FBI) 자료를 미국의 전문가가 검토한 결과 히틀러의 죽음은 자작극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센시치는 또 영국군과 미군이 히틀러의 벙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의 시신이 사라진 뒤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더 선>이 보도한 원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재미삼아 <더 선>과 <선데이 익스프레스>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매체의 현재 메인기사입니다.
영어 독해가 쉽지 않은 분도 연예가 가십이 주종인 매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히틀러가 아돌프 라이프치히라는 이름으로 95세까지 살았다는 기사도 실었습니다.
12,000명이나 사는 도시에서 사진도 찍으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주장입니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검증하는 시간도 아까운 내용이지만 재미삼아 보도 내용의 일부를 검증해보겠습니다.
센시치는 또 영국군과 미군이 히틀러의 벙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의 시신이 사라진 뒤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영국군과 미군이 히틀러 벙커에 도착했을 때에는 시신이 있을 수가 없죠. 히틀러 자살 당시의 상황은 이랬습니다.
Their bodies were carried up the stairs and through the bunker’s emergency exit to the bombed-out garden behind the Reich Chancellery, where they were placed in a bomb crater and doused with petrol. The corpses were set on fire as the Red Army shelling continued.
히틀러의 시신은 벙커 밖의 구덩이로 옮겨져 불탔습니다.
소련군이 연합군과 종군기자에게 시신이 불탄 구덩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소련군이 보여주고 연합군은 구경꾼이었을까요?
소련군이 베를린에 더 가까이 접근했고 아이젠하워는 불필요한 희생을 막고 소련군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미군을 남부로 돌렸습니다. 베를린 수비군의 희망과 달리 미군이 남부로 돌면서 베를린의 참극이 벌어졌죠. 어쨌든 히틀러는 4월 30일에 자살하고 베를린은 5월 2일에 함락되었지만, 독일은 5월 8일에 항복했고 그 때까지도 전투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미 연합군 대표단은 아무리 서둘러도 최소한 9일 후에야 베를린에 들어갔을 테니 벙커에 히틀러의 시신이 있을 수가 없죠.
저도 흥미로운 도시괴담이나 음모론에 끌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렇다고 강변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겠죠?
원문: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