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멕시코시티의 인류학박물관 앞. 기념품이며 간식거리를 파는 수많은 행상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리어카 한 대.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한쪽 커다란 냄비 안에는 삶은 옥수수가 가득했고, 다른 한켠에는 석쇠 위에서 옥수수가 벌겋게 달궈진 숯불에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여름철에 가장 즐겨 먹는 간식이 옥수수였기에 주저할 것도 없이 삶은 옥수수를 달라 했다. 주인장은 끓는 물에서 옥수수를 하나 건지더니 중간 심지에 나무 꼬챙이를 하나 푹 찔러 박았다. 그러더니 마요네즈 통에 옥수수를 푹 찔러 박아 꺼낸 뒤 치즈 가루 통에 넣어 돌돌돌 굴리며 치즈를 묻혔다. 거기서 끝인 줄 알았더니 그 위에 고춧가루를 착착착 뿌렸다. 고춧가루!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첫날. 아내와 함께 따꼬를 먹으러 갔다. 따꼬는 얇게 펴서 구운 옥수수 전병 위에 고기나 각종 채소를 얹어 먹는 멕시코 음식이다. 따꼬를 이것저것 시켰는데 메뉴판을 보니 고추 요리가 하나 있어 시켜봤다. 그런데 주인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거 정말 매운데 먹을 수 있겠어?”라고 걱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스윽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문제없다”고 했다. 내 미소 속에는 이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거 왜 이래. 나 한국에서 온 사람이야. 고추 잘 먹는다고. 한국인의 매운맛 모르시나. 흐흐흐.”
따꼬와 함께 고추가 나왔다. 작은 그릇 안에 시큼한 소스와 함께 구운 고추 예닐곱 개가 들어 있었다. 따꼬를 먹기 전에 한 입 베어 문 순간. 쿨럭 쿨럭 기침도 하기 전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매운 걸 먹으면 땀이 나기 마련인데, 땀은 나지 않고 얼굴 곳곳이 아프기까지 했다. 그래도 오기가 있어 몇 입 더 먹어보려 했는데 도저히 매운맛을 견딜 수 없어 거의 그대로 남겨야 했다. 음식값을 계산하고 나오는데 ‘것 봐. 내가 맵다고 했지?’라고 주인장이 놀리는 것 같았다.
옥수수와 고추. 멕시코에도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냐고? 아니다. 아는 분들은 다 알고 계셨겠지만 원래 옥수수와 고추의 원산지가 멕시코가 있는 중앙아메리카 지방이다. 멕시코시티의 인류학 박물관에 가면 고대 멕시코 유물들이 즐비한데, 옥수수를 손에 들고 있는 석상이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옥수수와 고추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반도에 고추가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통해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고추를 처음에는 남만초(南蠻草) 혹은 왜겨자라고 불렀다. 우리는 벌건 고춧가루와 고추장에 익숙하고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맛’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반만년 한민족의 역사에서 고추는 500년 정도밖에 안 된 것이다.
요즘 TV는 요리사들이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어디나 ‘요리 중’이다. 거기에 황교익 선생 같은 음식 칼럼니스트들도 맹활약 중이고 맛집을 찾다 다니는 프로그램도 여전히 흥행 중이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블로그를 가장 먼저 점령한 것도 맛집 콘텐츠였다. ‘먹방’은 유행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영원한 테마인 것 같다. 그런데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우리는 살다보면 가끔 내가 살기 위해 먹는 것인가, 먹기 위해 사는 것인가 헷갈리지 않는가. 음식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뿐이지 우리는 모두 기본적으로 음식칼럼니스트가 될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사실 우리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한 일은 음식을 먹는 일이다.
이는 우리 선조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요리하는 조선 남자>(이한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라는 책을 보면 조선 시대의 선비들 중에 음식칼럼니스트가 제법 됐던 모양이다. 고려 후기 정몽주, 길주와 함께 3대 학자였던 목은 이색은 음식을 먹고 감흥이 들면 시를 써서 남겼다. 관악산 신방사 주지가 두부와 만두를 가져다주었다고 감동하고, 여름에 참외만한 것이 없다고 찬미하며, 찹쌀떡을 먹으며 이에 붙을까 걱정한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아예 조선 팔도 식도락 리스트인 <도문대작>을 남겼고,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한 번에 냉면 세 그릇, 만두 백 개를 먹는다”는 대식가로 기록에 남아 있다. 요즘 인기 있는 중식 요리사 이연복 셰프가 그렇게 잘한다는 ‘동파육’은 중국 송나라 시대 유명한 시인인 소동파가 만든 삼겹살 찜 요리이다.
수원 화성을 만들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저작을 남긴 실학자 정약용은 유배 시절 참외를 기르다 실패한 뒤 “마음 다해 가꾸어도 보람이 전혀 없어 그것만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진다오”라며 좌절하기도 한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유배간 뒤 아내에게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를 적어 편지를 보냈지만 아내가 부쳐준 음식이 머나먼 제주까지 오느라 다 상한 것을 보고는 슬퍼하며 짜증을 냈다.
앞에서 멕시코에서 옥수수에 고춧가루를 뿌려 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고추는 임진왜란 때에야 한반도에 전래됐지만, 원산지인 중앙아메리카와 먹는 방법이 다른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고추장이다.콩으로 메주를 띄워 발효시켜 간장을 먹는 우리 문화권에 고추가 들어오자 고추는 ‘고추장’으로 발전했다.
‘조선 최대의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직접 고추장을 담갔다고 한다. 55세의 나이로 경상도 함양 현감으로 내려가 서울의 자식에게 고추장을 담가 보냈는데, 아들이 답장에 고추장 얘기가 없자,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전에 보낸 쇠고기 장볶이는 받아서 아침저녁으로 먹고 있니?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니? 무람없다, 무람없어.(‘예의없다’와 비슷한 뜻) 난 그게 포첩(육포)이나 장조림보다 더 좋은 거 같더라. 고추장은 내가 직접 담근 거다.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 주면 앞으로도 계속 보낼지 말지 결정하겠다.”
음식 이야기는 하고자 한다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쓰거라”라는 한석봉 일화처럼 역사 속에서 음식에 관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음식 이야기를 써 내려 가고 있는 중이다.
음식에 관한 역사서는 종종 임금님 수라상이나 종가댁 12첩 반상과 같은 고급 음식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임금이나 종가 기록이 풍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리하는 조선 남자>에는 냉면, 떡국, 만두, 참외, 인절미 등 우리가 지금도 쉽게,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풍부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음식 문화의 변화도 재밌다.
지금처럼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생선을 살아서 육지 깊은 곳에 가져올 수 없으니, 조선 선비들은 회 한 점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집착했고, 한여름 얼음 동동 띄울 수 없으니 차갑게 먹어야 하는 냉면은 겨울 별식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등등. 우리가 지금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음식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다 보면 침을 꼴딱꼴딱 삼키게 된다.
원문: 북클라우드 / 글: 김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