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다지 사회적이지 못한 성격으로 회사라는 곳에서 사회생활을 한지 어느덧 10년이 넘어가네요. 게다가 이번 달은 제가 두 번째 직장에서 5년째 근무한 달입니다. 무탈하게 직장생활을 지금까지 해온 저 자신에게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하루입니다. 그런데 사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직장생활 어찌 무탈하기만 했을까요. 직장인들 대부분 겉으로는 하하 웃으며 티를 내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얄밉고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 아마 A4용지 종이 한바닥 적어 내실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한 네 명쯤 적을 수 있어요^^;)
직장생활에서 만나는 얄미운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말로 때우는 사람입니다. 회의시간에 온갖 아이디어를 쏟아 내면서 멋지게 미팅을 주도하는 사람. 반짝반짝한 아이디어로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는 그 사람. 근데 회의가 끝나고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뒤치닥 거리를 남기고 떠나버리는 그분, 정말 얄밉습니다.
그럴싸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지만, 막상 실무자 입장에서 밤새 검토해보면 현실성도 없고 듣는 사람을 현혹시키기만 한 아이디어일 뿐이죠. 도대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고 말한건지 말로 다 때우고 “아 안돼? 아님 말고ㅎ” 식으로 자리를 떠나버리는 그분… 제가 넘 흥분했나요? ^^
창의력. 겉보기에는 반짝반짝하고 멋들어져 보이는 단어입니다. 고리타분하게 책상에 앉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노력만으로는 발휘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힘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말 의미있는 아이디어는 그 이면의 철저한 분석과 사고가 뒷받침 될때 그 능력을 발휘합니다. 창의력만 가득한 아이디어는 그 첫인상이 번듯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실행 과정에서 중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의력의 실패. 오늘은 겉보기에 그럴듯 했지만 깊은 고찰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던 한 사례를 알려드릴까 합니다.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Merry-go-round를 타고 있는 아이들 모습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뺑뺑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여러분들은 이 사진을 보고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나요? 남아프리카 공화국 에서 우물을 파는 사업을 하던 로니(Ronnie Stuiver)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리게 되었답니다. 바로 이렇게 정신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깊은 땅속의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아이디어입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는 물 부족으로 인해 깊은 땅속의 지하수를 끌어다 써야 했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마을 주민들이 하루종일 힘든 펌프질을 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이터 뺑뺑이를 돌리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데 사용한다면 이런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을까? 로니는 이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곧장 1989년에 있었던 농업 박람회에 가져갔습니다.
광고회사의 임원인 트레버(Trevor Field)는 농업박람회에서 이 펌프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힘을 물을 끌어올리는데 쓰다니… 이거 대박인데!”
트레버는 즉각 로니의 아이디어에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같이 사업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트레버는 아이들이 끌어올린 물을 저장하는 물탱크에 광고판을 달아서 광고 수입을 얻는 아이디어를 추가했습니다. 네 면으로 둘러싸인 물탱크의 두 면은 기업에게 광고판으로 팔고 나머지 두 면은 에이즈 예방과 같은 공익 광고를 달아 정부나 공공기관에 판다는 아이디어였죠.
로니와 트레버. 두 사람은 Roundabout Outdoors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이 아이디어를 사업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플레이펌프(Playpump)라는 이름으로 상호명도 등록하고 특허도 신청했죠. 하지만 막상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생각보다 냉담했습니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인데 왜 사람들은 무관심하지?” 로니와 트레버는 무심한 사람들을 비난하며 언젠가 자신들의 멋진 아이디어가 빛을 볼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만델라 대통령이 새로 생긴 학교를 방문해서 학교 시설을 둘러보는 모습이 TV와 뉴스에 실렸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은 학교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로너와 트레버가 파일럿으로 설치한 Playpump를 직접 손으로 돌려보았습니다. 이 장면이 아프리카 전역에 보도가 되면서 갑자기 Playpump에 대해 문의하는 전화가 로너와 트레버의 사무실에 빗발치기 시작했답니다.
한 번 미디어에 노출되기 시작한 Playpump는 수많은 투자자들과 비영리기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환하게 웃는 얼굴과 물탱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영상은 Playpump를 홍보하기에 적격이었죠. 목마름에 고통받는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웃음과 물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다니, 수많은 자선단체들이 이 아이디어를 극찬하며 Playpump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2000년, 세계은행(World Bank)는 Playpump를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중에 하나로 선정하며 World Bank Development Marketplace Award를 수여하기에 이릅니다. 뒤이어 미국의 대표적 비영리기관인 Case Foundation이 Playpump에 관심을 보이며 투자를 결정합니다. 결국 Case Foundation은 자선기금을 통해 아프리카에 Playpump를 설치하는 비영리기관인 PlayPumps International을 설립하며 전세계에 투자자를 모집하기에 이릅니다.
Playpump에 대한 인기는 2006년 미국 부시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와 전 대통령인 빌 클린턴의 지지를 받으며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빌클린턴 재단은 더 많은 Playpump가 설치되기를 바란다며 164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합니다. 당시 기부금액으로서는 기록적인 금액이죠.
2008년 무렵, Playpump는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 1,000여 기가 설치되었습니다. 모잠비크, 스와질랜드 등 물부족으로 고통받는 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죠. Playpumps International은 2010년까지 4,000여 기를 추가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전 세계 자선단체로부터 기부금을 모집하였습니다. Playpump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 라는 모토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Playpump의 아이디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가 들어도 정말 멋진 아이디어죠.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유명인과 미디어의 노출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공익적인 대의명분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의 착한 마음을 울리면서 Playpump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10년차 회사 실무자 입장에서 몇가지 꺼림직한 게 있습니다 (아… 이 어쩔수 없는 실무자 병). 몇 명의 아이들이 얼마동안 돌려야 충분한 물을 끌어올릴수 있는 걸까요? 마을 주민들이 하루종일 길었던 물을 아이들이 몇 시간 노는 것만으로 충당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과연 뺑뺑이를 매일매일 타고 놀 만큼 좋아할까요? Playpump를 설치하는게 기존 수동 펌프를 설치하는 것보다 저렴한가요?
2009년 영국의 주간지 가디언(Guardian)은 Playpump에 대해 회의적인 기사를 실었습니다. Playpump를 설치한 마을에 찾아가 봤더니 놀고 있는 아이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어야 하는 뺑뺑이 주위에 아이들은 없고, 마치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녹이 슬어있는 것을 가디언의 기자가 발견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 자초지종을 묻던 기자는 어이없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사람들이 저 펌프물을 마실려면 아이들이 하루종일 학교도 못가고 뺑뺑이만 돌려야 해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이죠? 아이들이 즐겁게 놀기만 해도 지하수가 펑펑 올라와야 하는 Playpump가 아이들의 강제 노역장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프리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정확한 계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요. 마을 주민들의 하루 권장 물 소비인 인당 15리터의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Playpump가 몇 바퀴를 회전해야 하는지, Playpump를 돌릴 아이들이 마을에 몇 명이나 있는지, 그리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Playpump를 돌리면 권장 물 용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에 대한 세밀한 계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가디언지의 조사에 따르면 마을주민 2,500명에게 15리터의 물공급을 위해서는 Playpump가 하루 27시간 동안 쉬지않고 회전해야지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즉, 아무리 열심히 돌려도 이것만으로 식수 공급 충당을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더 황당한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아이들이 Playpump를 재미있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Playpump를 돌리는게 재밌지 않아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원래 뺑뺑이를 가지고 노는 방법은 일단 뺑뺑이를 잡고서 미친듯이 달리죠. 그리고는 뺑뺑이에 훌쩍 올라타고서 돌아가는 스피드를 즐깁니다. 그런데 이 뺑뺑이에 펌프가 연결되면서 이전만한 스피드를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이지요.
뺑뺑이를 잡고서 열심히 달렸을 때 생긴 에너지가 뺑뺑이에 올라탔을 때 스피드로 모두 전환이 되어야 하는데, 그 에너지의 상당부분이 물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되다보니 스피드가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Playpump에 매달려 뺑뺑이를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이들이 아니라 물이 필요한 어른들인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이들은 놀이터를 잃고 놀 곳을 찾아 헤매이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더불어 Playpump의 가격이 기존 수동펌프의 가격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약 3배 정도 더 비싼것 뿐 아니라 유지 수리 비용도 만만치 않았죠. UNICEF가 2007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잠비아에 설치된 Playpump 중에서 약 25%가 수리를 필요로 했지만, 정작 이를 수리할 수 있는 비용이 없었습니다. 수리를 위해 전화를 하더라도 이를 수리할 수 있는 인력이 워낙 적다보니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했죠.
물탱크의 4면을 광고판으로 활용해서 유지보수 비용을 마련한다는 계획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2010년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약 80%의 Playpump가 아무런 광고도 실리지 못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식수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극빈한 마을 사람들에게 상업광고를 할 기업이 어디 있을까요?
결국 남아프리카에 2,000 여개까지 설치된 Playpump는 대부분 작동이 중지되거나 철거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그럴듯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놀이공간을 만들어주면서 물부족까지 해결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였죠.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구현해낼지 깊이 있게 생각해 적이 없었던 것이 지금의 실패를 낳았습니다.
처음 Playpump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로니, 박람회에서 이 아이디어에 투자를 결정한 트레버, 훌륭한 아이디어라며 상을 주었던 세계은행, 엄청난 돈을 기부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빌 클린턴과 로라 부시, 이 모든 사람들 중에 누구 한명도 깊이 있게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죠.
직장생활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이런 Playpump와 같은 일을 여러차례 겪었던 것 같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설익은 아이디어라도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다함께 얘기해보는 가운데 설익은 아이디어가 익어가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하죠.
하지만 Playpump와 같은 아이디어가 수 년동안 그 많은 사람들을 거쳐가는 동안 다듬어지지도, 걸러지지도 않았던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으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깊이 있게 생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조직이 이런 노력을 경시하고 겉보기에 번드르한 아이디어만을 쫒는 문화를 가지고 있을때 발생합니다. 이런 조직에서는 정말 부지런하고 깊이 있게 사고하는 사람이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으로 저평가되죠. 그리고 말만 번드르한 사람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인재로 잘못 인정받게 됩니다.
깊이있는 생각에서 나오는 창의력.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해결하기 위한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봐야 하고, 아이디어가 어떻게 실행될지에 대해서도 여러 시나리오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신의 얕은 경험에서만 나오는 제한된 아이디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여행도 다니며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를 즐기다가 갑자기 퍼뜩 지나간 아이디어는 인사이트는 줄 수 있어도 완벽한 아이디어는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둑어둑한 도서관의 책무더기 속에서, 미친듯이 현장을 뛰며 들은 땀내나는 이야기 속에서, 몇일 밤을 새며 뒤진 자료들 한가운데서 진정한 창의력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창의력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가요? 노력하지 않은 창의력의 함정, Playpump 사례를 생각하며, 깊이 있는 창의력이 인정받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원문: 세상을 풀어보는 두루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