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편집의 산물이라 전해라
도시의 간판들은 사람을 쫓아내는 이기주의의 난립인가. 고객을 불러들이는 상생의 미소인가.
출퇴근길 지하철역 주변 상가 건물을 쳐다보면 머리가 아파진다. 온통 간판들로 도배되어 있다. 벽면을 다 채운 원색 바탕 고딕 글씨 간판은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우악스럽다. 한국 자영업의 영세성이 상업적 간판의 난립을 부채질한다. 대한민국 도시 표정은 판에 박힌 건물간판 이미지가 결정짓는다.
문화적 콘텐츠가 제거된 한국 간판들은 우리들의 도시를 몰개성 살풍경으로 몰고 간다. 지겹도록 봐온 획일적 간판들은 ‘너보다 나부터 살고 보자’는 네거티브 경쟁의 산물이다. 옹기종기 옆 가게끼리 어깨동무하며 공생해보자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스며들지 못했다.
행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선 무조건 간판 크기를 키운다. 형형색색 제각각 글씨는 주변과의 조화에는 안중에도 없다. 나 홀로 튀면 그만이다. 모두가 튀려니 아무도 튀지 못한다.
간판은 시민이 주목하는 공공적 미디어다. 단순한 광고수단이 아니다. 소비자가 쳐다보는 상업적 소통의 핵심 수단이다. 대중이 오가는 거리는 도시의 혈관이다. 그 거리를 채우는 간판은 도시의 상징이며 얼굴이다.
얼굴이 한 사람의 품격을 대변하듯 간판은 도시의 품격을 결정한다. 간판들의 미적 배려와 조화가 도시공동체의 수준을 드러낸다. 난립하는 간판 문화가 한국 도시의 공공디자인 현주소다.
좋은 간판, 3가지 편집력을 갖춰라
간판의 모든 것을 주인의 시선이 아닌 고객의 시선으로 생각하라. 고객의 관점에서 철두철미하게 제작되고 내걸려야 한다. 좋은 간판은 3가지 편집력을 발휘해야 한다.
첫째 ‘단순화’가 생명이다. 추상적이고 복잡하면 간판 자격이 없다. 제공할 구체적 서비스 딱 하나를 명확히 하라. 간판의 모든 것을 주인의 시선이 아닌 고객의 시선으로 생각하라. 고객의 관점에서 철두철미하게 제작되고 내걸려야 한다.
둘째 ‘주제 강화’가 핵심이다. 당신 가게만이 해낼 수 있는 경쟁력 딱 한 가지만 강조하라. 나머진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라. 식당인데 간판에 굳이 식당이란 말을 크게 강조할 필요가 없다.
손님이 “이 간판을 꼭 기억해야겠다”고 욕심을 낼만한 메시지 하나만 상징화시켜라. 손님이 궁금증을 갖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도록 간판에 많은 것을 밝히지 마라.
셋째 ‘내용과 형식의 조화’가 관건이다. 내용이 명확해지면 거기에 맞는 그릇을 갖춰야한다. 세련된 그릇은 음식을 빛나게 한다. 스마트한 디자인은 주변과 궁합이 맞는다. 활자체 색상 고유로고 여백 문제는 전문가와 상의하라.
보신탕 전문 식당의 간판이 ‘보신각’이었다. 일체의 식당 정보 요소는 생략해버린 아담한 간판이었다. 한국에만 있는 특정 기호식 식당이지만 품격을 겸비한 이름이다. 생선 횟집 이름이 ‘바다의 교향시’‘수중 공원’인 경우도 있다. 넓은 수족관을 배경으로 독특한 간판 디자인이 바닷속 패밀리레스토랑 같았다.
남성 전문 헤어컷 미용실 이름이 ‘버르장머리’ ‘까까머리’였는데 경쾌하고 발랄하다. 족발집 간판에 단 네 글자만 표시되어있다. ‘대한민足’. 고객에게 웃음을 주고 확실히 기억에 남게 한다.
해외 도시문화와 한국의 차이점
모차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시는 인구 15만 명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연간 9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린다. 고풍스러운 1300년 역사의 중세 도시문화가 잘 보전되어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잘츠부르크시는 전통 도심 풍경을 보존하기 위해 엄격한 건축 및 광고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구도심의 간판은 모두 1층에만 설치할 수 있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양 간판만 2층까지 허용된다. 간판의 재질이나 스타일 역시 전문 수공업자나 장인이 만들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유럽 여행 도중 길가에 즐비한 예술작품 수준의 간판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유다.
한국도 간판의 무질서를 정비할 도시문화 매뉴얼을 갖출 시점이다. 서울 지자체 몇몇 곳에서 간판 정비의 조례를 서두르고 있다. 난립을 질서로 분산을 집중으로 대체하고 있어 청신호가 켜졌다.
내 집 간판을 절제하고 옆집 간판과 조화롭게 할 때 함께 잘 된다. 이웃과 함께 손님들로 북적여 전체 상가가 번성한다. 매뉴얼이 관통되는 간판 디자인으로 차려입은 거리가 도시의 명물이 되고 관광 상품이 된다. 도시는 편집의 산물이다.
출처: 편집자의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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