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직장을 흔히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장이라고들 한다. 직장에서는 개인의 능력과 결과가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동시에 맺는다. 그 결과 능력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생존한다. 반대로 능력 없는 사람은 약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도태된다. 입사할 때부터 무수한 경쟁자를 내치고 올라왔으니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명제가 참으로 여겨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간혹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말이 그 말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면 강함을 증명했다는 얘기다. 애초부터 상대적인 강함을 갖고 있었다는 전제를 부정하긴 어렵다. 거기에 더해 강한 사람은 살아남고 약한 사람은 도태된다는 엄혹한 전제도 바뀌지 않는다. 결과를 놓고 해석하느냐, 원인을 놓고 해석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과연 능력이 증명된 (증명할 수 있는) 강한 자들만 살아남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저런 업무처리 능력으로 어떻게 저 자리를 꿰찼을까?”라는 의구심을 한몸에 받는 사람이 버젓이 책상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때 말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가 도태된다는 직장에서 약한(무능력한) 사람이 남아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직장을 적자생존의 장으로 보는 시각이 틀렸기 때문일까?
번역 오류
적자생존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이다. 찰스 다윈의 것으로 알고들 있지만 실제로 이 말은 영국의 철학자 겸 경제학자인 허버트 스펜서가 만들었다. 찰스 다윈은 나중에 이 말을 빌려다 썼을 뿐이다. 이 말은 의미는 이렇다.
“가장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다.”
즉, 환경에 적합하게 적응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생존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잘못된 번역으로 인한 오해다. 적자생존은 강함이나 약함과 전혀 관계가 없다.
직장이라는 곳이 생존과 도태의 원리가 적용된다면 적자생존의 원래 뜻을 직장에 대입해볼 수 있다. 그러면 ‘직장이라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살아남’는다. 이 말은 곧 직장에서의 생존이 강함(유능력)과 약함(무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직장에 얼마나 적합한가에 달렸다는 얘기다. 의문은 풀렸다. 누가 봐도 무능한 옆 부서 부장님은 회사라는 환경에 적합한 사람이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환경의 허락
앞에서 얘기했듯이 직장은 효율과 합리를 최우선으로 한다. 그런 곳에 왜 무능력한 사람이 적합하다는 이유로 도태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을까? 이유는 조직이 무능력한 사람도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환경에 따라서 무능력한 사람이 많이 생존할 수도, 적게 생존할 수도 있다. 무능력한 사람이 많이 생존하는 조직일수록 능력에 대해서는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런 조직에서는 조직을 굴러가게 하는 시스템보다 정치, 아부, 속임수, 기만 따위가 우선한다. 정상적인 직장에서 효율과 합리의 결괏값을 만들어내는 것은 구성원들의 능력이다. 이를 대신해 비생산적 요소들이 생존에 더 많이 이바지하는 환경이라면 능력이 있어도 굳이 그 능력을 펼칠 필요가 없다. 그런 환경에서 생존한 구성원의 능력을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어떤 조직도 완벽할 수는 없다. 직장도 몇몇 무능력한 무임승차자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다면 능력과 관련 없는 요소가 생존을 좌우하는지, 조직을 제어하는 시스템은 정상인지 확인해야 한다. 직장이라는 조직도 적자생존의 원리의 대상이다. 혹독한 경쟁 속에서 생존하려면 조직에는 어떤 적합성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되새겨볼 일이다.
출처: 마흔하나, 생각을 시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