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이슬람 전문가인 이희수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주로 나오는 대답은 이렇다고 한다.
‘테러와 폭력 종교’,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 ‘금기와 규제가 많은 사회’, ‘자기 고집-반미-다른 종교 박해’, ‘아라비안나이트’,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 ‘석유-두바이-엄청난 자본 시장’…
이 중에 세 가지 키워드를 골라 따져보도록 하자.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탓이 크다. 최근 ‘해외토픽’ 수준으로 나온 국제 뉴스 중 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그럴까?
공식 통계에 따르면 이슬람 종교를 가진 무슬림은 전세계적으로 16억 명이다.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나라가 57개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있다. 1934년 터키를 시작으로 1946년 팔레스타인, 1956년 이집트, 1958년 이라크, 1959년 튀니지, 1963년 이란 등이 여성 참정권을 제도화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 것은 해방 후인 1948년이었으며, 미국에서는 여성(1920년)보다 흑인(1870년) 참정권이 먼저였다.
어디 참정권 뿐이랴.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는 1988년 베나지르 부토가 선거에 당선돼 여성 총리가 됐고, 1991년 방글라데시에서는 칼레다 지아가 여성 총리에 올랐다. 1993년 터키에서는 탄수 칠레르가 1993년 여성 총리가 됐다.
여성에 대한 억압의 이미지로 또 떠올리는 것은 얼굴과 온몸을 칭칭 둘러싼 부르카를 쓴 여성들에 대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종교적 억압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 같은 이슬람권에서도 가리는 범위와 제도적 의무 여부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히잡 등의 착용이 법제화된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정도이다. 기본적으로 머리카락과 목을 가리는데, 이 또한 꾸란에 명시된 것은 아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생기기 이전에 고대 시대부터 그 지역 사람들은 모두 히잡을 쓰고 다녔다. 물론 남자도.
오히려 꾸란에 표현된 여성관은 성서보다 평등한 편이라고 한다. 성서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이 잠든 사이 갈비뼈 하나로 하와를 만든다. 반면, 꾸란에서는 ‘또 다른 깨끗한 흙’으로 빚어 다시 영혼과 응혈을 넣어 하와를 만들었다.
다른 종교 박해?
최근 케냐에서 버스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소말리아에서 국경을 넘어온 무장 테러단체가 버스를 세운 뒤 기독교도들 색출에 나섰다. 그러나 버스 안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무슬림 용품을 나눠줘서 신분을 감추게 했을 뿐 아니라, 무장대원들에게 “죽이려면 모두 죽이라”고 항거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다른 종교에 관대하다. 십자군 전쟁 때 기독교도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인종청소에 가까운 이교도 살육을 저질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을 수복한 무슬림 장군 살라딘은 기독교도들에게 복수를 위한 살육 대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다. 세금을 내면 남아서 예전처럼 사는 것도 가능했다.
이를 두고 유럽에서는 살라딘을 관용이 넘치는 훌륭한 장수라고 칭송을 하지만 정작 이슬람에서는 그저 전쟁을 잘 한 장수 정도라고 취급한다고 한다. 다른 종교를 박해하지 않는 것이 이슬람의 교리이기 때문에 기독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푼 것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 크게 칭송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십자군 전쟁도 유럽에서는 역사의 중요한 장을 이루고 있지만, 이슬람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소동 정도로 취급한다고 한다.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 시절부터 무슬림들은 유대인 공동체와 공존해왔다. 1차 대전 후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만들어 정착했지만, 그 지역에는 무슬림들과 함께 2000년 동안 평화롭게 살아 온 유대인들이 5만6000명이 있었다.
사실 이슬람교와 유대교, 기독교는 뿌리가 같다. ‘알라’는 ‘유일신’, 즉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기점으로 아담과 아브라함, 모세 등 같은 조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태도에서 갈린다. 자기들만이 하나님에게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이야기하는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의 ‘대속’(대신 죗값을 치름)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는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과 예수가 동격이라는 ‘삼위일체’ 이론을 중심 교리로 삼는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선지자 중 하나로 생각한다. 어쨌든 세 종교가 뿌리는 같은 것이다.
이희수 교수는 그래서 “아랍 이슬람 국가에 방문할 때 비자 서류에 무교라고 적는 것보다, ‘크리스찬’이라고 적는 게 더 낫다”고 충고한다. 종교가 없다는 것은 “인간의 틀을 깨고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야만이나 비윤리성의 위험 요소로 본다”는 것이다. 다만 선교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테러 집단?
최근 정세를 고려하면 이슬람 하면 테러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IS(Islam State)의 위세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IS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갈등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을 알아야 한다. 조금 단순화시켜서 얘기하면 이 갈등의 근원은 ‘석유’와 ‘이스라엘’이다.
석유가 먼저 산업화한 곳은 미국과 유럽이었지만, 1900년대 초 유럽 열강들은 아랍의 석유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채굴이 쉬워 생산 단가가 낮았기 때문이다. 유전을 장악하기도 쉬웠다. 당시 중동은 오스만투르크라는 거대 제국이 몰락하면서 지방의 호족과 왕족이 힘을 키우던 시기였다. 지배층만 포섭하면 됐다.
그런데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면서 서구 세력에게서 유전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원해 전쟁을 일으킨다. 비슷한 시기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일이 터진다. ‘남하 정책’이 조상 대대로 전수돼 박혀 있는 소련(러시아)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이다. 지금도 러시아는 시리아에 확보한 항구를 지키기 위해 IS를 폭격하고 있다.
당시 소련으로부터 ‘형제’들을 지키기 위한 ‘무자헤딘’이 조직되고 미국은 무자헤딘을 지원한다. 이때 무자헤딘을 이끈 이가 오사마 빈 라덴이고 알카에다라는 조직이다. 그런데 사담 후세인이 미국을 배신한다.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해 유전 장악을 시도한다. 쿠웨이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의 친척 국가였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을 응징한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 기지가 생긴다.
문제는 당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받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몰려들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2000년 전 로마 제국에 의해 쫓겨난 유대인들은 “예수를 팔아먹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기독교 국가에서 온갖 천대와 멸시와 핍박을 받았다. 2차 대전 때는 나치로부터 학살을 당했다.
유럽은 유대인들에게 ‘빚’이 있었다. 또한 2차 대전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것은 유대인 금융 재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눈치 보고 살지 않을 땅을 원했고,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그런데 건국 과정이 잔혹했다.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무슬림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나라를 세웠다. 그런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쥐고 흔드니 오사마 빈 라덴은 아랍 무슬림들이 고통받는 제1 원인을 미국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후 테러와 대테러 전쟁이 수십 년 동안 반복되는 중이다.
그렇다고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랍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미국이 벌인 대테러 전쟁 14년, 미군 6800명이 죽는 동안 중동에서는 민간인 22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죽은 22만 명에게 가족이 5명씩 있다고 하면, 100만 명이 원한을 품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이희수 교수는 “IS는 궤멸할 수 있지만 IS가 제거되는 순간 IS와 유사한, 또는 더 급진적인 테러 조직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결론, 우리는 왜 모르는 걸까
지금까지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세 가지만 적어봤다. 편견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슬람은 우리가 몰라도 되는 대상일까?
아시아만 해도 중동 지역은 물론 중앙아시아의 ‘~스탄’ 국가들은 모두 이슬람이다. 인도는 종교에 따라 무슬림들이 많은 지역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분화됐다. 인도 내에도 무슬림 인구는 전체의 15%에 달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이다. 이밖에 사하라 사막 북쪽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슬람이고, 유럽에도 알바니아 같은 이슬람 국가가 존재한다. 인구로 치면 16억 명이고, 나라 수로 치면 57개가 넘는다. 세상의 4분의 1이 무슬림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슬람에 왜 이리 무지한 걸까? 이희수 교수는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가 서구식 세계관을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인도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들에게는 서구 제국들이 ‘원수’였다. 반면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미국의 도움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근대 교육은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관이 이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언컨대 이슬람은 우리가 그렇게 허투루 볼 문명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등 인류 문명의 기원 중 하나였고, 유럽에서는 서기 5세기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된 15세기까지 ‘암흑의 시대’라 부르지만, 이슬람은 문명의 꽃을 피우고 세상에 이를 전파했던 시기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니 이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슬람이 궁금한 분들에게는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학교>를 추천한다.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이슬람학교의 강의 내용을 풀어 놓은 것이어서 이슬람에 대한 입문서로 쉽게 볼 수 있다. 중동의 테러와 정치 경제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이 책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는 무함마드부터 시작된 이슬람 종교의 역사부터 이슬람의 문화와 비즈니스까지 이슬람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이 교수는 “전 세계 4분의 1을 악마화하면서 96.9%를 대외무역에 의존하는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편견과 오류, 지나친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글로벌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나와 다른 가치를 이해하고 공존의 지혜를 찾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취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조금 더 심화된 내용을 얻고자 한다면 미국인 저널리스트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추천한다. 이 책 또한 ‘무지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쓴 이슬람 역사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읽어도 이해하기 쉽다. 이 두 가지 책을 모두 읽으면 이슬람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비로소 역사의 씨줄에 날줄이 엮이면서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이 왜 이 모양인지 그림이 그려지게 될 것이다.
출처: 북클라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