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하산을 한다고 장땡이 아니다
학문 분야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자연과학-공학의 대학원 교육은 일종의 도제식 교육이라고 봐야 한다. 도제식이라고 한다면 뭐 이런 것을 연상하게 된다. 무공 혹은 마법을 닦기 위하여 산속 깊이 사는 고수를 찾아가서 처음에는 잡일부터 하면서 하나씩 내공을 쌓는 그런 분위기?
그렇게 해서 세월이 흐르고 제자는 슬슬 하산하여 그동안 갈고닦은 비급을 강호에서 뽐내고 싶다. 그래서 스승에게 ‘저 이만 하산하면…’ 해보지만 스승에게’ 네놈은 하산하려면 10년은 멀었다!’ 하는 쿠사리먹고 수련 계속…이러다 보면 ‘아니 저 양반은 사실 내가 계속 청소, 세탁 등등의 시다바리 계속해주길 바라고 이러는 건가?’ 라는 생각도 해본다.
‘에잇, 나는 내가 충분히 내공이 올랐다고 생각한다. 저 양반한테 배울 것은 이제 없어. 하산해서 나의 내공을 중원에서 펼쳐보는 거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야밤중에 스승 몰래 하산했다. 그러다가 처음 만난 어떤 껄렁한 건달이 시비를 걸어서 내가 그동안 수련한 내공을 펼쳐보려고 하다가… 끔살. The End.
결국, 현대의 대학원 교육도 비슷한 상황인데, 많은 대학원생들은 자신의 학위 과정을 최소화하여 빨리 졸업하기를 원하지만, 지도교수의 경우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들 중 상당수가 박사로서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오는 갈등은 상당히 큰데, 하여튼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충분한 준비가 없이 학위를 취득하는 경우 결국 충분한 내공 수련 없이 강호로 뛰어들었다가 첫 판에 끔살당하는 저 양반과 비슷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의 경우 그의 ‘학문적 나이’를 박사학위 취득 후부터 따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학위 취득 후 어느 정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신진과학자’로 인정받지 못하며 따라서 펠로우쉽, 연구비 등의 지원자격을 잃는 경우도 많이 있으며 박사학위 취득 후 한참 후에도 캐리어에서 그닥 진전이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향후의 진로가 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대학원생 입장에서 ‘과연 내가 준비되었는가’ 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데, 한번 다음의 체크리스트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자기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할 수 있는가?
결국, 연구라는 것은 세상에 아무도 풀어본 적이 없는 문제를 푸는 것…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풀 만한 문제’를 찾는 과정이다. 즉 규정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본이고, 여기에 더 나아가서 문제를 규정하고 이것을 만드는 과정이 박사과정 트레이닝의 핵심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하산’을 해도 되냐 안되냐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자기 스스로 문제를 찾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느냐가 되겠다.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하산’하더라도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제구실을 못한다. 무협으로 비유한다면 하산하여 겨루는 첫 일합에 패하여 끔살당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박사과정에서 ‘하산’을 하더라도 독립적인 연구자로 바로 연구를 할 수 있는 분야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고, 상당 분야에서는 오랜 기간 (어쩌면 박사과정 기간보다도 더 길 수 있는) 포닥 혹은 유사품으로 여전히 독립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연구하는 사람도 많이 있으므로 박사과정을 졸업하면서 완전히 독립적인 연구자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더라도 당장은 ‘끔살’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다. 박사과정 Part Deux
그러나 일단 학생 신분을 벗어난 이상, 포닥은 학생 때처럼 실수가 용인되는 자리가 아니다. 정해진 기간 안에 결과를 내지 못하면 당장 자리가 위협받는 그런 백척간두에 있는 상태랄까. 특히 이미 박사를 받은 포닥으로써 자기 스스로 문제를 만들 수 있는 자질이 없이 그저 PI 가 시키는 일을 하는 상황에 그친다면 그 사람의 장래는 심히 걱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가끔은 ‘아, 내가 하는 연구는 순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능! 지도교수님이 여기에 보태준 것은 1g도 없음! 나는 완전히 독립 가능함!’ 라고 믿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뭐 사실 그런 분들도 있겠죠.
그런데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연구주제’ 라고 생각되는 연구 주제의 원류를 생각해 보고, 지금 당장 당신이 독립해서 연구를 수행한다고 할 때 지도교수와는 상이한 토픽을 연구하여 생존하든지, 혹은 동일한 토픽으로 연구를 할 때 지도교수의 랩과 경쟁을 할 자신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은 완전히 독립 가능한 사람이니 어서 빨리 졸업 고고… (근데 왜 아직도 학위를 못 받고 있는지도 먼저 생각해 보고…)
2. 내가 한 일을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할 수 있는가?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발굴한 연구주제를 가지고 자신이 연구해서 이를 논문 화하여 퍼블리쉬하고 학술대회에서 발표도 하고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당연하다.
즉 연구를 기획하고 수행하는 것도 문제지만, 실제로 이 연구결과를 출판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것 역시 박사학위과정의 중요한 교육 목표라고 하겠다. 그러나 실제 주변을 돌아보면 ‘논문요? 그거 다 교수님이 썼음. 전 실험만 열심히…’ 와 같은 상황으로 학위를 받는 분이 생각보다 많다. 비록 논문을 어떻게든 썼다고 하더라도 학술논문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심지어는 포닥때까지 논문은 제대로 써본 적이 없이 데이터만 열심히 뽑아서 좋은 저널에 논문을 실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분들도 꽤 보인다.
그러나 결국 논문을 쓰는 능력이 달리는 것은 학위 후에 살아남을 생존 가능성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학위를 받기 이전에 논문 혹은 학회발표의 스킬을 완벽하게 다져두지 않으면 나중에 참 험난한 세상을 살게 되리라는 것은 100% 보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연구자의 기본 소양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논문 쓰기에 대한 훈련이 안 된 채 배출되는 박사들이 적지 않다. 하긴 PI의 입장에서야 학생이 꾸역꾸역 논문을 쓰는 것보다는 숙달된 본인이 후딱 써버리는 것이 더 편하거든요. 그러나 적어도 학교에 재직하면서 공식적으로 대학원생을 지도하는 교수님들은 학생이 논문을 쓰도록 만드는 것이 ‘Job Responsibility’의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당신이 소속된 분야를 개관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당신이 전공하는 분야에 대해서 리뷰 논문 한 편 정도는 아무런 문헌 서치 없이 쓸 수 있는가? 리뷰 논문 한 편을 쓴다고 한다면 최소한 100편이 넘는 오리지널 리서치 페이퍼의 내용은 거의 꿰고 있어야 할 것이며 최근 10년간 자신의 필드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문헌은 ‘몇 년 누구누구’ 하고 외울 지경이 되면 더욱 좋다. 해당 분야의 해외 연구자들은 거의 이름도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요즘은 해외 학회 웬만하면 안 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주요한 연구자들과는 안면 정도는 틀 수 있을 것 같고 말이다. (해외 학회는 님들 관광을 시켜주러 가는 게 아니다!)
4. 그러나 가끔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완벽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위를 받기보다는 이러한 준비가 될 때까지 학위를 기다리는 것이 최상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는데…
가령 지도교수의 능력부족으로 더 이상 다녀봐야 의미 있는 지도를 받을 수 없는 경우라든가, 아니면 실험실 연구비의 고갈로 더 이상 재정적인 보조를 받을 수 없는 경우. 이런 경우는 충분한 트레이닝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여도 어쩔 수 없이 ‘가능한 한 빨리 졸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비상탈출
만약 자신이 경쟁력 있을 정도의 트레이닝 없이 졸업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나? 미납 요금은 언젠가는 내야 하듯이 결국은 부족한 트레이닝은 어디에서든 보충이 되어야 한다. 아니면 끔살. 그러나 일단 학위를 받으면 대개는 더 이상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는 위치로 잘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뭐 결국 그 경우에는 현장에서 실전을 뛰며 트레이닝을 하는 상황, 혹은 그래도 가능한 트레이닝에 유리한 환경을 찾아서 포닥 등을 하는 과정이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과연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 프레시 박사인지를 잘 인지해야 하는데, 만약 자신이 경쟁력이 있는 프레시 박사라면 포닥과정에 트레이닝 따위는 상관없이 무공을 겨룰 수 있는 ‘큰 바닥’ 에 도전해도 된다. 그러나 자신의 경쟁력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런 바닥에 들어갔다가 ‘끔살’ 되어도 책임지는 사람 아무도 없다.
가령 트레이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쩌다 (운 좋아) 그런 큰 바닥(흔히들 ‘빅가이’ 랩이라고들 하는) 에 들어가는 분들도 종종 보인다. 그런데 그런 곳은 성공한 사람은 외부의 눈에 아주 잘 띄지만 ‘끔살‘ 된 시체는 눈에 안 띄게 증발하는 바닥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만약 자신에 대한 평가가 힘들다면 타인의 조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근데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는 분들은 대개 타인의 조언도 개무시하는게 함정
5. 끔살이 되도 ‘리스폰’은 가능하다. 그러나…
물론 학문의 세계에서 ‘끔살’ 이 되도 무슨 온라인 게임처럼 계정삭제…!! 가 바로 되는 것은 아니며 어느 정도의 리스폰은 가능하다. 아예 전업해서 더 잘나가는 분들도 있으니까. 뭐 맨날 끔살당하는 게임 할 바에야 다른 게임으로 바꾸자. 그러나 ‘리스폰’ 를 하면 할수록 스탯이 깎인다는 것을 명심. 내가 끔살 몇 번 당해봐서 아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