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Research)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굉장히 거창하고 어려운 주제입니다. 학문의 길을 수십 년은 걷고 나서 대답할 수 있는 주제인 듯 하지만, 제 생각도 한번 정리 해 보고,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 제 생각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확인할 수 있게 글로 남겨봅니다.
아인슈타인의 말
이전에도 언급한 적 있는 아인슈타인의 말로 시작해보겠습니다.
“If we knew what it was we were doing, it would not be called research, would it?”
저는 “우리도 우리가 뭐하는지 잘 모르잖아요. 알면 연구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정도로 번역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음미할 수 있는 말이지만, 우선 ‘모른다‘에 주목해봅시다.
사전의 정의
사전에서는 ‘연구’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봅시다. 다음사전은 ‘연구’를 “어떤 일이나 대상을 깊이 있게 조사하고 생각하여 이치나 진리를 밝힘”이라고 하고, 구글과 메리안-웹스터 사전에서는 ‘research’를 각각 “the systematic investigation into and study of materials and sources in order to establish facts and reach new conclusions”와 “careful study that is done to find and report new knowledge about something”이라고 정의합니다.
뭔가 조심스럽고 깊이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치나 진리를 ‘밝히고’, ‘새로운‘ 지식을 얻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말과 조합해보면, ‘뭘하는지도 모르면서 뭔가 열심히 하다가, 수많은 과정을 거쳐서 결국에는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는 과정‘이 연구인 것 같습니다.
연구의 목표
앞에서 내린 정의는 말은 잘 되지만, 뜬구름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니까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무엇이 연구가 아닌지와 한번 대비시켜 이야기해보지요. 더 정확히는 무엇이 연구의 목표인지, 무엇이 아닌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제가 연구 제안서를 쓰면서 아주 큰 도움을 받은 문서가 있습니다. 경전처럼 생각하며 자주 다시 읽어 보곤 합니다.
- George A. Hazelrigg, “Honing Your Proposal Writing Skills“
Hazelrigg는 미국의 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혹은 NSF—의 공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신 분입니다. 이 분께서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There are many words that, to reviewers, mean “not research.” These include “develop,” “design,” “optimize,” “control,” “manage,” and so on. If your statement of your research objective includes one of these words, for example, “The research objective of this proposal is to develop….,” you have just told the reviewers that your objective is not research, and your rating will be lower.
무엇인가를 개발(develop), 설계(design), 최적화(optimize), 제어(control), 관리/조종(manage) 등을 하는 것은 연구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재미있습니다. 공학 분야에서는 저런 것을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겠다고 하는 논문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고, 심지어 연구 제안서에서도 저런 것이 목표라고 하는 연구자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연구의 목표는 아니라고 합니다. 순수 연구를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미국과학재단에서 수십 년간 일해오신 분께서, 개발, 설계, 최적화, 제어, 관리/조종은 연구의 목표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다른 재미있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공학 연구의 목표를 기술하는 방법은 자신이 알기로는 단 4가지 밖에 없다고 합니다.
- “The research objective of this proposal is to test the hypothesis H.” (가설 검정)
- “The research objective of this proposal is to measure parameter P with accuracy A.” (측정)
- “The research objective of this proposal is to prove the conjecture C.” (추측 증명)
- “The research objective of this proposal is to apply method M from disciplinary area D to solve problem P in disciplinary area E.” (학제간 융합 연구)
사회과학과 공학이 어렴풋이 겹쳐지는 분야를 연구하는 제가 보기에 반드시 맞는 말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4가지 범주 이외의 일반화된 연구 목표 기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혹시 아시는 분은 Hazelrigg에게 연락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법도 합니다.
제 분야의 NSF 프로그램 담당자께서 해주신 조언이 있습니다. 어떤 연구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그 결과로, ‘지금은 우리 인류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 그 지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비교적 명확히 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만 NSF에서 연구비를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의 사전적 정의와 일맥상통합니다. 아인슈타인의 말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인슈타인 본인도 연구비를 따기 위해 제안서를 쓸 때 즈음 되서는 목표가 비교적 명확해졌을 것이라 (제 마음대로) 추측해봅니다.
새로 얻게 되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것인가는 두번째 문제입니다. 우선 우리 인류가 현재 모르는 새로운 지식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유타 대학교(University of Utah)의 Matt Might 교수는 이것을 그림으로 보여줬습니다.
박사 학위를 위한 연구이든 그냥 연구이든 인류 지식의 한계선을 밖으로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연구라는 겁니다.
연구(Research)와 개발(Development)의 구분
그럼 위에서 언급한 개발, 설계, 최적화, 제어, 관리/조종은 무엇일까요? 이런 단어를 언급하는 연구 논문과 연구자들이 아주 많은데, 연구의 목표는 아니라고 하니 그 실체가 궁금해집니다. 제가 짧은 경험으로 판단하건데, 이것들은 어떤 연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행위들입니다. 언급한 행위들 자체가 연구는 아니지만, 저 행위들을 하지 않고 어떤 연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연구제안서를 쓸 때를 생각해보면 저런 행위들이 연구의 목표가 될 수는 없지만,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가지 작업(task)일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도, 저런 행위들이 연구 그 자체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Hazelrigg의 글을 읽었을 때는 놀랐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새로운 지식을 알아내는 ‘연구’는 지도교수님께서 하고 있었고, 저는 그 일을 도우면서 연구에 필요한 여러가지 개발, 설계, 최적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새로운 알고리듬을 개발하는 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Hazelrigg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연구가 아닙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새로운 알고리듬을 개발’하는 것이 연구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알고리듬을 개발하는 일은 분명 중요한 연구 행위이지만, 알고리듬을 개발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연구의 목표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 알고리듬이 동물 사진 중에서 고양이 사진을 골라내는 알고리듬이라면, 고양이 사진을 잘 골라내는 것이 목표이지, 알고리듬 개발이 목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차이는 명확합니다.
심지어, 고양이 사진을 잘 골라내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를 하는 분들께서도 단지 고양이 사진 구분만이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잘 인지하고 계실겁니다. 고양이 사진, 개 사진을 넘어선 그 너머 어딘가에 목적이 향하고 있을 겁니다. 고양이 사진을 잘 골라내는 연구를 하다 보면, 사진을 빠르게 스캔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고속 스캔 장비 개발이 목표가 아닙니다. 고양이 사진을 잘 골라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연구의 목표와 본질
물론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뭘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뭔가를 하다가 점점 더 목표가 명확해지고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연구가 이런식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이전에 관련된 글을 두 개 남긴 적이 있습니다.
파인만 알고리즘에서는 문제정의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 바 있지만, 문제를 명확히 정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문제를 정의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시도를 해 보게 되는데, 이 과정이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뭘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벌어집니다. 문제가 명확히 정해지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이것 저것 해 보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얻게 되는 연구를 할 수 있겠지요.
연구에 대해 삼 단계로 말해보기를 예시로 알아봅시다.
(당신은 무엇에 대해 공부하고 있나요?)
1. 저는 X라는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왜 그 주제를 공부하고 있지요?)
2. 왜냐하면, 저는 왜 Y인지 알고 싶거든요.
(그걸 알면 뭐가 어쨌다는 거죠?)
3. 그러면, 제가 다른 사람들이 왜 Z인지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거든요.
1번 단계가 Hazelrigg가 말하는 연구가 아닌 작업(task)입니다. 개발, 설계, 최적화 같은 것들 말입니다. 2번은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직접적인 새로운 지식이고 연구의 목표(objective)입니다. 3번은 파급효과로 인해 얻어질지도 모르는 새로운 지식이며 연구가 추구하는 방향, 즉 목적(goa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번과 3번을 항상 생각하며 연구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적절한 연구 목표 없이도 좋은 ‘논문’은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이란 것이 사실은 특정 분야 연구 덕후들이 잡지에 싣는 기고문 같은 것이라, 그냥 궁금해서 해 봤는데 이런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더라 하는 식의 논문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논문이 나중에 어떤 파급효과를 가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좋은 논문이 아니더라도, 좋은 목표가 없는 논문이라도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논문도 많이 쓰다 보면 나중에는 목표도 뚜렷하고 연구 내용도 훌륭한 좋은 논문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화여대의 오욱환 교수님께서도 “걸작이나 대작보다 습작에 충실하십시오.”라고 조언하신 바 있습니다.
다만, 저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연구자들에게는 좋은 연구 목표에 대해서 끊임 없이 생각해보는 것이 좋은 연구를 하고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연구하겠습니다.
원문: 잡생각 전문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