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편안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이 죽었다는 뜻이에요. (The minute you know you’re on safe ground, you’re DEAD.)” – David Bowie
뮤지션들의 뮤지션, 가장 독창적인 아티스트. 데이빗 보위(1947-2016)는 혁신가였습니다.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가 혁신가인 다섯 가지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만든 아티스트
보위는 ‘팝-록 카멜레온’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재발명했습니다. 뮤지션으로서 그는 뭔가 기이하고 풍자적이고 아이러니컬한 것들을 가사와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능했습니다.
보위는 글램록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한 장르에 멈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펑크, 재즈, 소울, 미니멀리즘, 디스코, 테크노, 인더스트리얼,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고 그 덕분에 록의 경계는 넓어질 수 있었습니다.
‘Aladdin Sane'(1973)에선 재즈 솔로를 삽입했고, ‘Young Americans'(1975)와 ‘Station to Station'(1976)에선 소울을 시도했으며, ‘Low'(1977), ‘Heroes'(1977), ‘Lodger'(1979) 등 ‘베를린 3부작’에선 독일 크라우트록과 아트록을 접목해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또 ‘Let’s Dance'(1983)에선 디스코를 접목했고, 1988년 4인조 밴드 ‘Tin Machine’을 결성해 만든 음반 ‘Tin Machine'(1989)에선 하드 록을, 1995년 브라이언 이노와 만든 ‘Outside’에선 일렉트로닉을 구현했습니다.
2. 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 아티스트
데이빗 보위는 뮤지션뿐만 아니라 영화배우, 프로듀서, 아티스트로서의 커리어도 갖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그는 평범한 배역은 맡지 않았습니다. 그가 연기한 배역은 한 눈에 데이빗 보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역할들이었습니다.
데뷔작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1976)에선 외계인이었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국-일본 합작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에선 일본 장교와 동성애 관계에 빠진 영국군 포로, <헝거>(1983)에선 흡혈귀, <라비린스>(1986)에선 마왕,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였습니다.
그는 또 IT 기기와 친숙했습니다. ‘오미크론’이라는 컴퓨터 게임에 등장했고, 인터넷을 일찍 받아들였습니다. 1998년 뮤지션 최초로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BowieNet’을 만들었고,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음악을 인터넷에서 들을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메이저 레이블로부터 고소당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섹슈얼리티도 하나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Ziggy Stardust’ 때 동성애자라고 밝혔는데 이후 ‘Station to Station’ 앨범을 발표할 땐 양성애자로 수정했습니다. 하지만 1983년에는 다시 이성애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친아들이 있으니 동성애자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만 양성애자와 이성애자 중 뭐가 맞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3. 삶이 곧 퍼포먼스였던 아티스트
1972년 데이빗 보위는 ‘Ziggy Stardust’ 캐릭터로 분해 처음 TV에 등장했습니다. 그해 커밍아웃을 한 뒤엔 머리카락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고 여장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이어 열광했죠. 1960년대에 태동한 글래머러스한 록, 즉 ‘글램록’이 전성기를 맞은 순간이었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았던 그는 한 번 성공한 방식을 다시 시도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Ziggy Stardust’로 대성공을 거둔 뒤엔 ‘Aladdin Sane'(1973)에서 얼굴에 번개 무늬를 그리고 나타나더니 이후 ‘지기 스타더스트’ 페르소나를 버리고 ‘Diamond Dogs'(1974)에선 ‘Halloween Jack’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엔 다시 머리카락을 깎고 말끔한 신사의 차림으로 변신합니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퍼포먼스 그 자체입니다. 물론 그의 모든 실험이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또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계속해서 돌아왔습니다.
4. 협업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넓힌 아티스트
데이빗 보위는 다양한 분야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여러 장르의 음악은 물론 댄스, 패션 디자인, 영화, 문학, 현대미술, 일본의 가부키 등이 보위 음악의 원천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열정은 외국 생활 동안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경험에서 온 것입니다. 특히 보위에게 영감을 준 아티스트는 이기 팝, 티랙스, 앤디 워홀, 밥 딜런 등입니다. 티랙스에게선 글램록을, 이기 팝에게선 ‘지기’ 페르소나를 가져왔습니다.
50년 동안 보위는 많은 뮤지션, 아티스트, 댄서, 패션 디자이너들과 협업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향받고 또 영향을 주었습니다. 보통 유명인들 간의 협업은 보여주기식 행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보위는 항상 협업으로부터 최고를 끌어냈습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귀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 아티스트였기에 슈퍼스타와도 큰 트러블 없이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존 레논과 ‘Fame'(1975), 브라이언 이노와 ‘Low'(1977), 퀸과 ‘Under Pressure'(1981), 스티비 레이 본과 ‘Let’s Dance'(1983), 티나 터너와 ‘Tonight'(1984), 믹 재거와 ‘Dancing in the Street'(1985)를 함께 작업했습니다. 또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발굴해 루 리드 솔로 음반을 프로듀싱했고, 나인 인치 네일스와 투어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5.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준 아티스트
데이빗 보위는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영국의 ‘브리티시 위클리’가 최근 뮤지션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뮤지션을 꼽아달라고 요청한 적 있는데 보위가 1위에 꼽혔습니다. 2위는 라디오헤드, 3위는 비틀즈였습니다.
U2, 스웨이드, 레이디 가가, 마릴린 맨슨 등이 그에게 영향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라디오헤드도 설문에 참가했는데 그들 역시 데이빗 보위를 꼽았습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보위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1970)를 리메이크해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 보위의 섹슈얼리티 퍼포먼스는 마돈나와 펄프의 자비스 코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밖에 보위의 음악을 차용한 영화들은 수없이 많은데요. ‘Modern Love’가 멋지게 쓰인 레오스 카락스의 <나쁜 피>(1986), ‘Space Oddity’가 감동적으로 흘러나온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Starman’이 쓰인 <마션>(2015) 정도만 언급하겠습니다.
24살 데이빗 보위의 편지
1970년 11월 17일, 24살의 데이빗 보위는 음반 제작자 밥 그레이스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냅니다. 지금 별로 가진 건 없지만 음악을 만들고 있고 계속 만들고 싶다는 내용인데요. 이 편지를 받은 그레이스는 보위와 계약합니다.
그가 어떤 편지를 썼는지 살펴보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밥에게,
저는 브릭스턴에서 태어났고 학교에서 예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광고회사에 갔는데 별로 좋진 않았어요. 그후 회사를 나와서 록앤롤 밴드에 들어가 색소폰을 연주했어요. 노래도 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저는 비트족이라서 히피가 되어야 했어요. 덕분에 몸무게가 불었고 해변에 가서 많은 곡을 썼어요. 몇몇 사람들이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그걸 녹음했어요. ‘Space Oddity’라는 음반이에요. 그걸로 돈 좀 벌었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다 써버렸어요.
지금 저는 24살이고, 결혼했고, 살도 좀 뺐고, 아직 곡을 쓰고 있고, 아내는 임신했는데 저는 그게 아주 좋아요.
사랑을 담아, 데이빗
출처: 유창의 창작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