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2015년은 한국 근대사에서 매우 의미가 큰 간지인 을미년이었단다. 120년 전의 을미년에 조선의 왕비는 자신의 궁궐을 습격한 외국인의 칼에 맞아 죽고 시신마저 불태워지지. 이른바 ‘을미사변’이야. 언젠가 네가 이 왕비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는 짐짓 딴청을 피웠지. 아빠는 보고 싶지 않았거든. 특히 그 뮤지컬의 하이라이트라 할 장면, 죽임을 당한 왕비의 혼이 “이 나라 지킬 수 있다면 이 몸 재가 된들 어떠리. 백성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조선이여 일어나라 흥왕하여라”고 절규하는 장면에 이르면 아빠는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렸을지도 몰라.
명성황후(아빠는 민비라고 부르려고 한다. 당시 조선 백성도 그렇게 불렀고 낮춰 부르는 것도 아니니까)는 자신과 친척의 이익을 위해 백성이 배를 곯든 말라 죽든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고 “조선 백성들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싫어한 인물이며 심지어 개혁을 부르짖으며 일어난 백성들을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짓밟았지. 매천 황현의 기록에 보면 “다시는 임오년의 일을 당하지 않겠다”라면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이는 민비의 모습이 등장해. 임오년의 일이란 임오군란(1882)을 말해. 민씨 척족의 농간으로 몇 달째 봉급을 받지 못한 군인이 봉기하여 궁궐에 난입했던 조선왕조 사상 초유의 사건. 아무튼, 동학 농민군을 토벌해달라며 청나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어.
“전라도 관할인 태인, 고부 등지의 백성들이 흉하고 사나워서 원래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중략) 지난 임오년과 갑신년 두 차례 난리 때에도 모두 중국의 병사들 덕분에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 원군 문제도 간청하오니, 속히 북양대신께 알려 몇 개의 부대를 파견토록 조치해주십시오. 저희 군대 대신 동비(동학군)를 초멸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시 민비를 비롯한 지배층의 머리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단다. 어떻게 되든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그를 넘보려는 어떤 세력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각오만 충만했지. 그럴 힘조차 없어서 외국 군대를 빌려 자기네 국민들을 ‘초멸’하겠다는 데에 이르면 그저 할 말을 잃기 마련이야.
그들뿐이 아니야. 개혁을 하겠다는 이들도 국민의 지지보다는 외국 공사관의 협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그들 모두는 외세를 이용하겠다는 심산이었지만 결국은 이용만 당하고 말았지. 청일전쟁에서 믿었던 청나라가 참패하고 물러가자 민비는 다시 러시아에 접근하려 했고 조선을 차려진 밥상으로 치부했던 일본이 결국 을미사변이라는 희대의 만행을 저지르게 돼.
그날 경복궁에 뛰어든 건 일본인만이 아니었어. 조선군 훈련대 병사들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친일파에 해당하겠지만, 마냥 일본의 앞잡이라고 몰아붙이기엔 무리가 있어. 세계적인 농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로 그날 경복궁을 침범했던 우범선의 말이야. “나는 일개 무부(武夫, 군인)요. 하지만 왕비 일파를 물리치지 않고는 무슨 수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건 압니다.” 그들은 나름의 애국을 도모했던 거야.
을미년 가을 명성황후 민씨는 참혹하게 생을 마감했어. 방해물을 없앤 일본은 친일 내각을 구성하는데 이때 활약한 총리대신이 김홍집이라는 사람이었어. 갑오경장이라는 일대 개혁 후의 후속 작업으로 ‘을미개혁’이 행해지는데 이때 우리나라에는 최초로 양력이 도입돼. 을미년 즉 1895년 음력 11월 16일에서 1896년 양력 1월 1이라 점프를 한 거지. 병신(丙申)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새해가 됐단다.
단발령
그런데 음력의 마지막 날인 음력 11월 16일 학부대신 이도재는 분노에 찬 상소를 올렸단다.
“단군 이래 땋은 머리 풍속이 변해 상투가 된 것이고 백성들 모두가 이 상투를 중히 여기는데 하루아침에 이를 깎는다는 것은 4000년 동안 굳어져 온 풍속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바로 단발령 반대였어.
단발령은 백성의 마음을 격렬하게 흔들었어. 매천 황현이 얘기했듯 “왕비의 죽음에 분노해야 하는지 통쾌해 해야 하는지”조차 헛갈리던 백성은 일본에 휘둘리는 내각이 별안간 선포한 단발령에 경악했지. 체두관이라 하여 나라 관리가 거리에 나가 상투를 싹둑싹둑 자르고 다녔고 상투를 잘릴까 봐 사람들이 거리에 나오지 않아 인적이 끊길 정도였다니 그 ‘충격과 공포’를 짐작할 만하지 않겠니. 갑오 농민전쟁 등 일반 상민들의 강력한 개혁 요구에 전전긍긍하던 봉건 양반님네들은 일거에 분위기를 바꿀 기회를 잡아.
불과 2년 전 갑오년에 수십만 농민군이 좀 더 평등한 세상과 더 많은 권리를 외치며 들고일어났던 나라, 왕비 일족을 처단해야 한다고 팔뚝 걷어붙이는 사람이 흘러넘쳤던 나라는 갑자기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터럭 하나라도 부모가 주신 것)라는 케케묵은 효경(孝經) 구절의 포로가 됐고 단발령 반발이 거센 와중에 “저 여자의 일족이 있는 한 아무것도 안 된다”는 원성의 대상이던 왕비는 국모(國母)로 자리매김하고 말아.
당시 총리대신 김홍집 이하 관료들도 굳이 단발령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 반발만 심하고 효용은 적은 개혁이라고 여긴 거지. 그러나 그들은 일본의 요구 앞에 무력했고 섣부른 단발령으로 개혁의 동력을 날려버리고 말았어. 결국 또 다른 외세를 선택해 그 나라의 공사관으로 피난 가는 어처구니없는 군주의 행동 앞에 그들도 몰락하고 말아. 이게 아관파천이지.
후일 “그가 살았더라면 망국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들은 총리대신 김홍집은 임금에 의해 역적으로 규정됐고 죽을 목숨이 되지. 일본군이 피난을 권유하자 김홍집은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으로 동족의 손에 죽는 것은 숙명이오. 구차하게 외국 군대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소”라고 선언하고 성난 군중 앞으로 나아갔어.
조선 말기를 통틀어 가장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고 궂은일을 도맡아 해서 “(비 오는 날 진창길에도 거침없는) 나막신 대신”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김홍집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어. 고작 몇 년 뒤 단발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졌고 상투가 그토록 목숨 걸고 지킬 대상도 아니었건만,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의 1월 1일 내려진 단발령은 그렇게 조선의 역량을 깎아 먹고 갑오년과 을미년을 거치며 힘겹게 밀고 가던 개혁의 기운을 무위로 돌리는 전환점이 되고 말았단다.
120년 전 조선은 한 치 앞을 바라보기 힘든 안개에 싸여 있었어. 하지만 지배층은 지혜를 발휘해 앞길을 밝히기는커녕 잇속에만 밝았고 외세를 이용해 자신의 국민을 ‘초멸’하는 만용을 부리다가 왕비가 죽임을 당하는 구렁텅이에 빠졌지. 개혁하려는 이들도 외세에 휘둘리기 일쑤로 나라의 나아갈 바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고, 국민 역시 지혜롭지 못한 분노에 휘말려 진일보의 기회를 내던졌단다.
갑오년을 전후해서 ‘갑오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거리다 병신 되면 못 가리’하는 민요가 유행했다고 해. 갑오·을미·병신의 간지(干支)를 빗대 만든 노래지. 사람도 그렇지만 나라의 운명도 그렇단다. 나가야 할 때 나가지 못하고 내디뎌야 할 때 내딛지 못하고 지혜로워야 할 때 그러하지 못하면 역사는 꼭 응분의 복수를 감행하는 거야.
60년이나 120년 뒤 또 다른 병신년이 다가올 때 후손들은 오늘의 병신년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까? 우리는 120년 전의 병신년과 다를 수 있을까?
원문: 산하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