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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였다. 수험생이었던 나는 독서실의 폐관 시간인 밤 2시까지 공부를 하다 집에 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 시간, 모두가 잠들고 적막이 감도는 그 시간에 피로와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허기를 달랠 수 있을만한 곳은 편의점과 맥도날드뿐이었다.
평일 밤, 새벽 2시에 편의점에 들어가면 카운터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작은 키, 웃음기 없는 얼굴, 짙은 다크서클, 동태같은 초점 없는 눈동자, 부스스한 머리, 힘 없는 목소리. 그야말로 ‘피곤하다, 피곤해서 당장에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그. 그는 그야말로 산 송장과 같았다.
난 항상 생각했다. 야, 어찌 인간이 이렇게 힘들어 보일 수가 있나. 대체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측은함은 잠시, 나는 그의 사정을 걱정할 여유 같은 건 없었고 어쨌든 그가 사는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는 전혀 달랐으므로 수험이 끝나고 더 이상 한밤의 편의점에 가지 않게 되자 그를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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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내가 처음 알바를 왜 시작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특히 돈에 궁해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별달리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작년 5월, 나는 알바를 시작했다. 도쿄를 중심으로 세를 넓혀가고 있던 규동 체인점으로, 내가 근무하는 시간은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즉 심야 근무였다.
왜 알바를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왜 심야 근무를 선택했는지는 잘 기억하고 있다. 낮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머리가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낮 시간은, 내게 뭔가 더 생산적인 것을 해야 하는 시간처럼 여겨졌다. 뭔가 오후에 약속이 잡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했었다. 게다가 그해 봄부터 발을 들여놓은 시민단체의 회의에도 꼬박꼬박 참석해야 했다.
그런 내게 밤 근무는 어떤 의미에서는 매력적이었다. 낮과 오후의 시간을 전혀 빼앗기지 않고 알바도 뛸 수 있다. 갑자기 다른 스케줄이 잡혀도 알바에는 영향을 안 준다. 어차피 어영부영하다 밤늦게 자는데, 그 시간을 활용해서 돈을 버는 게 생산적이지 않겠나. 게다가 심야수당까지 붙으니까 더 좋은 게 아닌가.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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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근무를 시작한 첫날, 예상대로 피곤했다. 피곤한 게 당연했다. 밤을 새우는 일인걸. 알바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밤을 새운다는 것은 내겐 그렇게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게임을 하다가 하늘이 서서히 밝아져 오는 것을 보며 잠드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아예 해가 훤히 뜬 아침까지 안 자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알바를 시작하고 밤을 새우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아침 7시에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8시. 여름이 가까워져 오면서 해가 뜨는 시간도 빨라지고, 또 아침에 내리 쪼는 햇볕은 얼마나 뜨겁고 강렬한지. 아침 햇살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 것이 일반적일 테지만 내 경우엔 알바가 끝나고 햇빛을 받는 게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태양이 폭발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날이 흐려서 해가 보이지 않거나, 겨울이 가까워져 오면서 해가 늦게 뜰 때는 그만큼 기분도 좋았다. ‘어두울 때 집에 들어가서 어두울 때 잠들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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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근무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어쩌면 심야 근무에 대해 쉽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밤에 자는 만큼 낮에 자는 건데 뭐 다를 게 있겠나.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아예 일주일 내내 밤에 근무하는 생활을 하면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으나 주 4일 정도로는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생활리듬이 완전히 몸에 스며들지 않아서 똑같이 8시간을 자도 대단히 피곤한 상태가 지속된다.
게다가 얄궂게도 밤에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졸음이 쏟아진다. 낮에 그렇게 잤으니 밤에는 안 졸릴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신체가 수면을 통해 에너지를 회복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된다. 알바가 없는 날은 일찍 잘 수 있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이미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생체리듬은, 야행성도 아니고 주행성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침대에 누워도 쉽게 잠에 들지 못하게끔 장애를 일으킨다.
처음엔 낮 시간이 아까우니까, 어차피 낮인데 아침 8시부터 4시간만 자고 일어나야지, 하는 마음으로 4시간씩 수면을 취했었다. 하지만 점차 알람도 못 듣고 자는 날이 많아지고, 그렇게 4시간, 6시간, 8시간, 종래엔 아침 8시에 잠들어 저녁 6시에 일어나는 일까지 빈번해졌다. 그렇게 하루를 통째로 날려 먹고, 기운 없는 상태로 저녁을 대충 챙겨 먹고 알바를 하러 나가는 것이다.
심야 근무를 하게 되면 식생활도 대단히 불규칙해진다. 아침을 먹고 잘 수 있다면 그나마 나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피곤해서 그냥 자기 일쑤고, 그렇게 오후 2-4시까지 자게 되면 결국 아침과 점심 두 끼를 건너뛰는 결과를 낳게 된다. ‘대체 왜 이렇게 온몸에 힘이 없고 피곤하지…’라고 생각하다가 그날 밥을 한 끼도 안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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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근무에서 오는 피로와 싸워야 하지만, 밤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근무에서 오는 피로와 싸움과 동시에 졸음과도 사투를 벌여야 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낮에 잠을 잤다고 해서 밤에 졸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쪽잠을 자거나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볼 때도 있다.
보통 가게에 손님이 없으면 대단히 편할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가게에 손님이 없고 적막이 감도는 게 오히려 더 졸리고 더 힘들다. 24시간 돌아가는 가게(주로 편의점, 맥도날드, 일본의 경우 규동 체인점)의 경우 밤엔 손님이 적은 틈을 타 낮에는 쉽게 하지 못하는 일들, 즉 재고를 보충하고 가게를 정돈하고 청소를 하고 하루 매상을 계산하는 일들을 한다. 손님이 쏟아질 경우(그런 경우는 적지만) 이런 ‘밤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손님이 오지 않을 경우엔 같이 일하는 종업원과 대화를 하지 않는 한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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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5시 반의 일이었다. 다른 종업원은 30분 전에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 나 홀로 감겨가는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리며 서 있었다. 그 와중에 손님이 한 명 왔다. 그 손님은 꽤 경쾌한 목소리로 내게 주문을 했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문을 받고 들어가서 조리를 하고 서빙을 했다. 서빙을 할 때 고객의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종업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문만 받아 적고 주방으로 휙 들어가버렸으니, 그게 어찌 불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고된 야간 노동에 시달리다 보면 상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물론 가게에서 어떤 업무를 맡아 하느냐에 따라 다를 테지만 내 경우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아침 5시쯤 되면 가게로 들어오는 고객에서 ‘어서 오세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 한 마디가 뭐가 어렵냐 싶겠지만 정말로 지쳐서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메말라 비틀어진 입술을 겨우 들어 올려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죽을 힘을 다해 건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고객은 이런 종업원을 보며 물론 언짢겠지만, 종업원으로서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나도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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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국제 암 기구(IARC)는 교대제(심야근무)로 인해 생체주기가 파괴되는 현상이 암을 유발한다고 발표했다.
최근에 드러난 야간노동을 포함한 교대제의 가장 큰 문제는 교대제 자체가 발암성 물질이라는 것이다. 2007년 국제암기구(IARC)는 교대제와 그로 인해 생체주기가 파괴되는 현상이 발암성(IARC Group 2A)을 갖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국제암기구는 “교대제로 인하여 밤에 빛에 노출되었을 때, 24시간 생체주기가 파괴되고 수면-활동 양상이 변화되어 수면 동안 분비가 증대하는 멜라토닌의 생성이 억제된다. 그러므로 암 발생 경로와 연관되어 있는 생체주기 유전자를 규제하던 작용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암 발생이 증가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멜라토닌은 밤에 수면 동안에 분비되는 것으로 항암작용을 한다고 알려졌는데, 밤에 빛을 비추는 것은 인체 내에 멜라토닌의 분비를 감소시켜 암의 발생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또한 야간노동을 포함한 교대제는 24시간 생체주기의 파괴로 인하여 24시간 생체주기의 리듬을 따르는 기관들에 이상을 일으켜 뇌심혈관계질환(돌연사, 심장마비, 고혈압, 콜레스테롤의 과도한 증가, 협심증, 심근경색, 뇌졸중), 수면장애 및 교대부적응증후군(수면박탈, 만성피로, 각성도 감소, 집중력 감소, 생리적 리듬의 부조화로 인한 교대 시차 증후군), 소화기계질환(위염, 위궤양), 내분비계질환(당뇨병)을 발생시킨다.
무리도 아니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한,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없다. 주야 맞교대 근무, 말은 쉽지만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결코 쉽지 않다. 하늘에 해가 떠 있지 않은 한 밤은 어디까지나 밤인 것이다. 낮에 잔다고 해서 밤에 낮처럼 생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신체리듬이 무너지고 병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이 글은 심야 서비스 노동을 중심으로 썼지만 심야 제조 노동도 그 가혹함에 있어서는 같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투입 대비 산출, 이른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끝없이 달려왔고, 끝없이 인간을 자본주의의 톱니바퀴 속에 억지로 욱여넣어 왔다. 심야노동은 그 한 단면이다. 마르크스는 교대제 심야노동에 대해 “노동력을 하루 24시간 전체에 걸쳐 착취하려는 것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충동이다. 그러나 동일한 노동력을 낮과 밤 계속 착취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육체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간에 소모하는 노동력과 야간에 소모하는 노동력을 교대할 필요가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마르크스 ‘자본론’, 김수행 역, 상, 342쪽). 그리고 그렇게 ‘자본주의적으로’ 최대의 생산성을 추구한 결과, 인간의 생명마저 위협하는 구조가 마치 당연한 것인 마냥 받아들여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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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노동과 관련하여 생각해봐야 하는 지점은 하나 더 있다. 우리는 왜 ‘심야노동’을 필요로 하는가? 수요가 없다면 공급도 없을 터인데, 그렇다면 이 24시간 점포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대체 오밤중에, 밤 12시에 대형마트에서 반찬거리를 사는 사람들, 새벽 2시에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 새벽 4시에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 먹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결국 밤늦게 퇴근하는 직장인들, 그리고 밤늦게까지 공부에 시달리는 수험생들, 그리고 다른 심야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일 것이다.
잔업도, 야근도, ‘심야노동’도 없다면 또 다른 ‘심야노동’이 필요할까? 시민 각자가 ‘저녁이 있는 삶’을 갖게 된다면, 직장인들이 오후 6시에 퇴근할 수 있다면, 학생들이 저녁까지 공부하고 쉴 수 있다면, 그래도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이나, 맥도날드가 필요할까? 대형마트가 밤늦게까지 영업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우린, ‘한밤중의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늦게까지 일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야근무가 심야근무를 낳는 부정의 연쇄가 생겨나 버린 것이다. 잠들지 않는 집단 불면증의 도시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심야 노동의 피해자인 한편, 심야 노동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구조를 알게 모르게 지탱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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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언제든 길에 나가면 환히 불을 밝히고 있는 편의점이 있고 맥도날드가 있다. 편하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다. (지금도 심야근무를 계속하고 있지만) 나는 그 불빛들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고 걱정이 된다. 지금 저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졸리고 얼마나 자고 싶을까. 집에 돌아가서는 또 얼마나 피곤할까.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는 생산과 서비스의 제공,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최대의 ‘이윤’. 안락하지만 그 속에서 파괴되는 인간성. ‘심야노동’이라는, 인간이라는 생물의 구성체계를 근본부터 비틀어버리는 이런 야만적인 형태의 착취를, 돈을 향한 탐욕이 같은 인간의 건강·생명조차 담보로 하는 이 모습을 우리는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바라봐도 좋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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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근무를 마치고, 집에 와서 씻으려 거울을 보면, 그 남자가 서 있다. 수염이 거뭇거뭇하고, 머리는 떡지고, 입술은 메마르고, 얼굴엔 기름이 흐르고, 진한 다크서클이 있고, 반쯤 감긴 눈엔 눈곱이 붙어 있고. 그럼 나는 거울 속의 그 남자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담아,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수고했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