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때와 꼭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위안부 문제다. 국가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멀쩡한 주제를 건드리기 시작했고, 결국 멋대로 일을 처리했다. 국정화 때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① 일방적 의제 설정: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고 패배주의를 가르친다.”
② 상황의 단순화: “역사학계의 90%가 좌익.” 역사학자들을 배제.
③ 강압적 갈등 해결 방식: 결국 압도적인 반대 여론에도 국정화 고시 강행. “국정화를 반대하는 세력은 북의 지령을 받은 세력” 운운.
위안부 문제의 경우 아직 모든 이야기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유사한 구조가 점쳐진다.
① 일방적 의제 설정: “냉각된 한일 관계 회복을 위해 위안부 문제부터 합의해야 한다.”
② 상황의 단순화: 합의 과정과 절차에서 정대협 등 배제.
③ 강압적 갈등 해결 방식: “다소 섭섭하더라도 대승적으로 이해하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과정이 ‘종북논쟁’으로 일반화되었듯, 이미 극우 계열에서는 유사한 주장을 흘리기 시작했다. 여러 의미에서 국정화와 위안부는 정부가 만들어낸 쌍둥이다.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가 또다시 ‘역사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왜 정부가 나서서 합의를 보았는가
위안부 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고 매듭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가 언제부터 정부 소관이었던가. 처음 위안부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그리고 이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을 때. 그 과정의 주체가 과연 정부였던가. 애초에 정부가 아니라 학계, 여성계 그리고 피해 당사자가 주체 아니었던가. 사안이 워낙 심각하고 컸기 때문에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국가가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언제 이 문제가 단 한 과정이라도 온전히 국가 소관의 문제였단 말인가.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처음 나오기 시작했던 것은 1990년대 초반.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 등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고,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에 나와 최초로 본인이 겪은 만행을 증언하였다. 몇 달 후인 1990년 11월 16일에는 37개 여성단체가 모여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결성된다. 그리고 1992년 1월 14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는 방위청에 보관된 문서에 위안부 감독, 통제에 관한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대응해 “군이 직접 관여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40년간 묻히고, 잊히며, 잊도록 강제했던 역사적 사실이 민간에서, 여성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으로 시작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한 많은 세월을 이고 온, 한때는 아름답고 청초했으나 이제는 노년의 무게를 짊어진 여인네들의 고통.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은 그들의 아픔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말하면 내 딸이 더럽혀졌다고 집에서 쫓아냈고, 남편에게 말하면 창녀랑 살 수 없다고 쫓아냈고, 자식들에게 말해도 쫓겨났다. 국가는 알지도 못했고, 사회는 그들의 입을 막고, 가슴을 막고, 심장에 침묵의 못을 박아댔다.
10대 시절 꽃다운 나이.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돈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이 그녀들을 가족에게서 몰아냈고 그렇게 몸과 마음이 더럽혀진 후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양공주가 되고, 포주가 되고, 생애 전체가 망가지고 버려진, 차마 형언할 수 없는 고통조차 있지 않았던가.
그때 국가는 무엇을 했던가. 대체 무엇을 했길래 자기들이 나서서 해결사랍시고 고작 돈 몇 푼으로 입을 막으려 하고, 비교적 잘된 협상이라고 규정하고, 할머니들이 나라를 위해 널리 이해하라고 내뱉는단 말인가. 아무리 정치인이더라도, 아무리 진영이 중요하고 권력이 중요하더라도 끝끝내 어떻게 이런 말을 서슴없이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이 나라는, 이 권력은 백성을, 민초를, 국민을, 민중을 조금이라도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단 말인가.
최소한의 합의라도 있었나
과정과 절차가 한일협정(1965) 때와 너무나도 똑같다.
① 지식인들의 신랄한 문제점 지적 및 비판
② 학생들의 격렬한 반발과 격렬한 데모
③ 그러나 전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함(1960년 4.19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1964년 다수의 국민은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았다. 왜? 생각보다 이에 대한 연구 결과는 적다. 그런데도,
① 한일 국교 수립을 위한 회담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수차례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1953년 구보다 간이치로의 망언은 최근에 들려오는 일본 극우파들의 망언과 거의 유사했다.
② 냉전의 엄혹한 현실은 모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는 반공을 국시로 하고 있었고, 북-중-소에 대응하는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야 말로 미국의 숙원 사업이었다.
③ 그 밖에 절망적인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는 박정희 정권의 차별성과 참으로 절망적이었던 가난의 문제 등등. 그래서인지 결국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강력하게 저항했던 6.3시위는 그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전국민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3억 달러를 받지 않았으면 우리가 어떻게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야당 정치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소간에 문제가 있었어도 그러한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돈을 받아올 수 있었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된 것 아닌가.”
기억은 참으로 편하다. 매번 떠들어대는 ‘공과 과’. 경제를 위해 돈을 빌려왔고, 그로 인해 우리가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 그러니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라고 한다. 대립하거나 상대가 되지 않는 주제를 상대적으로 분류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제대로 된 사죄와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을사조약을 비롯하여 한일협정 이전에 맺은 조약에 대해 ‘원천 무효’라고 확정하지 않았다. 원폭 피해자, 사할린 동포, 재일 동포, 위안부, 징병, 징용 문제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개인 청구권도 증발했고 독도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무합의가 합의라는 소리가 돌았고, 회담 중에 독도가 문제 되니까 회담을 주도하던 김종필이 직접 공수부대를 보내 독도를 폭파하자는 후일담이 돌기도 했다.
원폭 피해자가 5만이 넘고, 재일 동포가 50만이 넘고, 위안부가 5~20만으로 추정이 되고, 해외로 끌려간 징병, 징용 인구는 200만 정도로 짐작된다. 사할린 동포는? 국내에서 고역을 치렀던 사람들은? 왜 직접 아픔을 겪고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그들은 구체적으로 보상받거나 위로받지 못했는가. 그렇게 받아와서 벌려 놓았던 경제 성장이 과연 그들과 얼마나 상관이 있단 말인가.
새로운 경제정책과 3저 호황을 바탕으로 박정희 정권 때의 고물가-외채-무역 적자 문제 등을 해결한 것은 전두환 정권이고, 대규모의 노동자 임금 인상이 이루어졌던 것은 6월 항쟁 이후였다. 또한, 과거사가 기억되고 규명된 것은 경제 발전과는 전혀 무관한 노력이다. 그나마 국가적 보상이 이루어진 것 역시 과거 독재 정권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정치적 승리 때문 아닌가. 박정희 정권기의 경제 성장과 이후의 경제 발전 그리고 민족적 비애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은 단순하게 엮을 문제가 결코 아니다.
더구나 97억 원? 지금 이 나라가 그 정도 돈을 받아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절박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대체 이 돈, 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돈, 사죄의 명목도 아니고, 국가 보상이나 배상도 아니고, 온갖 조건이 달린 이 돈을 대체 이 풍요로운 나라가 왜 받아야만 한단 말인가.
위안부 문제는 결코 국내 문제가 아니다
심각하게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위안부 문제는 이미 민족의 범위를 넘어섰다. 세계사에 기록될 역사적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 보라. 나치를 처단한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도쿄 재판 등은 결코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대한 단죄가 아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파시즘 세력에 대한 단죄였을 뿐이다. 미국은 철저하게 이 지점에서만 보복을 했다. 이탈리아가 전쟁 중에 일으켰던 참상에 대해서는 죄를 물었지만 알바니아 등지의 식민지에서 일으켰던 죄악에 대해서는 조금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들이 아프리카나 인도에게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보상이나 배상을 해준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던가. 여전히 아프리카의 엘리트들은 자국의 비극을 뒤로하고 유럽 선진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고,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의 대다수 물품은 약탈 유물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위안부 문제만이 광범위한 국제적 지지를 얻으며 의미 있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단순한 일본의 만행이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의 죄악을 묻는 역사적 도전이고 과제이다. 위안부 문제는 한민족의 민족적 울분 뿐 아니라 아프리카 대지의 흑인 부족과 인도나 중동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해결 받지도, 보상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고통을 항변한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세계사적 목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이 원하는 대로, 기껏 해봤자 국가적 합의의 수준으로 줄어든다면 그것은 역사의 진보를 막고, 20세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벌였던 온갖 추악한 죄악을 덮어버리는 것이란 말이다.
위안부 문제는 여성 그리고 인권 문제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초기부터 일본의 여성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스즈키 유코나 우에노 지즈코 등은 이미 1990년대부터 각종 논문을 발표하며 일본 정부와 싸워왔고 최근에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진지한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중,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위안부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전락시키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가. 아무리 가혹한 상황이더라도 인권은 보호받아야 하지 않는가. 민족적 감성은 아니더라도 인류애적 감정과 양심에 기초한 이들의 진지한 분투에 대해 왜 한국 정부가 나서서 희롱한단 말인가.
더구나 가뜩이나 우경화된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야권은 지리멸렬하고 오직 시민사회의 고독한 저항만이 희망인 이때 한국 정부는 대체 무슨 선택을 했단 말인가. 이럴 거였다면 그 오랜 기간 동안 한국 정부는 왜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왜곡 등에 대해 그토록 비판을 퍼부었단 말인가.
중국을 보라
중국은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동시에 개인 청구 권리를 인정하고 지원하고 있다. 따라서 상당수의 중국인은 본인들이 당한 전쟁 피해를 일본 법원에 제소하고 있고 꾸준히 법적 보상을 받는 사례들이 생기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역시 최근의 흐름을 보면 한일협정의 제약을 해결하기 위한 온갖 노력이 진행되고 있고 작은 결실들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정부는 갑자기 ‘해결’을 도모했던가.
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가. 일본과는 온갖 문제들이 얽혀있고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는 한계들이 있다. 그런데도 지난 20년간 한일관계가 무작정 갈등만 해왔던가? 문제는 문제대로 존재했고, 타협하거나 합의할 것들은 그 나름대로 해결되지 않았던가. 한미동맹을 굳건히 유지하며 보다 실용적으로 발전시키는 것과 동아시아 역내 협력을 강화하고 한중일이 평화적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키며 북한과의 관계가 질적으로 개선되는 것은 결코 양립 불가능한 주제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이 G2라는 이름으로 여러 방면에서 으르렁대지만 두 나라만큼 깊은 경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중국에 투자된 미국 자본, 미국 마트에 가보면 쌓이고 쌓여있는 중국 제품들. 그리고 중국과의 대립을 강조하는 학자나 정치인만큼 협력을 강조하는 미국 학자나 정치인 또한 널리고 널려있지 않은가.
아베는 외할아버지가 그랬듯 동아시아 패권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과의 강력한 동맹체제를 간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활용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일본의 우익 진영이 모조리 아베식인가. 과거 요시다 계열이 철저하게 경제 성장만을 목표로 했다든지, 하시모토가 이끌었던 민주당 정부가 동아시아 외교에 대한 중요성을 김대중-노무현 정부 못지않게 강조했고 추구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일본의 보수 진영 역시 절대 단순하지 않다.
간단히 살펴보아도 복잡한 것이 현재의 동아시아인데 박근혜 정부는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서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기껏 미국과의 동맹 강화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려 하는가. 단순함은 때로는 모든 것을 궤멸시킬 수 있다.
일주일 내로 정대협은 종북 단체가 될 것이다
국정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커갈수록 동시에 종북 공세가 강화되었다. 심지어 논란의 절정에는 오직 한목소리로 종북을 외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 파문이 불거진 날 KBS 조우석 이사는 정대협을 ‘좌파 단체’로 매도하였다. 보수적인 기독교 연합 단체는 정부 합의를 옹호하고 나섰다.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인데 조만간 어마어마한 종북 좌파 공세가 시작될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도 종북이라고 몰아치지 않았던가.
위안부 문제를 문제라고 하면 종북 좌파가 되는 세상. 상상만 해도 몸서리 처진다.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는 정쟁을 넘어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황망한 현실을 단호하게 끊어내고 이겨내야 할 결기가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