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는 서기 2000년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했다. 가장 큰 변화는 한 해에 방영, 혹은 상영되는 애니메이션 작품의 수가 1980~1990년대에 비해 많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칭 애니덕후들이 “1980~1990년대 이후 일본 애니 업계는 크게 위축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굵직한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이 줄어든 것뿐이지 애니메이션 산업 자체는 오히려 더 성장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오면서 TV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상당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2의 일본 애니메이션 전성기’라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다. 극장판, OVA, TV 애니메이션을 포함해 2014년 한해 일본에서 상영된 애니메이션 작품의 총 개수는 682개, 2015년에 상영된 애니메이션의 총 작품 수는 무려 725개에 달한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줄어버린 현상과 이후 TV 애니메이션이 늘어난 배경은 나중에 따로 설명하겠지만 흔히 자칭 애니 덕후들이 이야기하듯 “작품성이 떨어지며 모에 요소만 충만한 애니메이션만 늘어”난 것은 결코 아니다. 매년 높은 퀄리티와 탄탄한 스토리로 무장한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등장했고, 개중에는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작품도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2000년대 이후의 일본 TV 애니메이션 중에서 개인적으로 ‘이건 정말 한 번쯤 꼭 봐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5개의 리스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리스트에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역시 훌륭한 애니메이션 5개도 더불어 소개한다.
꼭 봐야 할 2000년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5선
1. 암굴왕
- 巌窟王, 2004
2004년에 등장한 〈암굴왕〉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각색한 애니메이션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내용을 크게 각색한 일본판 버전을 SF로 재창조한 작품이다.
제작은 〈청의 6호(青の6号)〉, 〈라스트 엑자일(ラストエグザイル)〉 시리즈 등을 제작한 곤조(GONZO). 개인적으로는 곤조의 작품 중에서 가장 강렬하고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대작 TV 애니메이션이 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께 항상 추천해드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야기와 같되 주인공이 바뀌었다. 따라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점이나 사건을 관망하는 관점도 원작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무엇보다 몽환적인 작화와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멋진 사운드 트랙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점.
2. 에르고 프록시
- エルゴプラクシー, Ergo Proxy, 2006
2006년에 등장한 〈에르고 프록시〉는 2004년에 〈사무라이 참프루〉를 제작하며 화제에 오른 망그로브(マングローブ, manglobe)에서 제작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다. 상당히 난해한 스토리와 철학적인 테마를 가진 SF 작품. 세계가 멸망한 이후의 디스토피아를 다루는데 개인적으로 일본발 디스토피아 미디어 중에서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전반에 데카르트의 철학서인 『제 1 철학에 관한 성찰』(1641)의 주제가 짙게 깔렸으며 인간의 존재 이유와 자아에 대한 고민을 아주 어둡고 짙게 묘사한다. 작품 내에서 인류가 멸망한 뒤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원하기 위해 탄생한 인공의 생명체들에게 감염되는 ‘코기토 바이러스’라는 소재가 등장하는데 이 어원 또한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따온 것이다.
국내에선 정식 방영하지 못했고 일본 내에서도 상당히 호불호가 갈린 작품이라 흥행에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북미 및 유럽에서는 큰 호평을 받았다. 해외 애니메이션 관련 이벤트 등에서 이 〈에르고 프록시〉를 코스프레하는 참가자들을 많이 볼 정도. 사운드 트랙이 대단히 좋다. 특히 엔딩 테마 곡은 라디오 헤드의 〈파라노이아 안드로이드(Paranoia Android)〉.
3. 전뇌 코일
- 電脳コイル, 2007
증강현실과 현실 세계가 겹친 세계관을 가진, 상당히 미래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비슷한 주제의 〈공각기동대〉가 한없이 침울하고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의 이야기라면 〈전뇌코일〉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하며 명랑한 아이들의 세계를 그려낸다. 2007년에 NHK의 교육 TV에서 방영한 작품으로 제29회 일본 SF 대상, 제7회 도쿄애니메이션 어워드 TV애니메이션 부문 우수상, 제39회 세이운상을 휩쓸었다.
특히 쇼와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어른들도 충분히 공감할만한, 어릴 적의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에피소드로 가득하면서도 최첨단 테크놀로지와 미래적인 장치들을 아낌없이 등장시켜 독특한 매력을 자아낸다. 철부지 같은 아이들이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한다는 정통 어드벤처 요소도 가지고 있다. 캐릭터 중심의 스토리가 아닌 스토리 구조가 우선이며 등장인물들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식의 연출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소위 ‘모에 요소’가 빠져 있는 것도 아니다. 풍부한 표정 연출과 각종 패러디 또한 다양하게 삽입되어 흥미를 돋운다. 모에를 부각한 연출을 다양하게 볼 수 있으나 과도한 연출을 자제해 보기 편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미래를 다루는 일본 애니메이션 상당수가 꽤 암울한 시대상을 그려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은 세계관을 가진 몇 안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4. 쿄소기가
- 京騒戯画, 2013
2013년에 TV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한 〈쿄소기가〉는 일본의 게임/완구 메이커인 반프레스토(BANPRESTO)와 일본 굴지의 영상 매체 업체인 도에이(東映, Toei)의 합작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기 전 파일럿 프로젝트로 일본의 동영상 사이트인 니코니코동화에서 2011년 1탄을 방송하고 2012년 4분기에 다시 2탄이 방영된 후 스토리와 설정을 약간 변경해 2013년에 다시 방영한, 다소 특이한 내역을 가진 작품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일본의 도시 교토이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교토는 우리가 아는 그 교토가 아닌 교토의 모습을 재현한 거울 세계, 즉 경도(鏡都)라는 가상의 공간이다. 참고로 교토와 경도의 발음은 모두 ‘교토’다. 우리 식으로 읽어도 ‘경도’로 같다는 점이 재미있다. 거의 동시기에 나온 피에이웍스(P.A.Works)의 애니메이션 〈유정천가족〉과 더불어 교토를 테마로 하는데 〈유정천가족〉이 ‘여러 모습으로 둔갑하는 너구리’ 설화에 기초를 둔 작품이라면 〈쿄소기가〉는 불교 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의 내용과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화엄종 승려였던 묘에이에 얽힌 설화가 바탕이다.
배경은 이러하지만 내용은 그리 난해하지 않다. 기억을 잃은 한 소녀를 중심으로 가족 간의 사랑이란 무엇인지 고찰하는 내용으로, 현란한 그래픽과 실험적인 요소들을 다분히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스토리로 구성되었다. 이 작품의 의의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의 제작을 고수해온 일본 굴지의 영상업체가 처음으로 외도를 한 작품이라는 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 중에 하나다.
5. 4월은 너의 거짓말
- 四月は君の嘘, 2014
‘음악을 통한 인연’이라는 주제의 작품은 과거에도 상당히 많았다. 클래식을 매개로 다룬 〈노다메 칸타빌레〉가 그러하고 〈금색의 코르다〉 또한 음악을 생업으로 삼는 학생들의 콩쿠르 활동을 통한 고민을 그렸다. 〈언덕길의 아폴론〉에선 재즈를 통한 남자아이들의 우정을 다루었고 〈벡(BECK)〉에선 소년들의 성장 과정을 맛깔나게 그려냈다. 〈케이온!(K-ON!)〉’처럼 가벼운 일상물에 음악이라는 부수적인 요소를 더한 작품이 있었는가 하면 전형적인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 장르에 클래식부터 헤비메탈까지 총망라해 매니아적인 요소를 가미한 〈안녕 피아노 소나타〉도 있다. 〈울려라 유포니엄〉 또한 음악을 통한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2014년 4분기부터 방영이 시작되어 2015년 1분기에 종영된 〈4월은 너의 거짓말〉도 클래식과 보이 미츠 걸을 엮은 작품이다. 원작은 2011년 연재가 시작되어 2015년 3월에 완결된 동명의 코믹스다. 재미있게도 코믹스 완결 시기와 애니메이션의 종영 시기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그래서 만화를 읽고 눈물을 펑펑 흘린 독자들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다시 한번 오열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때 신동 피아니스트로 주목을 받았지만 어머니 사후에 트라우마가 생겨 피아노를 더는 칠 수 없게 된 중학생 소년과 바이올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병원 신세를 자주 지는 병약한 소녀의 사랑 이야기다.
기본적인 플롯 자체는 전형적인 보이 미츠 걸이고 결말 또한 뻔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여느 작품에 비해 탁월하며 이를 한층 돋우는 스코어의 선곡이 훌륭하다.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갈등과 우정과 사랑 이야기를 매끄럽게 잘 표현해낸다. 혹자는 “요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에는 드라마틱한 요소가 없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 일본 애니메이션의 드라마성은 이전보다 훨씬 풍부해졌다. 그 집대성이라 할만한 작품 중에서도 빼어난 작품이 바로 〈4월은 너의 거짓말〉이다.
코믹스의 경우 작중에 등장한 곡들을 CD로 발매하고 여기에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서비스했다. 애니메이션은 실제 연주자들의 연주 상황을 촬영하거나 거장들의 연주 장면을 바탕으로 제작했는데 퀄리티가 대단히 압도적이다. 클래식을 좋아하거나 순정만화를 좋아하면 무조건 봐야 한다. 특히 “노다메 칸타빌레 이후 음악을 매개로 한 애니메이션 중 쓸만한 게 없다”고 주장하는 자칭 덕후라면 절대적으로 보아야 할 작품이다.
더 보고 싶다면 추천하는 작품 5선
1.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 ブギーポップは笑わない, Boogiepop Phantom, 2000
일본의 라이트 노벨 작가 카도노 코우헤이의 초도작이자 대표작. 일본 라이트 노벨계의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최초의 작품. 애니메이션은 상당히 괴기한 분위기다.
2. 위치 헌터 로빈
- ウィッチハンター ロビン, Witch Hunter Robin, 2002
앞서 소개한 〈에르고 프록시〉의 감독 무라세 슈코가 감독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일본에선 그리 크게 흥행하지 못했지만 북미 지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실사판 드라마화를 하려는 시도까지 있었을 정도.
마녀라는 존재와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재해석, 아름다운 사운드 트랙과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연출이 압권이다. 여담으로 무라세 감독은 사무라이 참프루에서 액션 장면을 담당한 인물이다. 그의 수완은 〈갱스타.(GANGSTA.)〉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3. Darker Than Black -흑의 계약자-
- Darker Than Black -黒の契約者-, 2007
〈Darker Than Black〉 시리즈의 첫 작품. 이상 현상으로 인해 지구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린 인류 사회에 등장한 ‘계약자’와 ‘돌(Doll)’이라 불리는 능력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본적으로 SF지만 미래적인 메카나 무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깔끔하고 절제된 액션을 선보이는 작품.
액션이 등장하는 씬은 마치 왕년의 홍콩 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다. 무수한 떡밥을 뿌려놓지만 작품 전반에서 그걸 회수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액션 하나는 만점이다.
4. 신세계에서
- 新世界より, 2012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에 속지 말길. 2008년에 출간된 기시 유스케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일부러 캐릭터 디자인을 귀엽고 모에하게 그려냄으로써 원작이 가진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더 무섭게 연출한 수작이다. 인류 사회가 멸망한 후 1,000년 뒤의 세계를 다룬다. 제목의 모티브는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1악장과 2악장.
소설을 먼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애니메이션은 분량상 소설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복선과 내용을 커버해주지 못한다. 단 소설을 읽고 난 다음에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 상당한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은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을 들을 때마다 이 작품이 연상될 것이다. 후후후.
5. 잔잔한 내일로부터
- 凪のあすから, 2013
작화 붕괴가 존재하지 않는, 그러니까 제작할 때마다 애니메이터들을 말 그대로 ‘갈아 넣는’ 신공을 발휘하는 피에이웍스의 2013년 작품이다. 바닷가 동네에 대개 존재하는 ‘해신’에 관한 설화를 바탕으로 소년소녀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바닷속에서도 살았다’는 배경 아래 바다 사람들은 뭍에 나오면 태어날 때부터 가진 표막에 의해 수분이 일정 기간 유지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는 재미있는 설정이 있다.
기본 플롯은 이렇지만 상세하게 파고들면 도시 사람들과 시골 사람들 간의 불화, 전통적인 삶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 기후에 대한 경계심도 엿볼 수 있다. 피에이웍스 특유의 화려한 그래픽으로 보는 내내 눈이 즐겁기도 하다. 등장하는 모든 이동수단이 3륜차라는 것도 특이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