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12월 5일 동아일보에는 대표적인 친 안철수 인사로 분류되는 한상진 명예교수의 글이 실렸다. 민주당 문재인 지도부의 제멋대로 독주와 탐욕이 당을 파멸시킬 것이며, 문재인은 꼴불견이고, 김상곤 혁신위의 혁신안은 함량 미달이므로 민주당을 일단 붕괴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저주에 가까운 언어들은 일단 걷어내보자. 한상진 개인의 막말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니니. 이 글에서 한상진 ‘명예’교수가 김상곤 혁신안을 함량 미달로 규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이 안으로 당을 혁신해야 한다는 의견이 22.2%, 새 혁신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41.0%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혁신안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2.
시계를 조금 더 뒤로 돌려보자. 한상진은 2012년 대선 패배 원인을 진단하는 민주통합당 대선평가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안철수 캠프 인사였던 그가 어째서 위원장 자리를 맡았는지 그 속사정이야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문재인 정계 은퇴를 요구하던 그가 왜 문재인의 패배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할 자리에 앉았는지도 나는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름있는 논객들을 중심으로 한상진이 알고보면 편향적인 인사가 아니며, 그를 편향적이라 꾸짖는 것은 친노야말로 편향되었다는 증거라 변호하기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토록 중립적인 그가 일 년 반 만에 저런 동아광장 같은 글을 썼는지도 나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기실, 정계의 내밀한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 자부하며 “너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말씀하시는 그분들이 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준다면 좋으련만.
뭐, 사실 이건 부수적인 문제다. 사실 안철수 캠프 출신 인사고 뭐고, 이 대선평가보고서를 읽고 든 생각은 이러했다. 대체 어떻게 이토록 중요한 문서가 이토록 실속없이 쓰여질 수가 있는가. 어떻게 일개 필부조차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가.
3.
이 방대한 보고서의 거의 대부분이 대선 이후에 치러진 여론조사에 기대고 있었다. 대선 사후 왜 진 것 같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서는, 거기서 높은 응답을 얻은 항목이 바로 대선 패배의 원인이었다고 규정하는 식이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이 그것이 곧 현실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 70년대 경제 부흥을 이끈 독재자 박희정의 딸 박혜근 씨가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대선 사후 박혜근 씨가 왜 당선되었는지를 여론조사로 묻는다면, 사람들은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원칙을 지키는 성격… 따위의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사실 박혜근 씨를 당선시킨 가장 큰 원동력은 그의 어머니가 박희정 씨라는 점이겠지만, 누구도 여론조사에서 “엄마가 박희정이라서”를 그의 대선 승리 요인으로 꼽지는 않는다.
여론조사엔 편향이 낄 수밖에 없다. 하물며 사후에 이뤄진 여론조사라면, 응답자들이 결과에 이유를 끼워맞추는 일도 다반사다. 정치적 이슈에 대한 여론조사라면 자신의 진짜 생각보다 그저 있어 보이는 답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인종차별 문제가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서 인종에 따라 인간을 차별해도 좋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따라서 여론조사의 설계는 편향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매우 정밀하게 이뤄져야 하지만, 이 보고서는 심지어 편향적인 답변을 유도하기까지 한다.
보고서는 486의 권력화를 지적하고, 국가보안법과 사학법 등을 소모적 이념공방으로, 한미 FTA 반대 등을 정당과 사회운동의 차이를 혼동하는 집합행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민주당의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검증하겠다며 설문조사를 제시한다.
“(계파정치, 진영논리, 이념노선, 486 정치인이) 민주통합당의 인기(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부정적인 이미지의 단어들로 포장을 해 놓고, 그 이미지가 좋은지 나쁜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누가 저런 질문을 보고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대답을 한단 말인가. 저 질문이 정말로 국가보안법과 사학법 논쟁, 한미FTA 반대, 486 정치인 등이 민주당의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을 증명하는가? 전혀 아니다.
4.
한상진이 혁신안의 실패를 규정하며 여론조사 결과를 그 근거로 제시했을 때, 그가 주도하여 만든 대선평가보고서가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이건 분석이라 하기에도 낯부끄럽다. 이미 결론을 내 놓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론조사라는 방식을 갖다붙이는 것이다. 혁신안도 마찬가지다. 정당 내부 혁신안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들이 접하는 정보는 대부분 혁신안을 두고 파열음이 나고 있다는 것 정도다. 이 상황에서 혁신안에 대해 여론조사를 벌이는 것이 정말 혁신안의 시비를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여론조사가 만사를 판단하는 마법의 검 노릇을 한 지도 오래 되었다. “국민의 뜻을 묻자” 하면 곧 여론조사 결과를 따르자는 얘기나 진배없다. 하지만 여론조사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여론 자체도 흔들리기 마련인데 하물며 여론조사엔 두터운 편향까지 끼기 마련이다.
5.
작금에 진짜 필요한 건 “여론조사를 따르지 말자”는 과감한 결단이다. 국민의 뜻을 따르자는 건, 말은 좋지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 저관여층이라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자스민에 대한 혐오로 대변되는 제노포비아적 감수성에서 볼 수 있듯, 여론이 늘 옳은 건 아니라는 사실에도 굳이 눈을 감는 것이다.
그 한계를 극복하고 민의를 주도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주하지 않고 민의를 반영하는 것, 그게 정치인의 역량일 것이다. 어찌 그리할 것인가, 그건 아마 식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지리한 논쟁을 벌일 만한 주제일 것이니, 나 따위가 굳이 입을 보탤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난 그저, 적어도 여론조사란 허울 좋은 방패 뒤에 제 본심을 감추는, 국민의 뜻만 내세우고 그 음흉한 본심을 감추는 그런 가짜 정치인들만은 보고 싶지 않다. 그 말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