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라이팅이라곤 제대로 공부해 본 적 없는 보통의 신입사원이 입사했습니다. 대뜸 토익 성적을 물어보더니 영문 메일을 작성하라고 합니다. 작성하여 보고했더니, 토익성적은 그렇게 높은데 영문 메일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느냐며 타박이십니다. 오기가 생겨 퇴근길 서점을 둘러봐 영문 메일 작성에 관한 책을 몇 권 샀지만, 도통 키보드의 손가락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머릿속도 마음속도 양초처럼 타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위의 예는 직장인 누구나가 영문 메일을 처음 접했을 때 느끼는 상황과 감정일 것입니다.
필자는 공대를 나와 대기업 군에서 8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8년 중 최근 5년을 해외업무를 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해외업무를 하며 처음 맞닥뜨린 장애물이 바로 이 영문 메일 작성이었습니다. 참고로 저의 경우, 토익은 대략 900/990 정도, 토익 스피킹으론 180/200 정도의 영어 실력으로 높다고 하기에도 낮다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실력입니다. 하지만 영문 레터를 작성하여 해외 관련 업체와 하루에도 수백 통의 메일을 주고받으며 일을 큰 무리 없이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강의를 따로 듣지 않아도 영문 레터를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영어로 누굴 가르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영문 레터를 처음 접했을 때 답답했던 마음을 기억하며, 사수가 부사수에게 알려준단 생각으로 글을 씁니다. 부디 상기 사례와 같이 답답한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영문 레터의 A to Z는 아웃룩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은 사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본인 랩탑에 고요히 잠자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니, 그 이름하여 ‘아웃룩(Outlook)’입니다. 아웃룩으로 메일 설정을 하고 영문 레터 작성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스펠링 체크
아웃룩은 기본적으로 워드와 포맷이 비슷합니다. 따라서 스펠링 체크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 철자나 띄어쓰기가 잘못되면 자동으로 수정해줍니다. 아울러 어정쩡한 스펠링을 대충 치고 마우스 오른쪽 키를 누르면 내가 생각했던 단어가 뜹니다. 그럼 그냥 그걸 누르면 됩니다.
저장 기능
아웃룩은 이메일을 별도의 확장자로 저장시켜 줍니다. 마치 .xls 파일이나 .ppt 파일같이 그냥 폴더에 넣어두면 됩니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훗날 중요한 이메일을 다시 열어보거나, 샘플이 될만한 이메일을 폴더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문 메일에서 저장 기능이 중요한 이유는 계약적, 법리적 이유도 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문서를 중요시하므로 지금 보내는 영문 메일이 훗날 법정이나 중재 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2. 일단 샘플 레터를 찾아라
아웃룩을 설치하고 이제 메일 창을 열었으면 어떤 글자로 시작해야 할지 애매합니다. ‘To?, Dear?’ 머리가 벌써 하얘집니다.
이때 래리 페이지가 준 선물, 크롬을 열어 봅니다. 일단 크롬 창을 띄우고 주소창에 타이핑하기 시작합시다. ‘Sample letter for requesting’이라고요. 그럼 지구 반대편의 다양한 분들이 친절하게도 샘플 레터를 무수히 많이 만들어 놓은 게 보입니다. 일단 눈으로 스윽 한번 훑어보고, 대충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이랑 비슷한 레터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위아래의 형식을 일단 맞춰주고 시작합니다.
Dear Mr. OOO
I am writing to request a re-scheduling of “my interview appointment” with your esteemed company which was scheduled on “May 19th 2010 at 5 pm”.
대략 느낌이 오시나요? 위에 예문은 구글 신이 내려준 아무 예문이나 긁어 온 것인데, 큰따옴표 부분만 바꾸면 우리 회사의 제 메일이 될 수 있겠죠?
좋은 문장 훔쳐오기
좋은 문장을 작성하려면 좋은 문장을 훔쳐와야 합니다. 메일을 쓴다는 말은 곧 상대편에서도 회신이 온다는 뜻이겠죠? 좋은 문장 훔쳐오기에 아군 적군 구별 없습니다. 상대방이 대략 앵글로 색슨인 데다 배울 만큼 배우고 이 바닥에서 경력이 좀 된다면 그 메일은 어느 정도 표준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합니다. 종종 책에서 설명해주는 양식은 유행이 한참 지난 형식의 메일이나 문장인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 바닥의 현재 실력자의 문장을 가져와 엑셀로 따로 정리해 둔다면 나중에 메일 작성 시 Ctrl+F로 휙휙 찾아 쓰기 편합니다.
저의 경우엔 운 좋게 해외에서 일할 때 같이 일하던 영국인 변호사와 필리핀 철학박사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물론 그들도 영어강사로 월급 받는 건 아니므로 저에게 따로 친절히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메일초안을 대강 만들어서 문법 틀린 것 좀 봐달라고 하면, 아마 그들은 내가 이런 거 하려고 여기서 일하느냐고 되물을 것입니다. 제가 사용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일단 메일 초안을 작성해서 가져가고 말을 건네지요.
“내가 이러 이러한 문제가 있어서 메일을 작성하긴 했는데, 논리적으로나 법리적으로 조금 취약해 보인다. 너의 도움이 필요한데, 한번 봐줄 수 있겠니?”
절대 영어가 부족해서 검토를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논리나 법리를 물어본다는 핑계를 대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제 메일의 얼개를 검토하고, 종종 보이는 minor miss도 체크를 해줍니다. 영어는 남의 언어입니다. 남의 언어를 배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따라 하기입니다. 이게 스피킹에선 mimicking이고 라이팅에선 필사이지요. 부디 좋은 문장 많이 가져오셔서 내 문장으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3. 영어로 생각하라
가끔 공무원이나 나이 지긋한 분들이 저에게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공문서 양식을 주시며 영문 레터를 작성하라 하십니다. 영어는 영어로 생각해야 합니다. 한글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영어로 옮길 생각을 하면 비문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보고하는 상사는 이해하겠지만, 정작 레터를 받은 외국인은 뭔 말인지 이해를 못 합니다.
영어는 잘 못 하는데 영어로 생각하라니, 참 앞이 막막하시죠? 그러나 우리에겐 다음/네이버 영어사전이 있습니다. 물론 영어를 능숙히 하신다면 옥스퍼드 사전 같은 데서 검색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런 능숙자는 이 글을 진즉에 읽다 마셨을 테니 일단 다음 영어사전을 기준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동사
중학교 때부터 귀가 빠지도록 들었던 얘기가 자동사, 타동사, to 부정사, 동명사 등등입니다. 영어는 왜 그리 동사의 형태가 다양한지요. 물론 머릿속에 4형식 동사, 5형식 동사 등이 남아있다면 바로 글쓰기에 시작해도 되겠지만, 우리 직장인들의 머릿속은 이미 백지장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때 사용해야 하는 것이 다음 사전 예문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동사를 검색해 보고, 적절한 예문을 따다 쓰는 게 영문 레터 작성의 첫걸음입니다. 물론 영문 레터를 자주 쓰다 보면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이런 과정을 조금 덜 하게 되긴 합니다. 그러나 처음 2~3년은 계속해서 예문 찾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동사의 쓰임과 영국인이 생각하는 동사의 쓰임은 분명 다릅니다. 특정 동사 뒤에 명사가 와야 하는지, 전치사가 와야 하는지, 특정 의문사 뒤에 주어 동사는 어떻게 배치되는지 대강 보고 따라 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4. 그래도 공부는 하자 – 마무리
상기 언급한 방법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 얼개가 잡힌 영문 메일은 작성됩니다. 그리고 몇 달 안에 쉽게 쉽게 메일이 써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업무에 큰 부담을 느끼지도 않지요. 제가 일했던 중동의 해외 건설현장에서도 수많은 한국 분들이 계십니다. 다들 영어로 의사소통하고 메일을 주고받는 데 큰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토익이나 토익스피킹 시험을 보면 생각보다 상당히 낮은 점수를 받으시곤 합니다. 엉터리 영어일 확률이 높습니다.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므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내가 정통 영어를 쓰던 엉터리 영어를 쓰던 친한 사람들과 일할 때는 의사소통에 부족함이 없지요. 하지만 외국 바이어나 발주처와 본격 협상 테이블이나 계약서를 준비하는 등의 중요한 자리에선 엉터리 영어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고급영어를 구사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처음부터 무시당할 수 있고, 나아가 계약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영어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고 영문 메일을 유창히 쓴다 하더라도 영어성적이 낮다면 뭔가 문제는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Affect/Effect, Complement/Compliment, Extend/Expand, Client/Customer, Corporation/Cooperation 등은 공부하지 않으면 쉽게 구별하여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참고로 저와 같이 근무하는 미국 국적의 선배는 한 번도 토익이나 토익스피킹 공부를 해 본 적 없지만, 회사에서 보라고 해서 봤더니 990/200점을 취득했습니다. 맞습니다. 영어시험과 영어 실력의 관계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충분조건이긴 합니다. 즉, 영어시험 점수가 높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영어를 잘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영어점수가 높아야 합니다. 자신은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점수가 낮다면 그 사람은 잘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앞서 밝혔지만 그다지 이런 글을 쓸 만큼 엑셀런트한 영어점수를 보유하고 있진 않습니다. 다만 공대 나온 기술직이라면 영어를 완벽히 만들 시간에 내 기술을 하나 더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게 낫다는 변명이 있긴 합니다. ^^ 부디 영어로 업무를 계속하신다면, 꾸준히 공부도 하시어 훌륭한 영문 메일을 작성하시는 직장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원문 : 퀘벤하운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