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가디언 지에 실린 기사 「Matthew Crawford: ‘Distraction is a kind of obesity of the mind’」를 번역한 글입니다.
3월의 어느 화창한 하루, 버지니아의 리치몬드 남쪽에 지어진 벽돌 차고 밖에서 우리는 크로포드를 만났습니다. 한때 워싱턴의 싱크탱크 소속이었던 그는 사무실 속의 삶에 환멸을 느낀 후 오토바이를 정비하는 일로 돌아섰습니다. 2010년에 출간된 그의 첫 책인 <손을 써서 일한다는 것>는 손을 써서 하는 작업의 가치를 찬양하는 드문 작품으로서 21세기 버전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 비견될 만합니다.
“우리는 진짜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반영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대개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의도된 것들이죠. 비디오 게임이나 포르노, 모바일 게임이 그런 거죠.”
그는 말합니다.
“거기서 얻는 경험이 너무나 정교하게 우리 취향을 겨냥한 탓에 세상이 주는 일상성을 앗아가 버리는 겁니다.”
식품공학자가 지방과 소금과 설탕을 적절히 섞어 미각을 자극하는 가공식품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미디어도 우리 정신이 쉽사리 저항할 수 없는 자극물을 만들어내는 데 전문가나 다름없습니다. 과다한 자극은 마음의 비만을 부르며, 이는 실제 비만 못지않게 우리에게 해롭습니다.
크로포드만이 이 사실에 대해 걱정하는 건 아닙니다. 직장인들은 이메일에 치여 지낸다고 불평합니다. 어떤 연구는 단순히 스마트폰이 탁자 위에 놓인 것만으로 주의가 흐트러진다는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가 지루할 때 주머니 속 까맣고 네모난 물체가 주의를 끌어당기는 건 모두가 잘 아는 현상이죠. 오늘날의 사람들은 진정한 사물이 아닌, 사물의 ‘반영’과 대신 관계 맺음으로써 사회와 세상의 본질을 놓치게 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크로포드는 말합니다. 그 사례로 그는 자신이 다니던 체육관의 예를 듭니다.
“이젠 아무도 체육관 같은 공용공간에 마련된 스피커에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지 않습니다. 각자의 이어폰으로 각자의 노래를 듣는 게 훨씬 자연스럽게 돼버린 거죠. 한번은 세어보니 텔레비전 화면이 서른여덟 개나 있더군요. 체육관은 본디 사회적인 공간이었지만 이제 그런 성격은 거의 사라졌죠. 그런 공용공간에서 맺는 관계는 대개 갈등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가능해집니다.”
크로포드가 제안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주의를 방해받지 않을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공공장소의 소음과 산만함을 규제하는 것 이상으로,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만드는 특정 장소(도박장이나 카지노 등)들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으로, 크로포드는 (손을 사용한) 기술의 연마야말로 세상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더 나은 수단이라 주장합니다. 요리사나 아이스하키 선수 혹은 오토바이 레이서처럼 ‘물질적’ 현실에 관여하도록 강제하는 직업은 좋은 사례입니다.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의 반영은 고속주행 시 전해져오는 아스팔트의 감각이나 얼음 위로 하키 퍽이 미끄러져 가는 느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죠.
“세상 속 진짜 사물과 맺는 관계에 비하면, 스마트폰이 주는 제조된 경험은 단지 얄팍한 대용품에 불과하다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그는 말합니다. 물론 모두가 요리사가 되기 위해 르 코르동 블루로 향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판단력을 제대로 활용할 길을 찾아내는 겁니다.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자극에 지속해서 저항하는 일은 지칠뿐더러 정말 중요한 대상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보다는 한 가지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습득한다면, 다른 것들로 주의를 돌리는 일도 훨씬 쉬워집니다.
원문 :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