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mosaic에 실린 「The male suicides: how social perfectionism kills」를 번역한 것입니다.
마침내 드러몬드는 그가 꿈꿨던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어렸을 때 사립학교 입시에 떨어진 이후로 그는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불합격은 당시 제약회사의 연구원이었던 그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때까지 어린 그에게 그만한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와 따로 놀아주지도 않았고, 그가 못된 장난을 쳤을 때에는 그의 엉덩이를 때렸을 뿐입니다. 그 시절의 아버지는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사립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집앞을 지나갔고, 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드러몬드는 그가 자라난 그런 완벽한 마을의 학교 교장이 되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공일과 미장일을 배우는 기술학교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진로 상담선생님은 그가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자 웃음을 겨우 참았습니다. 그러나 드러몬드에게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선생님이 되었고, 어린 시절의 연인과 결혼했으며, 마을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갔습니다. 아이 셋의 아버지가 되었고, 자동차 두 대를 가졌습니다. 적어도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작은 방에 앉아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충동성, 자신만의 생각에 빠지는 것, 낮은 세로토닌 수치, 사회적 문제 해결능력의 부족 등 자살 위험을 높이는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 국제 자살연구소의 로이 오코너는 지난 20년간 어떤 심리적 상태가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지를 연구했습니다.
“그 뉴스 봤어요?” 그를 만났을 때 그가 한 질문입니다. 그날 아침 뉴스에는 2013년 영국에서만 6,233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습니다. 2007년 이래 여성의 자살률은 일정했지만 남성의 자살률은 계속 증가해 2001년 이래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10건의 자살 중 거의 8건이 남성이며 이 비율은 지난 30년동안 계속 올라갔습니다. 2013년 20~49세 남자들의 사망요인 중 가장 높은 것은 자동차 사고나 마약 남용, 심장병이 아닌 바로 자살이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남자는 여자보다 더 많이 자살합니다. 왜 그럴까요? 남자라는 사실과 자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또, 적어도 영국에서는,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연령대가 중년의 남성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들의 자살률이 계속 올라가는 이유는 왜일까요?
자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정신질환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은 조심스럽게, 만약 자살을 예고하는 한 가지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정신질환, 특히 우울증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우울증을 앓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살을 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자살을 택하는 비율은 5%도 채 되지 않습니다. 즉, 정신병이 자살의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심리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는 어떤 심리적 상태가 결국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지를 파헤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트네이블 왕립병원에 있는 오코너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글래스고 대학의 첨탑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습니다. 선반에는 “자살의 이해(Comprehending Suicide)”, 케이 레드필드 제미슨의 광기에 대한 기록, “들뜬 정신(An Unquiet Mind)” 같은 어두운 분위기의 책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오코너의 자살행동연구소는 이 병원에 입원한 자살에 실패한 이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살을 시도한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이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기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조사합니다. 또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내성이나 스트레스에 대한 인지능력의 변화 등을 실험하기도 합니다.
수년 간의 연구 끝에 오코너는 스스로도 놀랄만한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살의 원인에 사회적 완벽주의(social perfectionism)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왜 남자들이 그렇게 많은 자살을 감행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드러몬드는 스물 두살에 갈색 눈의 리비와 결혼했습니다. 1년 반 후 그는 아빠가 되었고 곧 자식은 두 아들과 딸 하나로 늘어났습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낮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밤에는 술집에서 바텐더를 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볼링장에서 일했습니다. 토요일 낮에 잠시 눈을 붙인 후 토요일 밤에는 다시 볼링장을 가야 했습니다. 일요일 낮에는 술집에서 일했고 월요일부터는 다시 학교에 나갔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지낼 시간이 충분치 않았지만 그에게는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는 일을 하는 사이사이 교장이 되기위한 자격 시험을 위해 공부했습니다. 그의 야망과 함께 그의 처지도 나아졌습니다. 그는 더 큰 학교에서 자리를 얻었고 더 큰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성공적인 리더이자 완벽한 남편으로 느낄 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회적 완벽주의자
사회적 완벽주의자(social perfectionist)는 자신이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역할과 책임을 면밀하게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만약 좋은 아버지나 좋은 형제가 되지 못한다면 이들은 다른 사람을 실망시킨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와는 무관하게 말이지요.”
오코너는 미국 대학생들에 대한 연구에서 이 사회적 완벽주의를 처음 보았습니다.
“나는 그 결과들이 미국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이곳 영국 사람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글래스고의 가장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에게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2003년 이들은 22명의 자살시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지문 중에는 “성공이란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내가 완벽할 것을 기대한다”와 같은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계층에서 사회적 완벽주의와 자살의 연관성을 발견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 연관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완벽주의자가 실패에도 더 민감하기 때문에 자살에 더 쉽게 이르게 된다는 가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 실패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역할에 대한 실패인지를 물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일까요? 아니면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의무일까요?
“오늘날 사회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자들은 다양한 역할을 해야합니다. 남자들에게 더 많은 기대가 있고, 따라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이 실패라고 생각할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요.”
심화되는 기대와 경쟁, 한국의 모습
다른 사람의 기대와 그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느끼는 열패감의 영향은 오늘날 자살률이 급격히 올라간 아시아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살률이 높은 한국이 그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2011년의 조사 결과 한국에서는 하루 평균 4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14년 정부 산하 한국 건강증진재단 조사에 따르면 10대의 절반 이상이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생각해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하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김의철 교수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의 이면에 급격한 성장과 도시화가 낳은 고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60년 전 한국은 지구 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한국을 2010년 대지진을 겪은 아이티에 비유합니다. 대부분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오늘날 90%가 넘는 비율로 도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2,500년간 지속되어오던 유교의 영향을 받은 소규모 농경 사회에 적절한 가치관과 문화를 붕괴시켰습니다.
“협력과 협동이 중요했습니다. 서로 돌보고 나누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삶은 치열한 경쟁과 성과 중심이라는 말로 대표됩니다. 성공의 개념이 뒤바뀐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지위, 권력, 부가 곧 자신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문화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런 변화가 나타났나요?
“농사를 짓던 유학자들은 매우 현명했으나 동시에 가난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었고, 결국 근본 없는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죠.”
그는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또한 성공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길며 이는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입시에 실패한 10대는 자신의 인생을 실패한 것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존중 받는 기업은 삼성입니다.” 그들은 신입사원의 80-90%를 단 세 군데 대학에서 뽑습니다. “만약 그 세 군데 중 하나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대기업에 입사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집니다.” (다른 영문 자료들을 볼 때 그의 이 말이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중앙일보의 한 기사는 삼성이 특정 대학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임을 말해줍니다.)
학생들이 그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뛰어난 학생은 교사와 부모, 친구들로부터 존중을 받습니다. 인기를 끌게 되고 이성으로부터도 호감을 얻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이 정도 수준의 완벽함을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엄청납니다. “자존감, 사회적 존중, 사회적 위치 등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패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드러몬드는 아르바이트와 공부외에도 다양한 자원봉사활동을 했고, 이는 가족과 보낼 시간을 더욱 줄였습니다. 리비는 그가 너무 일을 많이 한다고 불평하곤 했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느낌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자신의 경력에 더 관심을 가진 것 같아요.” 학교를 바꿔가며 자주 이사를 다녔지만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드러몬드가 그녀의 부정을 처음 발견한 것은 그가 지역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 여성이 그에게 편지 뭉치를 건넸습니다. “당신 아내가 내 남편에게 보낸 편지예요.” 그들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편지들은 리비가 그 남자에게 완전히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드러몬드는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만났습니다. 리비는 그들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편지들은 모두 그녀가 직접 손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들이 그 남자의 집 근처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집 근처로 차를 몰고가 그의 집 밖에서 한 번이라도 그를 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몬드는 리비와 헤어질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렸고, 그녀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드러몬드는 주말을 이용한 강좌를 듣기 위해 종종 집을 비웠습니다. 하루는 그가 돌아왔을 때 리비의 차에 사고가 나 있었고 동네 경찰이 휠을 갈아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가 매우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뒤, 11살 난 딸은 그에게 울면서 엄마가 그 경찰과 침대에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리비의 다음 연인은 제약회사의 세일즈맨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때 실제로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2주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드러몬드는 이 모든 일을 그저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일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도 없어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부인이 바람을 핀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기 힘든 그런 종류의 일입니다. 리비는 드디어 결별을 원했습니다.
그들이 결국 이혼했을 때, 리비는 집과 아이들, 그리고 다른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드러몬드에게 남은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학교의 누구도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드러몬드는 여전히 성공적인 교장이자 귀여운 세 자녀를 둔 존경스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의 이혼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직원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이 떠났다고요?”
그 당시 그는 마을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농장의 난방이 되지 않는 작은 방을 빌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자로서 자신의 위신이 떨어졌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파산했습니다. 그는 부인을 바람나게 한 남자이자 다른 이의 기대를 저버린 남자로서 자신이 인생에 실패했다고 느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몇 가지 약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날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 한 가지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지나친 자존감과 기대
사회적 완벽주의자는 자신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높은 기대를 가집니다. 그의 자존감은 때로 불가능한 수준의 성공을 유지하기를 요구합니다. 여기에 실패할 때 그는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자신의 목표나 역할, 열망에 집착하는 이들이 사회적 완벽주의자만은 아닙니다. “개인 계획(personal projects)” 연구로 잘 알려진 케임브리지 대학의 심리학자 브라이언 리틀은 우리가 자신의 계획을 곧 자기자신으로 여길 때 역시 이런 자신의 목표와 역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버드 수업에서 종종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계획이 곧 여러분들입니다.”
리틀에 따르면 세상에는 다양한 계획(projects)이 존재하고 각각의 계획은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닙니다. 개를 운동시키는 것, 교장이 되는 것, 성공적인 아버지와 남편이 되는 것 모두 개인 계획에 속합니다. 놀랍게도 이 계획들이 얼마나 의미있는 것인지는 자신의 행복에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 계획이 성취 가능한 것인지가 우리의 행복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줍니다.
이런 개인 계획이 실패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대처해야 할까요? 여기에 어떤 남녀간의 차이가 발생하고, 이 때문에 남자가 더 자살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남자가 자신의 실패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감정적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어려워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개인 계획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리틀은 그의 책 “나, 나 자신 그리고 우리(Me, Myself and Us)”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여성들은 자기 계획의 현재 상황과 어려움을 밝히려 하는 반면, 남성들은 이를 숨기려 하는 경향이 있다.”
고위 임원들에 대한 연구에서 리틀은 남녀간의 또 다른 명백한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물을 맞닥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우선시 합니다. 반면 여자들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곧 조직의 분위기를 가장 우선시합니다. 이들이 사무실 바깥의 인생에서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을 수 있겠지요. 나는 스테레오타입을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조사결과는 매우 분명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UCLA의 셀리 테일러가 2000년 발표한 스트레스에 대한 생물-행동학적 반응 연구 역시 이 결과를 지지합니다. 그들은 남자들은 잘 알려진 “투쟁 혹은 도피(fight or flight)” 반응을 보이는 반면, 여자들은 “배려와 친교(tend and befriend)”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여성들 역시 자살을 매우 진지하게 고려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적 관계 때문에, 곧 ‘애들은 어떡하지? 엄마는 어떻게 해?’와 같은 생각을 떠올림으로써 자살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됩니다. 반면, 남자들에게 죽음은 “도피(flight)”의 궁극적인 형태로 존재합니다.”
남자들의 자살 의도가 더 명확하다
그러나 이 도피의 극단적 형태는 결심을 필요로합니다.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토마스 조이너는 자살을 고려한 이들과 실제로 자살을 행동으로 옮긴 이들의 차이를 연구해 왔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이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그 부분에서 남녀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조이너는 CCTV에 잡힌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에 대해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의 목숨을 끊겠다는 듯이 행동하지만, 마지막 순간 두려움으로 잠깐의 주저를 보입니다. 그 주저함이 결국 그들의 목숨을 살립니다.”
“그렇다면 남자들이 덜 주저한다는 말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서구의 국가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자살 시도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가지 이유는 자살 시도를 한 남자들은 실제로 죽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목을 매거나 총을 사용하는 반면, 여자들은 약을 먹고 자살하려 합니다. 자살 방지를 목적으로하는 단체인 사마리탄의 심리학자 마틴 시거는 이런 자살 방법의 차이가 결국 남자들의 자살 의도가 더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택하는 방법이 곧 이들의 심리를 반영합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심리학자 데니얼 프리먼은 자해를 시도했던 환자 4,415명에 대한 연구에서 역시 남자들의 자살 의도가 훨씬 더 높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아직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밝혀졌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물론 이를 보이는 것 자체가 아주 어려운 일일겁니다.”
오코너 역시 이 의도의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건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어떤 최신 연구가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거는 이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에게 자살은 곧 처형과 같습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서 제거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패배감과 부끄러움만이 이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남성은 다른 이들을 보호하고 아끼며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낍니다. 여자들 역시 직장을 잃었을 때 이를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자아나 여성성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남자들은 직장을 잃었을 때 자신이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는 유명 심리학자 로이 바우메이스터의 이론인 자살이 곧 ‘자신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바우메이스터의 말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책임질 수 없는 남자는 어떤 면에서 더 이상 남자가 아니게 됩니다.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여자이지만, 남성성은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죠.”
아시아의 사회적인 압박
중국에서 부패한 공무원이 자살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이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치욕을 피하기 위한 것이지만, 또한 가족을 불명예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뇌물 혐의로 고소되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살한 것입니다. 조사를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죠 [라고 그는 생각한 듯 합니다.]” 김의철 교수의 말입니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 수치심은 자살의 주요 원인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한국과 다른 나라와의 차이입니다. 애틀랜타 에모리 대학의 인류학자 치카코 오자와-데 실바는 일본의 경우, “한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명예가 회복되거나 또는 가족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김 교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또 다른 짐으로 작용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수치심은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범죄자의 3대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는 “사람 사이(人間)”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서구보다 자아에 대한 관념(sense of self)이 불분명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속한 다양한 그룹으로 쉽게 확장됩니다. 이는 다른 이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크게 느낀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살을 더 진지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오자와-데 실바는 일본의 경우 자아는 곧 그의 사회적 역할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 앞에 직업을 붙여 소개한다고 말합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데이빗이라고 합니다’ 대신에 ‘안녕하세요, 저는 소니에서 일하는 데이빗이라고 합니다’가 되는 것이죠. 아주 가벼운 만남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러나 경기가 나빠질 때 이런 직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자살은 수십 년, 아니 수 세기 동안 도덕적 가치를 가진 행동으로 여겨져왔습니다. 아마 사무라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회사를 가족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회사의 대표는 ‘이 회사를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같은 말을 하며 자신의 목숨을 끊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이 언론에서는 명예로운 행동으로 보도되곤 합니다. 일본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높습니다. 2007년 일어난 자살 중 2/3가 남자들이었습니다. 부계 사회에서 책임은 물론 아버지의 것이지요.
중국은 1990년대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자살률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가 됐습니다. 지난해 홍콩대학 자살 방지 연구소의 폴 입은 중국의 자살률이 1990년대 10만 명당 23.2명에서 2009~11년에는 10만 명당 9.8명으로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자살률의 하락이 바로 한국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대규모의 이농 현상이 발생한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효과가 반대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김 교수는 중국이 지금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에 의해 “일시적인 안정(lull)”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살률은 반드시 오를 겁니다.” 그는 한국 역시 70년대와 80년대, 경제가 급격히 성장할 때 자살률의 감소를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목표가 있을 때 사람들은 자살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표에 도달했을 때 그 목표가 내가 기대하던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사실 오코너가 글래스고에서 발견했던 것처럼 희망 없는 곳에서 희망을 가지는 것은 때로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긍정적인 미래를 꿈꾸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일까?’
처음에는 그럴 거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의 연구팀이 “희망적 사고(intrapersonal future thoughts)”, 곧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또는 “나는 잘 살 거야”와 같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자세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은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코너는 자살을 시도한 388명을 연구했고, 15개월 뒤 그들이 다시 자살을 시도했는지를 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희망적 사고를 가진 이들이 자살을 재시도하는 비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던 반면, 우리는 이 희망적 사고가 오히려 그 사람의 재범율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자기 중심적인 희망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 오히려 자살을 또 시도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희망적 사고는 위기 상황에서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나는 이 목표들을 영원히 이루지 못할 거야’라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더 평등한 사회인 서양에서는 다를까
자살과 성 역할의 관계는 아시아와 서구에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적어도 서구에서 사회가 남성을 바라보는 자세는 훨씬 진보적일 것으로 믿어집니다. 정말 그럴까요?
2014년 마틴 시거와 그의 연구진은 미국과 영국의 남자와 여자들에게 남자와 여자가 된다는 것이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묻는 연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적어도 남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있어서는 1950년대에 비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남자에게 기대되는 첫 번째 원칙은 싸움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고, 그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다른 이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죠. 세 번째 원칙은 언제나 상황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들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은 남자로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진짜 남자’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도움을 청하는 남자는 놀림거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결론은 오코너가 2012년 남성의 자살에 대한 사마리탄 보고서에 작성했던 내용과 놀랄 만큼 유사합니다.
“남자들은 자신을 힘과 권력을 가진 완벽한 이상형의 남자와 비교합니다. 자신이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수치심과 패배감을 느끼게 됩니다.”
1980년대 중반을 위시해 서구 사회에서는 남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 평등과 여성의 성적 안전을 위한 오랜 투쟁이 남자를 기득권자 및 폭력주의자로 묘사한 것이 그 한 가지 이유입니다. 오늘날의 남성상 중 몇몇은 이런 부정적 남성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허영적인 메트로섹슈얼이나 식기세척기조차 다루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 말이지요. 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지배하고, 이끌고, 싸우고, 침묵 속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친구와 가족에게 들일 시간 없이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이런 과거의 기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워할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그러나 문제는, 남자들에게 무엇이 남았는 지 입니다. 사회는 진보했지만, 남자들이 성공과 실패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본능 속에 숨어있는, 그리고 문화적으로 강화되어 왔던 이 감정을 없앨 수 있을까요?
오코너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10여 년 전 자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의사에게 우울증 약을 부탁했던 기억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그 의사는 “그냥 호프집에 가서 좀 즐기세요”라고 내게 말했습니다.
“정말요?” 오코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볐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게 겨우 10년 전이라고요?”
“나는 때때로 약을 좀 먹었으면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지도 걱정되었죠.”
“부인과 여기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나요?”
나는 잠시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뇨, 나는 내가 이런 문제를 쉽게 털어놓는 사람인줄 알았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나도 그저 평범한 바보같은 남자(crap)였을 뿐이죠.”
“그런 게 바보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거죠. 이 부분이 핵심이에요. 이야기가 ‘그런 남자는 바보같다’로 바뀌어 버리죠. 그렇지 않아요. 본능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요. 오해는 말아요, 이를 조절은 할 수 있으니까요. 내 말은 이 사회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남자들이 부담 없이 진료를 받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자들이 도움을 받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같은 질문 말이에요.”
그는 2008년 자신의 친한 여자친구가 자살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사건은 무척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물었죠. ‘왜 나는 그걸 몰랐을까? 나는 수십 년 동안 이 일을 해왔잖아?’ 나는 그녀의 자살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책임을 느꼈어요. 그리고 내가 실패자라고 느꼈죠.”
갑자기 그의 이야기 역시 전형적인 사회적 완벽주의로 들렸습니다.
“아, 나도 사회적 완벽주의자군요. 나 역시 사회적 비판에 매우 민감해요. 물론 나는 그걸 잘 숨기지만요. 나는 비정상적으로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하죠. 나는 내가 다른 이들을 실망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척 민감해요.”
나는 그에게, 당신이 자살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지 물었습니다.
“나는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이가 어떤 시기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음, 모든 사람은 아닐 수 있죠. 그러나 상당히 많은 이들이 자살을 생각해본다는 연구결과가 있어요. 하지만 나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다행인 일이죠.”
다시 드러몬드의 얘기로 돌아가죠. 드러몬드는 다시 결혼했고, 아이들은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가 이혼한지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여전히 그에게 고통이기 때문에 그는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제 다 묻어버린 기억이겠군요. 그런가요?”
“남자라면 그런 일은 알아서 처리해야죠. 이런 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선 안 되죠.”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