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npr에 기재된 「Before Rosa Parks, A Teenager Defied Segregation On An Alabama Bus」를 번역한 글입니다.
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로자 파크스는 인종차별에 맞선 아이콘으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9개월 앞서 똑같은 행동을 했지만, 유명해지지 않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 15세 여학생이었던 클로뎃 콜빈(Claudette Colvin)입니다.
1955년 3월 2일, 클로뎃은 친구 세 명과 함께 버스를 탔습니다. 앞 좌석 10개는 백인전용이었기 때문에, 소녀들은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죠. 하지만 점점 탑승객이 늘어나면서 한 백인 여성이 자리 없이 서 있게 되자, 버스 운전수는 클로뎃과 친구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즉시 일어난 친구들과 달리 클로뎃은 자리에 앉은 채 버텼죠.
출동한 경찰에게 클로뎃은 외쳤습니다.
나도 요금을 냈어요. 이건 헌법에 명시된 내 권리예요.
하지만 소용없었죠. 클로뎃은 수갑을 찬 채 성인 구치소로 끌려갔고, 부모가 온 다음에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KKK단의 보복을 두려워한 클로뎃의 아버지는 장전한 소총을 끌어안고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클로뎃은 많은 친구를 잃었습니다. 부모들이 극단주의자와 어울리면 위험하다며 클로뎃과 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죠.
그 전에도 백인에게 버스 좌석을 양보하지 않은 흑인은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클로뎃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정 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몽고메리에는 흑인 변호사가 단 두 명 있었고, 클로뎃은 그중 한 사람인 프레드 그레이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레이 변호사는 흑인 커뮤니티의 원로들과 의논한 결과, 소송을 유보하기로 합니다. 클로뎃이 너무 어리고 민권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죠. 클로뎃은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 가 16세 때 결혼하지 않은 몸으로 임신을 하게 됩니다.
저는 아마 사람들이 앞에 내세우고 싶은 인물이 아니었을 거예요. 너무 전투적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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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뎃의 말입니다. 9개월 후, 로자 파크스 사건이 일어납니다. 16세의 미혼모 클로뎃과 달리, 로자 파크스는 42세의 점잖은 직장인이자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임원이었습니다. 민권 운동 지도자들이 찾아 헤매던, 운동의 심볼이 될 만한 인물이었죠.
1956년 그레이 변호사는 그 유명한 브라우더 대 게일 재판에서 승리하면서, 앨라배마 주 대중교통에서 인종 분리 정책을 철폐시키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클로뎃은 이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해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레이는 클로뎃이 민권 운동의 이름 없는 영웅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