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침구, 패션, 그리고 매트리스
‘사람이 쓰는 것’이라는 점 빼고는 특별히 비슷한 점이 없어 보이는 분야들입니다. 하지만 최근 2~3년 이내에 미국 e커머스 업계에서 불고 있는 새로운 바람을 잘 들여다본다면, 이 분야들의 공통분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새롭고 혁신적인 기업들이 무섭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분야라는 것입니다. 안경 업계의 Warby Parker, 침구류 업계의 Parachute, 패션 업계의 Everlane, 매트리스 업계의 Casper가 그들입니다.
Warby Parker는 2010년 런칭 후 3주 만에 첫해 목표 매출량을 달성하며 2011년에는 500% 이상 성장했으며, Casper는 2014년 4월 런칭 이후 10개월 만에 200억 이상의 매출을 달성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뜬금없기까지 한 분야들에서 이러한 기업들이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겐 3가지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1) 질 좋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
모든 것이 빠르게 만들어지고 빠르게 소비되는 세상에서, 제품의 ‘질’에 대한 집중은 오히려 혁신적인 일입니다. 앞서 말한 모든 기업이 공통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바는 똑같습니다.
Quality matters.
품질은 중요하다.
가격이 아무리 싸더라도, 고객들은 싼 만큼의 싼 품질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가격은 비싸지 않지만 품질은 비싼 제품만큼 좋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들은 모두 그러한 가치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 기업들이지요. 이들이 질 좋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개자를 최대한 제거하고 생산지와 소비자를 바로 연결했기 때문입니다.
고급스러운 침구류를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는 Parachute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침구류가 디자인되고,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져 고객에게 바로 배송하고 있죠.
패션 기업 Everlane 역시 좋은 원단의 의류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 세계의 실력 있는 의류 공장들을 직접 방문하고 발굴해 제품의 질을 보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굴해낸 공장의 이야기 하나하나 모두 Everlane의 브랜드 확립에 활용됩니다.
뉴욕 베이스로 매트리스 업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기업인 Casper는 원재료와 공급망의 혁신을 통해 합리적인 가격에 질 높은 매트리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원재료 측면에서는, Everlane 과 같이 미국 내의 믿을만하고 전통 있는 파트너들을 찾아서 Engineered and made in the USA를 강조하고 있죠.
이렇게 원재료 및 제품 개발에 신경을 써서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또 다른 혁신 포인트는 바로 ‘유통 방식’입니다. 복원력이 강한 제품을 압축시켜 동그랗게 말아 작은 박스에 담아 배송하는 것이죠. 이러한 노력을 통해 Casper는 오프라인 샵의 1/3 가격으로 높은 퀄리티의 매트리스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맨하탄 안에서는 60분 안에 무료 배송을 해주고 있죠. 뉴욕 타임즈는 “사람들이 매트리스를 사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고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돌풍의 주역인 4개의 기업이 이렇게 높은 품질의 제품들을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고 있으니, 소비자 입장에선 ‘안 살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사실 하나만으로는 자신들의 분야에서 이러한 혁신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비자의 심보(?)는 고약하기 때문입니다. 고객들은 합리적인 가격의 질 좋은 제품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고, 이들은 그것을 충분히 채워 주었습니다.
2) 사회적, 도덕적 책임에 집중
앞서 말했던, 심보가 고약한 소비자들의 욕심은 좋은 품질의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이 제품을 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리 값싸고 질이 좋아도, 내가 이 제품을 샀다는 것을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여기지 못한다면 어딘가 찝찝합니다.
미국 e커머스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4개의 기업은 이들을 모두 만족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제품에 사회적, 도덕적 의미를 자연스레 부여하고 있습니다.
Warby Parker는 그들의 안경이 팔린 개수를 누적해 매달 제휴 된 비영리기관에 금액을 기부합니다. 비영리기관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시력 검사와 안경 판매를 할 수 있도록 교육 훈련을 제공해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훈련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커뮤니티에서 시력에 대한 관리를 합리적으로 받을 수 있게 노력하게 되죠. 단순히 기부만 하는 것이 아닌, 선순환을 만들려는 노력을 Warby Parker는 진정성 있게 보여줍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패션 기업, Everlane 또한 의류 공급망에서의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데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투명성’을 회사의 슬로건으로 쓸 만큼, Everlane은 그들의 제품, 원단 하나하나가 어디에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생산되는 지 알리는 데에 신경 씁니다. 자사 제품들이 생산되는 공장을 어떻게 찾았고, 공장의 오너는 어떤 사람이며, 운영은 어떻게 되지 있는지에 대한 컨텐츠를 높은 퀄리티로 홈페이지에 올려놓았죠. 이를 통해 까탈스러운 소비자들까지도 기꺼이 그들의 제품을 흐뭇한 마음에 구입할 수 있게 됩니다.
Parachute 역시 그들의 침구류 사업자 밀접하게 관련된, ‘잠’이라는 분야에서 사회적, 도덕적 책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Parachute에서는 Nothing but nets라는 비영리기관과 파트너쉽을 맺어, 침구류 세트가 하나 팔릴 때마다 아프리카의 말라리아 확산 방지를 위해 모기장을 기부합니다. 또한 침구류를 구입할 때, Nothing but Nets에 직접 10달러 기부를 할지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최근 미국에서 떠오르고 있는 e커머스 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소임을 다한다는 것을 정면으로 내세워 긍정적인 이미지 형성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자랑스레 내세우는 것이 위선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의 사업 분야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3) 멋진 디자인과 브랜딩
좋은 퀄리티에 합리적인 가격, 사회적 책임까지 다하는 기업의 제품이지만 결정적으로 예쁘고 멋지지 않다면,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기업들은 모두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과 브랜딩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Warby Parker는 뉴욕 최고의 디자인 & 브랜딩 에이전시 중 하나인 High Tide와 협업을 해 명함, 기프트 카드부터 안경 케이스까지 일관되고 세련된 감각의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중간 마진을 제거함으로써 남는 부분을 브랜드와 디자인에 투입해, 합리적인 가격에 한층 고급스러운 느낌을 제품, 패키지, 웹사이트 등 모든 측면에서 받을 수 있게 했죠.
Parachute 또한 뉴욕 베이스의 디자인 & 브랜딩 에이전시 Barrel과 함께 멋진 웹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Casper 는 깔끔한 디자인 자체에도 신경을 쓰는 동시에, 독특한 고객 리뷰들을 내세워 브랜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바로 고객들이 Casper 매트리스를 받는 순간을 SNS에 스스로 공유하는 것을 장려하고, 이를 기업 차원에서 홍보해주고 있는 것이죠. 직육면체의 작은 박스에 푹신하고 커다란 매트리스가 담겨오며, 상자를 해체하고 매트리스를 펴 누워보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침대 위에 설치하기까지의 경험은 다른 매트리스 회사들은 줄 수 없는 Casper만의 독특한 경험입니다. Casper 또한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자신의 브랜드 확립에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고객들은 스스로 Casper 의 설치 경험을 기꺼이 공유한다.
출처: Youtube
이들이 이렇게 디자인과 브랜드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아직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은 만큼, 모든 고객과의 접점에서 자신들이 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전달하는 방법만이 거대 자본이 존재하는 업계의 공룡들을 앞지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주는 가치들만 보자면, 이런 게 동시에 모두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좋은 가치들입니다. 앞서 말했듯, 이는 중개 단계를 최대한 줄여 소비자와 생산지를 직접 연결하려는 노력으로부터 가능해졌죠. 미국 스타트업과 IT 업계에서는 이미 이러한 기업들을 D2C(Direct to Consumer)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기업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Idealab의 앨런 모건은 그의 글에서 D2C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기업들을 e커머스 2.0 이라 칭할 정도로 혁신적인 모델이라 부릅니다. e커머스 2.0 기업들은 생산지부터 유통, 최종 소비자까지 통합해 일관적이고 높은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적인 모델 덕에 취급할 수 있는 제품의 수는 많아질 수 없다고 하죠.
스타트업으로 인해 다양한 업계의 거대 기업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언번들링(Unbundling)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상품을 유통하던 공룡 커머스 기업을 이러한 혁신적이 회사들이 조각내기 시작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소 비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퀄리티의 멋진 제품을 구매하고,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니까 말이죠. 머지않아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바람이 불 것이라고 예상해봅니다.
더 나아가자면, D2C 기업들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모아놓는 또 다른 기업이 생길 수도 있는 일입니다.
원문: 지원준의 Brun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