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무적 따이한’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전사자의 8배에 가까운 4만여 명의 베트남인을 사살했다. 당시 언론들은 10:1의 눈부신 전과라며 ‘자랑스러운 대한의 남아’ ‘무적 따이한’으로 보도했다.
한국 언론
“한국군을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라고 그들 군대에게 명령할 정도로, 베트콩은 한국군을 겁내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무적 해병대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이는 미군의 두 배이자 게릴라전 역사상 유례없는 전과였다. 그렇다면 당시 동맹국 미국은 한국군을 어떻게 보았을까?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릭 와이드먼
“한국군은 교전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면 끝까지 추격해서 마지막 한 명까지 사살하곤 했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이들이라고나 할까.”
당시 미 대통령 법률 보좌관 맥퍼슨의 현지 보고서의 내용이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맥퍼슨
“한국군은 정말로 무서웠다. 현지 주민들에게 한국군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한밤중에 신분증 없이 한국군을 만나는 일이 과연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랬다. 베트콩들이 한국군을 만나면 피하라고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군을 1명이라도 사살하게 되면 화가 난 한국 군인들이 인근 마을로 쳐들어가서 애꿎은 양민들에게 보복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 베트콩들 스스로, 한국군을 쏘지 말라고 명령했던 불편한 진실이 있었다.
당시 미국의 종군기자가 본 한국군의 모습은 이러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로버트 키틀리 (종군기자)
“한국군은 상대가 누구인지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느 지역에 베트콩이 있다고 알려지면 그 지역의 아무에게나 총을 쏘는 그런 식이었다.”
당시 파월 장병의 증언은 이렇다. (『한겨레 21』 273호, 1999년 9월 21일 자)
파월 장병
“우리 군이 한 명 죽거나 다치면 그 다음 날엔 줄초상이 났어. 설령 그 마을이 베트콩과는 무관한 마을이라고 해도 상관없었어. 그냥 보이는 대로 쏴 죽이고 여자들은 강간한 뒤에 죽이고 그랬으니깐….”
한국군의 잔혹 행위는 당시 해외 언론에서는 자주 언급됐던 부분이다. 오죽했으면 남베트남군의 한 사단장은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에게 한국군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에 대해 국내 언론은 철저히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당시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의 회고다. (리영희, 『스핑크스의 코』, 252~253쪽.)
리영희
“매일 수 없이 죽어가는 무고한 베트남인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매일 우울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는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딘가에서 소주를 마시곤 했다.”
한국군이 4만 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고 국내 언론들은 자랑스럽게 보도했지만, 사실 이 중에는 9천여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수정,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한겨레 21』 279호.)
증오비의 문구: 남조선 군대는 ‘미국의 용병’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살한 민간인은 크게 다음의 4개 성(省)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이 중에서 꽝남성에서만 희생자의 절반가량인 4,500명 정도가 발생했고 나머지 성들에서는 각각 1,700명씩의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이들 학살이 일어난 지역마다 오늘날에는 ‘증오비’와 ‘위령비’ 등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들의 비문에는 늘 한국군과 함께 미군이 함께 거론되고 있으니,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20쪽.)
베트남인
“한국은 돈을 벌기 위해 미군을 대신해 싸운 용병이었다! 그러니 일차적인 책임은 미국에 있는 것이다.”
그런 베트남인들의 생각은 1967년 12월에 있었던, 투이보촌(村) 학살을 기억하는 비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위령비의 내용은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0쪽.)
투이보촌 위령비
“1967년 12월, 야만적인 미국 군대는 우리가 사랑하는 어르신, 소녀, 어린이 145명을 학살했다. 이를 후손들은 대대로 마음 깊이 기억하라.”
하지만 학살은 미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67년 12월, 당시 투이보촌에는 2대의 헬기가 한국군(청룡부대) 1개 소대를 내려놓았다. 이때 한국군은 마을로 밀고 들어오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기 때문에 주민들은 총알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땅굴을 찾아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들은 땅굴에 사람이 숨어있으면 죄다 베트콩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마을 곳곳의 땅굴을 수색해 주민들을 모두 땅굴 밖으로 나오게 하고는 나오는 사람마다 차례대로 총을 쏘아 죽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두 145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게 된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은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0쪽.)
응웬 티 니
“새벽 1시였어요. 한국군들이 들이닥쳐서 주민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더니, 갑자기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쐈습니다. 그렇게 모두 100명도 넘게 죽었어요.죽은 사람들 속에는 내 자식들도 3명이나 있었습니다.”
“사위와 외손자까지도 모두 잃었어요. 그때 세 살짜리 외손자는 내 품에서 두개골이 산산조각이 나서 죽었고, 나는 턱과 혀 반쪽에 날아갔다는 걸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입이 돌아가 있습니다.”
하지만 위령비에는 한사코 미국 군대라고 적혀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누가 죽였든 그것은 미국의 죄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군을 끌고 온 것은 미군이고, 한국군은 미군의 ‘용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0쪽.)
애꿎은 양민에게 복수하던 한국군
해병대 청룡부대는 1968년 2월 여단 규모(4천 명)로 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1968년 1월 베트콩의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 작전이었다. 그런데 퐁넛 마을을 지나던 1개 중대가 민간인 70여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한국군의 증언은 이렇다.
사병
“행군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로부터 총알이 날아오잖아요. 그래서 마을에 베트콩이 있는 것으로 알고 들이닥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베트콩은 떠나고 없더라구요. 겁먹은 마을 사람들밖에 없어서 우리는 주민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놓았는데 , 어디선가 갑자기 또 적의 총알이 날아오는 거에요. 그래서…”
소대장
원래 사람들을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니까 죽인 거지요. 참나…”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한겨레 21』 334호, 2000년 11월 23일) 문제의 퐁니·퐁넛 마을은 애초에 베트콩과는 거리가 먼 ‘안전 마을’이었다. (안전마을: 미군이 베트콩으로부터 안전한 마을이라 지정한 곳)
당시 미군의 조사 결과는 이러했다.
“한국군이 정찰 중에 대인 지뢰에 걸려서 발목을 날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국 해병 1명이 부상을 당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화가 난 한국군은 보복하겠다며 인근 마을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증언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8~159쪽.)
베트남인
“시체들은 정말 끔찍했다. 어린아이들이 발가벗긴 채 죽어 있었고… 양쪽 다리를 잡아당겨 찢어 죽인 것도 있었다.”
한 비구니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구니
“어린아이를 칼로 창자를 끌어내 죽인 시신도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우리는 절 안에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전 세계적으로 보도된 학살사건
그러나 퐁넛 마을의 사건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자행했던 100여 건이 넘었던 학살 사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이 사건은 한국군의 학살 사건 중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다. ☞ 참고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지만 그중에 거창학살사건이 가장 유명한 것처럼… 퐁니·퐁넛 마을 사건도 흔히 ‘한국판 미라이’라고도 불리는 사건이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 이유는 희생자 중에 남베트남 군인의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고 배상하여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남베트남 국회에 보내 탄원했던 것이고, 남베트남 정부의 항의로 미군이 독자적인 조사를 벌인 탓에 사건의 전말이 베트남 현지는 물론이고 뉴욕 타임즈 등을 통해서 기사가 퍼져나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채명신
“민간인 학살이라뇨? 우리 군인들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베트콩들의 기만전술인것 같습니다.”
게다가 미국도 더 이상 한국을 추궁하지는 못했다. 사건 한 달 후에, 미군 스스로 미라이 학살 사건을 터뜨렸기 때문에… ☞ 참고
때문에 억울해진 것은 희생된 민간인 유족들이었으니, 당시 이들 유가족에 대한 보상은 희생자 한 사람당 20kg의 쌀 한 포대와 2m짜리 상복을 만들 천이 전부였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9쪽.)
사건이 이렇게 책임을 묻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버렸으니, 이후로 유사한 사고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것은 물론이다. 가령 한국군이 행군이나 작업 도중 지뢰를 밟거나 부비트랩이 터지기라도 하면, 한국군은 이내 인근 마을을 찾아가 가혹한 보복을 가하곤 했다.
1968년 디엔반 현에서 도로 청소 중 지뢰가 터졌다는 이유로 청룡부대는 130명의 양민을 학살했는데, 이때 희생자들 중엔 미군 부대 소속 군인들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7쪽.)
한국군
“그러니까 감히 우리들 주위에 지뢰나 부비트랩 같은 거 설치하지 말라니깐!”
학살현장을 은폐하다
평소에 현지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다가도 갑자기 악마로 변해 잔인하게 살육한 사건도 있었다. 디엔바 현 하미촌에 주둔했던 청룡부대가 그러했다. 이들은 평소 대민 지원도 나가는 등 베트남 주민들과 잘 지내고 있었지만, 해당 마을에 작전 명령이 떨어지자 한국군은 180도 돌변했다.
오늘날 마을 입구에는 있는, 증오비의 내용을 인용해보면 이렇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2~153쪽.)
한국군 증오비
“1968년 2월, 청룡 부대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마을을 포위하고 양민들을 미친 듯이 학살하여 마을의 30채 가옥이 불에 타고 주민 135명의 시체가 산산이 태워졌다.”
“탄 고기와 비린 피를 탐하는 개미들이 주위로 새까맣게 몰려들었고, 그 와중에 한 아이는 여전히 살아있어서… 엄마 배 위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젖을 찾고 있었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이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4쪽.)
팜 티 호아
“평소 한국군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나눠주곤 했었지. 학살이 일어난 그 날 아침에도 빵을 주려나 보다 하고 마을 사람들은 모였던 거야.”
“그런데 한국 군인들은 갑자기 난데없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어. 그때 나는 다리가 잘렸어. 그리고 죽은 척 엎어져서 있었지. 그렇게 밤이 될 때까지 꼼짝없이 죽은 척을 했어.”
“그리고 컴컴한 밤이 되자 나는 기어 나와 살 수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때 일로 나는 4명의 가족을 잃었어. 자식 둘과 임신 4개월 된 조카며느리를 잃었지. 죽기 전에 며느리는 한국군에게 강간을 당했어. 우리 며느리는 참 예뻤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학살을 끝내고 나면 한국군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탱크나 불도저를 끌고 와서 현장을 깔아뭉개서 시체의 형체를 알 수 없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53쪽.)
하미촌 증오비
“…더 처참한 것은 학살 후에 탱크가 시체들을 짓뭉갠 것이다.”
아이들까지 모두 죽여야 했던 군인들
이렇듯 사건을 은폐시키기 위해서라도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면 한 명도 살려둘 수가 없었으니 안정효의 자전적 소설 ‘하얀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사병
“소대장님, 저기 앞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는데 말입니다.”
소대장
“그래? 베트콩이다! 쏴 갈겨!”
하지만 현장에 가보니 베트콩 대신에 무고한 양민들이 쓰러져 죽어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남편의 시체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는 젊은 부인과 쓰러진 노파, 신음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사병
“이게 뭐야! 우리가 민간인을 죽인 거야?”
소대장
“아냐, 총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야. 뒤져봐.”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이들은 선량한 민간인이었다. 순간 군인들은 모두 이성을 상실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자 소대장은 총검을 빼내어 살아남은 사람들을 향해 난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사들한테도 똑같이 민간인을 찌를 것을 강요하게 된다.
소대장
“빨리 해. 이 XX야. 어차피 죽여야 하잖아. 방법이 없잖아!”
결국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면 입막음을 위해, 집단 전체를 몰살해야만 하는 참극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아직 신병일 때는 목에 칼을 대고 강요를 해도 쉽사리 선량한 사람들을 쉽게 죽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후 서서히 전쟁에 익숙해지면 곧 야수로 변신하고 말았으니, 당시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201쪽.)
한 병사가 5~6살 된 현지 꼬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꼬마의 어머니는 이미 군인들 손에 주검이 되어 있었다.
한국군
“자, 아저씨가 사탕 줄 테니 받아.”
순진한 꼬마는 손을 내밀었는데, 그때 병사는 일어서서 가슴에 대고 총을 탕! 하고 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이의 시체를 발로 툭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 병사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입을 털었다.
한국군
“어차피 베트콩 자식인데… 나중에 애비 애미 원수 갚겠다고 덤벼들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이유로 멋모르는 어린 아이까지 죽여야만 했을까?
1965년 1월 트이프억현 떤장 촌에서 맹호부대원들은 수색 도중에 베트콩에게 아군 1명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인근 마을로 내려가 대대적인 복수를 자행했다. 이때의 학살 기록은 마을의 증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93쪽.)
한국군 증오비
“태어난 지 이틀밖에 안 된 갓난아이가 군홧발에 짓이겨진 채 엄마 가슴 품에서 죽었고, 임신 8개월 된 부인은 총격으로 자궁이 밖으로 나온 채 죽었다.”
“한 병사는 한 살배기 어린아이를 죽인 뒤,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이치고 남은 몸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 버렸고, 두 살배기 아이는 목을 꺾어 죽였다.”
식사 한 끼
한국군은 보복을 위해서만 민간인을 살해했던 것이 아니었다. 1968년 이후 청룡부대의 초소가 세워진 주이쑤엔 현 쑤엔타이 촌에는 평소에도 한국군에 의한 강도·강간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었으니, 오죽했으면 농민들은 들로 일하러 나갈 때면 집안의 돈을 모두 싸 들고 일터로 나가곤 했다. 돈을 집안에 두었다가 한국군에게 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63쪽.)
강간 범죄도 극심해서 한국군이 주둔하는 동안에만 18명의 여자들이 집이나 들판에서 강간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163쪽.) 특히 작전 지역에서 여자들이 접근하는 경우에는 여지없었다. 당시 참전 병사의 증언이다.
참전 병사
“이른 아침이면 소대가 매복을 나갔어요. 한번 나가면 하루 종일입니다. 분대별로 흩어져 죽 때리다가 해가 져서야 귀대했죠.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베트남 사람들도 산으로 나물을 캐거나 나무 열매를 따러 옵니다. 그러면 분대끼리 무전기를 때립니다.”
“여자 한 명이면 ‘식사 추진, 식사 추진, 1인분’이라고 하죠. 만약 남자라면? 보고 후 바로 쏩니다. 작전구역에 무단으로 침입했으니까요. 무조건 베트콩으로 간주하는 거죠. 하지만 여자는 안 쏘고 기다립니다. 매복지점 바로 앞까지. 그리곤 덮치죠. 강간합니다. 집단으로 윤간합니다.”
“그러면 다른 매복조에서 무전을 막 때립니다. ‘너네만 먹냐. 이쪽으로 배달하지 않으면 우리가 먹으러 간다’고요. 소대장이 있지만, 제지를 안 합니다. 못 합니다. 사병들이 더 고참이고 M16을 가졌잖아요.”
“그렇게 식사가 끝나면, 여자는 그냥 쏴 죽입니다. 증거를 없애야 하니까. 중대엔 베트콩을 사살했다 보고하죠.”
1969년 10월 카인호아 성에서는 백마부대 소속의 군인 한 명이 현지 여성을 희롱하다가 절의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하여 다시 찾아와서 총기를 난사해 절의 스님 4명을 사망케 한 사건이 AFP 통신을 타고 해외토픽으로 보도되기도 했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200쪽.)
왜 이렇게 잔인했을까?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은 중대장급은 대개 1935년 전후에, 일반 사병들은 1945년 전후에 출생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체험하고 철저한 반공교육 속에서 살았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불행한 이유는 김일성이랑 빨갱이 때문이다!”
“맞아! 빨갱이는 찢어 죽여야 마땅한 놈들이다.”
평소 이런 사상교육을 귀가 닳도록 받고 자랐었다. 때문에 ‘이념의 전쟁’이라 믿고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그들은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더욱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군인들이 악마로 변해가던 모습을 한 참전 군인은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202~203쪽.)
참전 군인
“배치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병들은 포로로 잡아 온 여자 베트콩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귀와 유두와 음부를 도려내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대개는 하지 못하죠. 죽일 수 없다고 울며 거부합니다. 이때 분대장이 총구를 신병 머리에 갖다 대는 겁니다.”
” 그러면 어쩔 수 있나요. 살기 위해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칼로 찌르고 도려내고 나면 수류탄을 던져서 증거를 없애 버리는 겁니다. 그걸 하고 나면 신병은 거의 미친 상태가 되어 버리죠. 하지만 이때부터 정상적인 사람도
어느새 야수로 변하게 되는 겁니다.”
그랬다. 사람을 직접 죽여봐야 사람 죽이는 걸 예사로 아는 법이다. (이규봉, 『미안해요! 베트남』, 201쪽.) 게다가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현지 민간인들과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만큼 병사들은 낯선 환경에 대한 공포가 더욱 만연해서 쉽사리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수로 살육을 하더라도 그것은 곧 베트콩을 해치웠다는 전공으로 둔갑했고 상부에서도 이를 묵인했기 때문에, 학살에 대한 죄의식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 병사들은 희생된 민간인들을 민간인으로 변복한 베트콩이라고 한사코 자기최면을 걸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구수정,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한겨레 21』 1999년 5월호.)
공산당은 우리 민족의 원흉이자 마땅히 타도할 대상이기 때문에 목을 베거나 창자를 끄집어내거나, 산채로 불에 태우거나,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키거나, 임산부의 태아가 나올 때까지 군홧발로 짓밟고 한 줄로 세워서 M16의 화력 실험을 하는 식의 광기로 가득 찬 만행들 속에서도 죄책감을 덜 수 있었던 것이다. “타도하자 베트콩”, 그것은 그들에게 내려진 지상명령이었다.
파월장병들의 증언
하지만 당시 파월 장병들 역시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유수호’라는 미명하에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싸워야 했던 군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터로 보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지금 그들에게는 가해자라는 멍에와 참혹한 기억들이 남아있다. 당시 파월 장병들의 증언이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3월 28일 자)
이재길 (66년, 맹호)
“피를 보게 되면 한국 사람들은 그래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살의가 올라버려요. 그럴 때 중대장이 시계를 기념으로 건다거나 하면서 (학살)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모행원 (66년, 백마)
“살아도 찢어 죽여야 해요. 총으로 쏴 죽이지 말고… 베트콩을 잡으면 칼로 찢어 죽이자! 중대장이 그렇게 명령했어요.”
“중대에 보고하니깐 발모가지 하나 잘라오라고 했어요.”
송중식 (71년, 백마)
“아, 전쟁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하면서 많이 괴로워했죠. 지금도 어떤 때 월남 꿈을 꾸고 나면 공포증이 생기고 막 그럽니다. 나이 먹을수록 그럽디다.”
전병학 (69년, 맹호)
“군대 생활하는 꿈만 꾸면 악몽입니다.”
반세기가 지난 베트남전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저 잊혀진 전쟁일 뿐이지만, 이렇듯 당시 파병 장병들에게는 더욱 또렷해지는 아픈 상처인 것이다. 게다가 베트남인들도 그런 사실을 절대 잊지 않고 있다.
증오비에는 이런 문구가 유독 많다. ☞ 참고
“하늘을 찌를 죄악, 만대에 기억하리라.”
원문: 만쭈리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