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JTBC 뉴스룸에 디자인 관련 뉴스가 떴다. 혹시나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디자인계의 불공정한 면이 화제로 다루어졌다. 이때 문장 하나가 머리 속을 스쳤다.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 신문이든 지상파든 종합편성채널이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디자인 산업은 아직 미디어에서 다뤄주는 것에 감사한 업종인 걸까. 어쨌든 그 고마운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랜드였다.
이랜드가 젊은 디자이너의 디자인 제품을 그대로 베껴 그룹에서 운영하는 라이프스타일샵에 유통한다는 소식이었는데 그 수준이 정말 가관이었다. 표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준을 넘어 제품을 세밀하게 똑같이 베끼고 그것도 모자라 전 세계 모조품의 메카인 중국 이우시의 한 공장에 OEM 형식으로 직접 맡기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접하자 그 엄청난 창의력과 행동력에 머리를 흠씬 두들겨 맞는 느낌이 들어 신음이 절로 나왔다.
이랜드를 시작으로 다른 표절, 카피의 예를 설명하는 뉴스를 계속 보면서 유독 내 시선을 바로 잡아끄는 어휘가 있었다. 바로 ‘디자인 약탈자’였다. 지금 우리나라 디자인 산업의 상황을 이처럼 거칠고 명확하게 표현한 단어가 있었던가. 이랜드처럼 주도면밀한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사소한 표절과 카피는 일상적이지 않던가.
디자인 약탈자는 우리 사회 곳곳에 암약하고 있다. 바야흐로 디자인 약탈자 전성시대다. 이런 세상에서 디자이너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디자인 특허 전문 변리사 김웅은 이제 디자이너도 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디자인이 어떤 법적인 보호를 받는지, 보호 수단은 무엇인지, 이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은 얼마인지 정도는 창작자로서 꼭 알아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특히 표절 문제는 법적 조치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미 디자인권, 특허권, 상표권 등 명확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소송 이전에 합의에 도달하기 쉽고 분쟁조정 시 유리한 판단을 받기 쉽다.
이런 지식은 디자이너가 사회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 필수적으로 교육받아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학교에서도 창의력을 극대화하는 연습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디자이너가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호신술 연마가 시급하다. 법적인 무지는 디자이너 스스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일 뿐 누구도 배려해주지 않는 부분이라는 그의 말이 더욱 마음 깊숙이 와 닿는 지점이다.
법적 지식과 함께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디자이너의 여론을 내뱉을 수 있는 네트워크의 형성이다. 다수의 디자이너가 모여 목소리를 모은다면 적어도 승소를 예상했던 사건이 거대 기업이나 권력의 입김으로 어처구니없게 패소할 일을 자초하진 않기 때문이다. 협회나 단체를 통한 여론뿐 아니라 SNS 등 비공식적인 채널까지 염두에 두고 폭넓은 유대 관계를 갖는 게 필요하다.
이게 모두 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다 예전 백악기 시대부터 매번 나오던 해결책이라고 비꼬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조용히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디자이너가 자신의 창작물을 디자인권으로 보호할 수 있는 ‘골든 타임’에 대해 알고 있으신가요?”
6개월이라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 이에겐 개인적으로 한 가지 부탁하고 싶다.
“너나 잘하세요.”
디자이너의 권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남이 대신 지켜줄 정도로 디자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배려가 그토록 깊어 보이진 않으니 말이다.
출처 : 허핑턴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