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이번에 손에 들어온 책의 제목은 <오픈 디자인 Open Design Now>. 지은이 대신 엮은이가 몇 명 있다. 바스 판 아벌, 뤼카스 에버르스, 로얼 클라선, 피터 트록슬러.
특유의 발음 덕분에 혹시 네덜란드 출신인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책의 기획을 크리에이티브커먼즈네덜란드(Creative Commons Netherlands), 프렘셀라(Premsela, the Netherlands Institute for Design and Fashion), 바그 소사이어티(Waag Society) 등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오픈 콘텐츠 기관에서 담당했다.
이 책은 ‘오픈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란 대주제에 속한 22편의 글이 244페이지, ‘세상을 바꾸는 오픈 디자인 이야기’란 이름 아래 모인 다양한 예시와 ‘찾아보기’ 란까지 합치면 총 368페이지 분량으로 정갈한 노란색 커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픈 디자인>이란 제목이 걸어가는 생각의 길은 실로 강력하다. 책 커버 상단에 가지런히 쓰여있는 ‘누구도 독점하지 않는 디자인’, ‘누구나 할 수 있는 디자인’이란 짧은 문구 또한 위험하지만 뛰어들 수밖에 없는 향기를 담뿍 풍긴다. 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시선이 매 페이지 페이지마다 깊숙이 박혀 뽑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시간을 적잖이 투자했지만 아직도 책의 초반을 훑고 있다.
하지만 내 정신은 고양되다 못해 황홀할 지경이다. 평소 고민하던 주제와 정확히 일치하는 글을 읽는 경험, 그때부터 시작되는 수많은 질문과 고민이 단 몇 편의 글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만일 나머지 부분을 모두 읽는다면 어떤 지적 변화를 겪게 될지 그 기대감에 스스로 어찌할 바 모를 정도다.
예를 들어 한 필자는 디자인의 핵심이라 불리는 창의성을 현대적 맥락에서 너무도 명징하게 정의한다.
오늘날 대중은 적극적인 문화 향유자이자 문화 생산자로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창작자 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결국 창의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탄생을 의미한다. 창의성은 결코 특수성과 전문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과 보편성을 갖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기존 창작자들도 좀 더 개방적인 유연한 문화적 생태계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창작하고 그 결과물을 대중과 공유함으로써 창의성의 기존 관념을 바꿔놨다. 천부적 재능을 가진 전문적 창작자의 양성과 폐쇄적 권리 보호에 따른 창의성의 육성이 아니라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기초로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력에 의한 지속적인 문화 경험이 만들어 내는, 이른바 ‘열린 창의성’이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디자이너의 이중적인 입장을 날카롭게 꼬집는 부분을 보라. 아, 가슴이 뻥 뚫린다.
오픈 디자인에 관한 한 가능론자들은 오픈 디자인이 정확히 무엇이 될지 혹은 어디로 이어질지 알지 못하지만, 오픈 디자인이 가져다줄 새로운 기회에 흥분하고 열광한다. 가능론자들은 오픈 디자인이 디자인 업계에 가져오는 혼란에 주목하고, 그 혼란에 내재한 잠재력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반면 현실주의자는 오픈 디자인에 두려움과 불신으로 반응한다. 현실주의자는 무언가를 만드는 데 들어간 온갖 노고가 헛수고가 되어버릴까 봐 두려워한다. 또는 누구나 오픈 디자인을 활용할 수 있다면 아마추어가 아름다운 디자인 세계를 오염시킬 거라고 탄식하면서 오픈 디자인 때문에 품질이 떨어지는 디자인 제품이 마구 양산될 거라고 주장하는 디자이너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논의는 사실 다른 영역, 다른 분야에서도 있었다. 해킹과 관련해서도 촉발됐고, 1960년 해적 라디오 방송, 1990년대 후반 블로그가 출현했을 때처럼 미디어와 언론에서도 지겹도록 경험했다. 이제 그 논의가 디자인의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약 1년 전 ‘디자인의 종말 이후의 디자인’이란 글을 쓰면서 앞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디자이너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때 스스로 제시한 키워드는 ‘안내자(guide)’였다. 디자인의 민주화와 맞물려 참여 형태로 진행되는 디자인의 폭발적인 확산을 접한 디자이너는 종전까지 누리던 창조와 생산의 독점에서 한 발 내려와 점점 붕괴하는(혹은 이미 붕괴해 버린) 기술적인 장벽을 뚫고 창조성의 세계로 넘어오는 대중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을 필요가 있다.
창의성에 대한 열린 개념이 보편화되면 창의성에 대한 요구가 사회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할 것이다. 마치 수능 시스템에 발맞춰 입시를 위한 온갖 학원과 교육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듯 말이다. 예전 디자이너가 사람들의 숨은 욕구를 귀신처럼 콕 맞출 때 마치 ‘창의력 구루’마냥 추앙받았다면 이제는 대중의 창의성을 고조하고 그들이 더 효율적으로 창의력을 발산하며 결과물을 엮어낼 수 있도록 친절한 가이드이자 일종의 선생님으로 디자이너의 역할을 확장하는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대중의 자유로운 취향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좋은 취향’은 무엇인가 정립하려는 시도도 존재할 것이다. 이때 궁극적으로 정부 차원의 노력 또한 필요하다. 초등교육기관에서 창의성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며 공공 디자인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창의성의 미감이 균질해져야 한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전문가들이 국정 과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회 전반에 걸친 창의력 지수를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디지털 사회로의 이행이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변화를 겪는 현대 사회에서 이제 디자인의 변화와 이를 받아들이는 적절한 태도는 급선무다.
책 <오픈 디자인>은 나름의 입장에서 그 해답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내가 아직 책의 진도를 나가지 않는 이유는 읽기에 지루해서가 아니라 같은 부분을 보고 또 보더라도 끝나지 않는 호기심과 질문의 물줄기를 스스로 막기에 역부족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책의 작은 부분밖에 읽지 못한 나조차 이런 생각을 하는데 전체를 모두 통달한 사람의 심경은 어떨는지.
디자이너와 대중을 나눌 것 없이 이 노란 책을 한 번 접해보길 강력하게 권한다. 그리고 아직 지식의 토막 조각밖에 삼키지 못한 내게 많은 인사이트를 전달해주면 좋겠다. 열린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의 공유니까 말이다.
원문 : 허핑턴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