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글은 CA Korea 2015년 10월호 ‘INSIGHT’에 기고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책의 감각적인 첫 문장은 독자를 설레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칼 마르크스가 1848년 발표한 <공산당 선언>의 서문은 그런 흡입력을 주는 예 중 하나다. 이 역사적인 글은 이렇게 자기 존재를 알린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책처럼 아이덴티티 디자인 또한 첫인상이 생명이다. 대중이 가장 먼저 접하는 브랜드의 얼굴 아니던가. 세상 모든 브랜드가 큰돈을 투자해 세심한 부분 하나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로고에서는 형상을 양식화한 심볼 뿐 아니라 서체 또한 무척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서체의 미묘한 곡선과 직선의 교차만으로도 수많은 느낌을 직접, 혹은 은유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심볼 없이 글자만으로 구성한 ‘로고 타입(logo type)’을 떠올려보면 서체가 만들어내는 묵직함이란 결코 무시하기 쉽지 않다.
1980년대 이후 포스트 모더니즘에 얻어맞긴 했지만, 글자 끝에 돌기(Serif)가 없는 산세리프(Sans Serif) 서체의 인기는 21세기 로고 디자인 세계에서 여전하다. 특히 ICT 업계가 바치는 끊임 없는 구애의 격렬함은 놀랄 정도다.
한 번 가만히 생각해보시라. 우리 삶에 깊게 침투하는 브랜드 중 우아한 돌기로 제 매무새를 마무리한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는지. 그 몇 안 되는 희귀한 예였던 구글마저 17년 동안 고수하던 로고를 리뉴얼하며 로고 타입 서체를 산세리프로 확 바꿔버렸다. 세리프는 이제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칼 마르크스가 지금 살아 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가령 이렇게 말이다.
“하나의 유령이 로고를 배회하고 있다. 산세리프라는 유령이.”
산세리프가 굳건한 인기를 유지하며 존속 가능한 이유는 간단하다. 명징하고 명료한 가독성과 중립적인 성격, 그리고 현대적인 이미지 덕분이다. 전 세계를 휩쓸었던 20세기 중반과 딱히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일련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로고를 구현하는 매체가 종이에서 스크린으로 확장하면서 명료한 가독성은 예전보다 더 강력한 선택 요인으로 성장했다. 잉크와 종이의 세계에만 신경 쓰던 과거와 달리 다양한 플랫폼과 디바이스 환경을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특히 웨어러블 시장의 성장으로 매우 작은 스크린이 필요한 시점에서 돌기 없는 산세리프는 세리프보다 가독성 면에서 탁월한 장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더불어 요즘처럼 분야를 넘나들며 활약하는 다학제 기반의 기업 문화가 퍼질수록 로고의 중립적인 성격은 더욱더 필요한 덕목이다. 게다가 자고 일어나면 무언가 바뀌는 급속한 기술 발전의 시대에 기업은 자연스레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산세리프 서체는 지금 시대의 로고 디자인이 원하는 특징을 두루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앞으로 ‘만국의 로고여 산세리프로 단결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로고의 성공이 보장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구글은 자사의 로고를 바꾸게 된 몇 가지 이유를 명확히 밝히면서 로고 파일의 크기를 언급했다. “예전 로고의 크기는 약 1만4000바이트였던 데 비해 새롭게 바꾼 파일은 단 300여 바이트에 불과해 인터넷 접속 속도가 느린 곳에서도 충분히 매끄럽게 로고를 접할 수 있다. ‘구글 매직’이 어느 곳에서나 발휘되길 바란다.”는 말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로고 이미지를 전달하던 기업의 태도가 증발했다. 오직 사용자가 브랜드 이미지를 좀 더 자발적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상황을 안배하는 노력이 최우선으로 깔렸다. 이런 접근 방식의 변화를 놓친 채 세리프와 산세리프 간 돌기 유무가 만드는 수치의 차이에 경도되어 ‘산세리프 만세’를 외친다면 그만큼 근시안적인 안목도 없을 것이다.
더불어 성공적인 로고 디자인을 위해서 기존 로고에 대한 관습을 버리는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는 이제 로고가 제 자리에 가만히 있는 박제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제너러티브(generative) 로고를 비롯한 플렉시블(flexible) 로고의 존재는 심볼이나 서체 등 단순히 로고의 시각 요소에만 매달리던 행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멈춘 상태로 형태와 색깔의 차별화를 꾀하던 로고 디자인은 ICT 시대에 시간성을 담보한 움직임을 받아들이면서 ‘인상’이란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눈으로 명백히 파악하는 게 로고의 미덕이었다면 이제는 천변만화의 개념을 기반으로 물리적인 움직임과 그 잔상의 독특함까지 로고의 범위에 포함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과연 이럴 때에도 산세리프의 장점이 지속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무릇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이 언제나 변치 않는 진리’라는 고금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맥락과 다가오는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대세에만 침잠한다면 그 차이의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할 것이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원문: 허핑턴포스트 / 글: 전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