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주: <Bloomberg View>에 올라온 노아 펠드만의 칼럼 「Apology Isn’t Justice for Korea’s ‘Comfort Women’」을 전문을 번역했다. 노아 펠드만은 하버드 대학교의 헌법과 국제법 교수다. ‘위안부’ 합의에 대한 김낙호님의 설명을 보면, 93년의 고노 담화에 있었던 교육 조항이 무시됐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 합의의 한계에 대해서 곱씹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글이다.
마침내 한국의 “위안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에 의해 성 노예로 강제동원 당했던 것에 대해 일본 정부의 실제 사과를 받게 됐다. 하지만 이 사과는 씁쓸하게 느껴진다. 그건 단지 사과까지 70년이나 걸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의 생각이 바뀌어서 사과가 나온 게 아니라, 지정학적인 변화 때문에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중국의 부상과 상호 방어를 위해 일본과 한국의 협력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 정부가 이 문제로 다시는 일본을 비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도덕적인 요구를 보상 및 사건의 종결과 맞바꾼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 사과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사과하지 않는 일본 이야기는 많은 굴곡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동시대 일본과 한국 양국의 정치 문화 속에서 사과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중요함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993년의 조용했던 사과에서는 개인 기증자의 보상이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성 노예와 관련된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한국인들은 그 핵심을 짚어냈고, 몇몇 여성들은 기금의 돈을 받는 것을 거절했다.
국가의 책임에 대한 의문은 안타까운 문제로 남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여성을 노예로 만드는데 개인 기업가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쓴 남한의 역사학자들은 생존자들에게 일본 정부의 죄를 축소하고 있다며 비난을 받았다.
일본의 총리이자 강력한 국가주의자인 아베 신조는 예상대로 일본의 전시 잔학 행위에 대해 사과하려 하지 않았다. 과거, 그는 전범들을 포함해 일본의 전사자들을 기리는 문제의 야스쿠니 신사에 방문하면서 중국인과 한국인들을 화나게 하였다.
이런 아베를 사과로 이끈 것은 일본의 국방 개선 과제였다. 주된 이유는 중국의 군사 확장이다. 또 중요했던 것은 더 이상 미국이 예전과 같이 강력한 보호자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미국이 과연 중국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해주기 위해 전쟁을 할 것인가? 만약 대답이 아니오라면, 미국이 일본이나 남한을 보호해주기 위해 전쟁을 할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약속에 의심이 간다면, 일본과 한국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태평양 안보 협정은 미국을 중심에 둔 “허브 앤 스포크[바퀴의 중심에서 바퀴살이 뻗어져 나가는]” 모델로 종종 설명되곤 한다. 아베는 바퀴살들 사이의 연결을 강화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한때 그랬던 것만큼 허브[역자주: 미국]가 끌어당기려는 의지가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냉전의 분위기 속 아베의 프로그램에서, 일본과 한국의 연대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그것이 아베가 ‘위안부’에게 사과의 의미로 830만 달러의 기금을 주면서 자국에서 정치적인 희생을 감수하려는 이유다. 그리고 국가주의자로서 그는 정치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우익의 신뢰도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과와 돈에는 대가도 있다. 남한은 ‘위안부’ 문제가 일단 해결되고 나면, 정부가 앞으로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아베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한국의 침묵을 샀다고 말할 수 있게 됐고, 일본이 국가주의적이고 침략적이라는 혐의를 받을 때마다 항상 언급되던 논란을 없애버렸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국가 간 합의가 간과한 것들
이것은 배상이, 실제 합법적으로 정식 절차를 밟든 밟지 않든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피해자들은 사과와 보상을 받고, 잘못을 한 쪽은 잘못한 일을 상기시키지 않겠다는 사실상의 보장을 받는다. 이런 거래가 없다면, 국가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내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교환에 대해 비판하는 건 순진해 보이고, 보상은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모든 불법 행위에 대한 합의는, 심지어 사적인 단체 간의 합의조차도 이런 특징을 가진다. 보상은 정의를 올바르게 만드는 작용을 하고, 피해를 당한 쪽은 거래를 이해할 거라고 기대된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얘기하자면, 인류에 대한 범죄가 간단한 보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자동차 사고와 같지는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여성을 노예로 삼은 이들이 자동차 사고의 가해자들처럼 단순히 부주의했기 때문에 가해자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안부 여성들을 강간하고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며, 모든 여성이 갖는 근본적인 권리와 지위를 강탈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범죄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침묵과 교환하기로 약속하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의 범위와 의미를 생각할 때 매우 부적당한 것으로 보인다. 협상을 하는 동안 일본은 서울의 대사관에 있는 추모상을 없애려고 하기도 했다. 남한 정부는 생존자들과 이 문제를 거론하기로 약속했다. 이것은 곧 추모상을 없애는데 믿을만한 수준의 노력을 하겠다는 걸 함축한다.
인류를 향한 범죄는 세계의 문제다. 그런 범죄는 잊혀지면 안되고, 범죄에 대해 얘기하고 기억하는 일이 억압받거나 단념되어서도 안된다.
지속적으로 그런 범죄의 기억을 간직하는 일에 대한 관심은 피해자들에게도 달한다. 그들은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정부가 사건에서 손을 떼기로 동의했기 때문에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게 보상금 뿐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이 보상은 그들에게 가해자를 창피 주는 노력을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제적인 관행의 현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가혹하다. 개인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다른 나라를 고소해줄 국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국가가 이 협상에 참여하게 되면, 국가는 평소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다. 바로 가치와 이상, 명예를 자신들의 이익을 향상시키는 것과 맞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걸 좋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끔찍한 잘못에 대한 기억은 간직되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들을 멈추게 만드는 자극으로서.
‘위안부’ 사건에 대한 우리의 공포는 우리가 IS나 보코 하람에 의해 납치되어 성노예가 된 여성들을 위해 행동하도록 우리를 강건하게 만든다. 과거와의 화해 속 어떤 부분도 그러한 현재의 범죄와 우리를 화해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원문: 윤지만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