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위안부들 중에 어린 소녀가 있게 된 것은 ‘일본군’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에 살펴본 ‘강제로 끌어간’ 유괴범들, 혹은 한 동네에 살면서 소녀들이 있는 집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우리 안의 협력자들 때문이었다. 위안부가 된 소녀들을 가족이나 이웃으로서 보호하기 보다는 공부라는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해서 공동체 바깥으로 내친 우리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52쪽)
이 책의 목적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나름의 도움을 주기 위한 데 있다. 위안부를 비롯한 각종 반인륜적 국가 범죄에 있어 ‘해결’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법적 책임, 도의적 책임을 위시한 몇몇 해결 형식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사실 이 문제는 당사자들 사이의 역사와 긴밀히 얽힌 것이어서 어떤 해결의 모범답안 같은 것을 쉽게 상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국가 간 범죄에 대한 국가 간 해결이 피해 당사자들의 마음에 어떻게 다가올지 역시 예측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해결’을 목표로 뛰어든다는 것은 적잖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의미하는 것은 당사자마다 다를 것이다. 가령 일본 정부는 국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는 것이 이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 생존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의 진정성있는 사과와 법적 책임과 국제적 사죄가 이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사실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박유하가 생각하는 ‘해결’이란 무엇일까? 이를 묻기 전에 책의 저자가 어떤 측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놀랍게도 박유하는 일본의 반인륜적 국가 범죄에 의해 상처받은 피해자들의 존재에서 그 해결의 긴급성을 요청하고 있지 않다. 저자가 기대는 것은 일본과 한국의 악화된 상호 관계에서 느끼는 어떤 위기감과 불안감이다. 혹은 진실/사실과 다른 억지 주장을 계속해서 펴면서 일본을 공격하고 있는 ‘못난’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이다. 그 결과 이 책에서 위안부 문제는 (독도가 그저 갈매기 똥 싸는 곳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 적이 있듯) 일본과 한국의 우호적인 친선 관계의 형성과 발전적인 미래관계로의 행진을 방해하는 ‘걸림돌’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목적이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이라는 ‘국가/민족’ 단위의 관계 개선에 있게 될 때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작업이 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주로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작업이다. 박유하는 한국이 일본에 대해 부당하게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고 위안부의 진실을 드러낸다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박유하가 개진하는 ‘국가주의 비판’을 믿을 수 없다. 그녀는 여전히 국가/민족 단위의 교섭과 관계 형성 이상을 사유하지 못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민족간의 ‘화해’를 위하여
“위안부는 일본 군인들이 총칼로 시골의 순진하고 어린 소녀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끌고간 여성들이며 이후 그녀들은 일본 군인들의 성노리개가 되었다.”
이것이 박유하가 해체하고자 하는 ‘우리 안의 위안부’ 상이다. 박유하는 이러한 통념을 상당히 순진하게도 축자적 차원에서 해체하고자 한다.
-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간 것은 일본 군인이 아니라 조선인 업자였다.
- 위안부의 나이는 소녀라기보다는 20세에서 25 정도의 ‘처녀’다.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군)과 조선인 업자의 책임을 어느 정도 비중으로 판단하고 있을까? 다음 문장을 보라.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용한 맨 위의 문장을 비교해보라. 여기서 일본군의 책임은 ‘묵인’한 정도에 국한된다. 그에 반해 ‘우리 안의 협력자’인 조선인은 어린 소녀들을 마을 공동체에서 내쫓아 위안부로 끌려가게 한 진정한 ‘원인’으로 그려진다.
나는 박유하가 친일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박유하에 따르면 일본 제국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친일파가 나쁜 게 아닌가? 한국을 식민주의의 고통에 빠뜨린 장본인은 바로 ‘우리 안의 협력자’, 즉 친일파가 아닌가? 박유하가 그토록 비판한다는 ‘식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친일파야말로 용서 못할 존재들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박유하는 친일파 담론에 매우 비판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박유하의 식민주의 비판도 그저 편의적인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일본(군)의 책임을 덜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협력자’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지만, 일본에 대한 악마적인 이미지를 구축할 염려가 있는 ‘우리 안의 협력자’에 대한 비판은 안 된다는 것이다. 박유하는 어떨 때는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인 업자의 관계를 유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또 어떨 때는 둘 사이의 민족적 차이를 강조한다. “그건 ‘일본인’이 저지른 게 아니라 ‘조선인’이 저지른 거야.”
하지만 박유하가 강조하는 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지주의”가 문제라면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인 업자로 하여금 소녀를 팔아넘기게끔 만든 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지주의”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도 틀렸다. 이는 명백하게 ‘눈에 보이는 식민지주의’다. 박유하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때는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구조적인 압력을 이야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압력의 영향을 바라봐야 할 때는 눈에 쉽게 보이는 어떤 잘못을 즐겨 인용한다.
피해자의 입장과는 먼, 너무나 먼
나는 조선인 업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의 정책에 부역한 조선인 협력자들의 존재가 위안부의 모집과 운송에 관여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궁금한 것은 일본(군)의 책임보다 조선인 업자의 책임을 더욱 우선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어떻게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앞서 일본 정부가 생각하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위안부 피해 여성 입장에서의 해결, 그리고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한국 정부가 생각하는 해결이 서로 다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박유하의 이러한 자상한 노력이 가닿는 ‘해결’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일본 입장에서의 해결에 가닿게 된다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입장에서의 해결과 너무나 멀다는 데 있다.
어떤 점에서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에 ‘매춘’, ‘성착취’, ‘가부장제’ 같은 문제가 깔려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문제의 본질은 ‘국가 범죄’다. 이 문제의 본질이 ‘국가 범죄’라는 것은 그렇게 때문에 매춘의 문제나 성착취의 문제, 혹은 민족주의나 가부장제의 문제가 이 문제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 문제의 해결은 그 범죄를 자행한 국가가 생존한 피해자들에게 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한 내의 국가 폭력과 국가 범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 그 범죄를 수행했던 수많은 조력자와 협력자들의 존재와 그들을 수족 삼아 그 범죄를 총괄했던 국가의 관계는 더없이 유기적이다.
“위안부가 된 소녀들을 가족이나 이웃으로서 보호하기보다는 공부라는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해서 공동체 바깥으로 내친 우리들 자신이었던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고 어이가 없어 쓰기 시작한 글이 길어졌다.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려 했으나, 나는 이 문장에서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용기를 잃었다. 물론 ‘판금’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책을 지식인들이 지켜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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