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 만들어진 영화 <다이하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액션영화중 하나다. 사실 한편의 액션영화에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나오면서 그 인물 각각이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고, 이야기가 다채로우면서 흐름을 잃지 않는 영화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거의 없다. 이 영화는 각각 세 가지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감독인 존 맥티어난, 주연이었던 브루스 윌리 스, 그리고 베레타 M92F 권총이 그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매클레인 형사가 처한 상황은 참 특이했다. 뉴욕 경찰인 그의 유능한 아내는 자기 직장을 따라 자녀를 데리고 LA로 가버렸고, 그나마 LA에서는 남편 성이 아닌 원래 자기의 성을 그대로 쓴다. 크리스마스에도 부인이 남편을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남편이 부인을 찾아가야 한다. 워낙 유능하고 바쁘신 부인은 공항에 직접 남편 마중을 나오지도 않고 리무진을 보내고 말이지. 이 쯤 되면 경찰일 해서 먹고사는 남편의 꼴이 초라해질 만 하다.
신기한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부인이 일하는 곳은 일본의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일본 회사에 일본제 빌딩이다. 그리고 그 회사에 쳐들어온 악당들은 유럽 의 프로 범죄자들이고 말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의 설정이 그냥 액션영화 찍자고 만들어진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들기 시작하지 않는가? 이 미심쩍은 혐의를 확실히 확인해주는 것이 주인공에 대한 설정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비행기 여행도 익숙하지 않고, 여자 앞에서의 감정표현도 서툴다. 하지만 미국의 정통 서부극을 좋아하고 최악의 상황 에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고색 창연하고 전형적인 중하층 미국 남자로 등장하신다.
그렇다, <다이하드>는 단순한 액션영화가 아니다. 1980년대 미국인들은 분명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국내외 시장에서는 고급품은 유럽제에 밀리고, 대량생산품은 일제에 밀리는 미제들이 미국인들을 기죽게 만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지. 이혼율의 증가와 함께 여권이 신장되면서 미국남자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아주 심각했다. 내우외환이랄까. 이런 상황에서 정치판에는 레이건을 앞세운 강력한 미국을 주창하는 보수주의가 등장 했고, 영화판에서는 <다이하드>가 등장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당시 미국 남자들이 느끼던 위기감, 상대적 박탈감들을 콕콕 집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유럽악당들을 물리치고 자기 가치를 발휘하는 모습은 결국 모든 미국인, 특히 미국남성들에게 “용기를 내자! 우리는 아직 저력이 있다!” 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속편들도 모두들 작품성이 뛰어난 수작들이었지만, 이 1편만큼의 아우라는 갖고 있지 못한데, 그것은 아마도 1편의 주인공과 관객들이 공유하던 내우외환의 절박함이 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처음에는 액션전문 배우인 아놀드 슈왈츠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 등이 물망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인상도 평범한데다 평범한 몸매에 싱거운 농담을 해대는 브루스 윌리스가 주인공이 되었다. 알고보면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평범하디 평범한 미국 남자 그 자체여야 했으니까 말이다.
출처: 사이코짱가의 쪽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