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5년간 살다가 2013년 말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에서 스타트업을 도우며 바람직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 지 이제 2년이 되어 간다. 그런데 그동안 관찰한 결과 정부가 ‘창조경제’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창업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있지만, 생각만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스타트업이 나오는 것 같지는 않다. <쿠팡>으로 대표되는 소셜커머스 분야나 <배달의민족>이 있는 O2O 분야, 선데이토즈, 데브시스터즈가 떠오른 모바일 게임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 이렇다 할 성공 사례가 나오지는 않았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특히 몇몇 분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모지에 가까웠다. 금융 분야에서 혁신을 추구하는 핀테크 스타트업이 전 세계적으로 수천 개씩 쏟아지고 있는데도, 한국에서는 지난해까지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마트폰과 택시를 연결해주거나, 일반인이 자신의 차로 직접 택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미국의 <우버>와 <리프트>나 중국의 <디디타처> 같은, 교통 분야에서의 혁신을 추구하는 서비스들이 전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뜨고 있을 때도 한국은 근래에 <카카오택시>가 인기를 끌기 전까지는 유사한 서비스가 거의 없었다.
중국의 DJI 같은 기업이 일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드론을 만들어 세계시장을 호령하고 세계적으로 다양한 드론 기업이 수백 개가 쏟아져 나올 동안에도 한국에는 ‘드론파이터’라는 드론을 만드는 바이로봇 외에 마땅히 눈에 띄는 드론 기업이 없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샤오미나 원플러스 같은 새로운 중국 스마트폰 스타트업들이 등장해 중국은 물론 세계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킬 동안 한국 시장에는 새로운 기업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팬택은 쓰러지고 LG전자의 스마트폰 비즈니스는 더욱 고전하는 중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한국에서는 이런 핀테크, 드론, 교통, 스마트폰 분야의 혁신적 스타트업이 잘 나오지 않을까? 단지 시장이 작아서 그런 것인가. 그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봤다.
네거티브형의 미국 규제, 포지티브형의 한국 규제
미국의 도로에서는 아무 교차로에서나 유턴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턴을 할 수 없는 곳에만 금지 표시가 있다. 규제 시스템도 비슷하다. 안 되는 것(Negative)만 표시해놓고 규제 대상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자유롭게 해봐도 되는 시스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제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서 도전하는 기업이 많이 나온다.
한국 같으면 위법이라 못 할 사업도 미국에서는 거침이 없다. 지난 2015년 2월 삼성전자가 약 2천 5백억 원을 주고 인수한 루프페이의 윌 그레일린 CEO를 컨퍼런스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직접 물어봤다. 루프페이는 신용카드 정보를 읽어서 스마트폰에 집어넣는 방식인데, 기존 카드회사들의 허락을 받았냐고. 그랬더니 그는 “그런 규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해도 된다. 허락받지 않고 했다.”고 대답했다. 덕분에 루프페이는 이런 신기술을 킥스타터를 통해 ‘시도’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삼성전자의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카드정보를 스마트폰에 저장한다는 것부터 위법일 가능성이 있고, 또 카드회사들의 반발로 시작도 하지 못할 아이템이다. (실제로 모 카드 회사 분에게 물어본 일이 있는데,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었다.) 삼성전자는 루프페이의 기술을 이용해 삼성페이를 개발했고, 작년 8월부터는 국내 서비스도 시작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프페이가 한국 회사였다면 이런 기술을 개발해 선보이고, 삼성 같은 대기업에 인수될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으리라 본다.
미국의 경우 스타트업이 규제를 신경 쓰지 않고 시작했더라도 회사가 덩치가 커지면 그때 규제 당국이 나선다. 소비자보호를 위해 필요할 경우다. 개인 간의 투자와 대출을 연결해주는 렌딩클럽의 경우 2007년 창업 후 규제에 상관없이 비즈니스를 키우다가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에 의해 영업정지를 당했다. 하지만 6개월 뒤 규제기관과 합의를 이루었고, 이는 P2P 대출이 제도권에서 인정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P2P 대출은 미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도로에서는 유턴은 일단 안 된다. 오직 허용되는 곳에만 표지판이 있을 뿐이다. 규제 시스템도 비슷하다. 허용되는 것만 촘촘하게 규정해놓은 가이드라인이 있고, 그곳에 없는 것을 하면 무조건 위법이다. 규제에 걸릴 것 같더라도 소비자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으면 우버처럼 일단 질러보는 미국의 스타트업들과는 달리, 한국의 스타트업은 시작하기도 전에 법령을 세심히 살펴야 한다. 사후규제가 아니고 사전규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의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법률지식에 해박하다. 제품 개발보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이라든지, 전자금융거래법 몇 조 몇 항을 외울 정도로 해박하게 알고 있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만나서 놀라기도 했다. 이런 꼼꼼한 규제는 창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한다. 그리고 결국 그들을 좌절시키고 포기하게 만든다.
실리콘밸리 벤처 투자자인 트랜스링크캐피탈의 음재훈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규제 시스템은 방목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목장에 양 떼를 풀어놓고 울타리를 쳐놓는 식이죠. 울타리 안에만 있는 한은 뭐든지 마음대로 해보라는 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더 많은 데이터를 공개하는 미국, 데이터를 감추는 한국
미국은 공공데이터를 되도록 많이 공개한다. 법원의 판례 정보, 부동산 거래 정보 등등 수많은 공공 데이터가 공개되어 있고, 그 데이터를 가공해서 판매하는 데이터 업자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해서 자동으로 투자를 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거나, 개인이나 기업의 공개 데이터를 기반으로 신용분석을 해주는 핀테크 기업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빅데이터 산업도 이런 기반 위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공공기관도 사기업도 데이터를 꽁꽁 싸매고 공개하지 않는 편이다. 공개를 하더라도 가공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엄격한 보안규정도 그렇고, 개인정보보호법이 못 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스타트업이 공공 데이터에 기반한 사업을 시작하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아웃소싱 문화의 미국, 전부 내부에서 직접 해야 하는 한국
미국 기업들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핵심 비즈니스에만 집중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주저 없이 외부 기업의 제품을 사서 쓴다. 예컨대 HP 같은 대기업도 사내 인사관리 시스템으로 <워크데이>라는 외부 기업의 인사관리 소프트웨어를 계약해서 쓴다. 내부에서 직접 만들어 쓰지 않는다. 핵심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이런 풍토가 뛰어난 역량을 지닌 외부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어떤가. 외부 회사의 제품을 쓰지 않는다. 필요한 소프트웨어는 그룹 내 계열 IT 회사를 시켜 직접 제작하거나 하청을 줘서 만들어서 쓴다. 최고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져다 쓰기보다는 좀 품질이 떨어져도 내부 계열사의 것을 우선해서 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역량 있는 독립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클 수 있는 자리가 없다. 삼성전자는 2015년이 되기까지도 문서 작성을 하는 데 내부에서 만든 훈민정음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했다.
좋은 품질의 외부 제품보다 내부 계열사의 제품을 쓰는 것을 우선시하는 이런 문화는 기업들의 전체적인 경쟁력 약화를 초래한다. 그리고 국내에서 큰 B2B(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회사가 나올 수 없게 한다. 정부나 기업이 사주질 않으니 나올 수가 없다. 기업들은 하청업체처럼 쓸 수 없는 오라클, SAP,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형 외국 소프트웨어 회사 정도가 되어야 소프트웨어를 직접 구매한다.
혁신에 둔감한 리더
그리고 한국은 정부나 기업의 최고의사결정권자들이 혁신을 받아들이는 데 둔감하다.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이메일 때문에 궁지에 몰린 적이 있었다. 국무장관 시절 사설 이메일 서버를 써서 주고받은 이메일이 문제가 된 것이다. FBI는 힐러리가 사설 이메일 서버를 통해 국가기밀이 담긴 이메일을 주고받은 일이 있는지 조사하고 있는데, 그 이메일 갯수만 해도 3만여 통이었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장관들이 얼마나 업무에 이메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지 알 수 있다.
또 젭 부시 등 공화당 대선후보들은 우버를 옹호하며 유세 중에 우버 차량을 직접 불러서 이용하기도 한다. 4백 60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도널드 트럼프는 ‘트위터의 달인’이다. 이처럼 미국의 교수, 기업인, 관료 등 지식인들을 만나보면 능수능란하게 트위터, 블로그 등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며 우버 등 새로운 혁신 서비스를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금태섭 변호사의 저서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에는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국가의 IT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메일도 제대로 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장관 등 고위직을 역임한 분들이 많은 그룹에 강연을 하면서 인터넷 쇼핑이나 인터넷 뱅킹을 직접 하시는 분이 계신지 물어보았다. 20여 분의 그룹에서 단 2명이 손을 들었다.
지금 정부부처의 상당수는 세종시로 옮겨가 있고, 많은 정부산하기관들이 전국으로 이전해 있다. 그런데 내가 만나는 상당수의 공무원이나 산하기관직원들은 출장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화상회의나 컨퍼런스콜을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을 위해 하루를 날린다. 물어보면 고위층일수록 이메일이나 화상회의에 익숙하지 않다고 한다. 그냥 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클라우드 서비스조차 다 차단해놓아서 외부에서 업무를 보는 것도 어렵다는 하소연이다.
이처럼 최종의사결정권자인 사회고위층이 혁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미국보다 한국이 훨씬 보수적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혁신 기업이 더디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런 경우 혁신 기업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이나 투자, 인수합병 등의 의사결정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가치를 제대로 산정하고 투자를 하겠는가.
한국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의 혁신스타트업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위에 열거한 규제 시스템과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 한국에서 창조경제가 불을 뿜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과 장관들부터 직접 솔선수범해서 혁신 트렌드를 배우고, 혁신 스타트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직접 쓰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