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세대’의 일원(물론 이런 규정 자체도 문제 있는 것이지만)으로서 ‘청년/세대담론’을 말하는 것은 미묘하다. ‘세대 적대’의 매트릭스 속에, 또 ‘꼰대 언어’ 속에 빠져들 위험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정치평론가 이철희는 먼저 20-30대 세대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뭐라도 말하기 전의 도리라고 말했지만, 당연하다. 특히 ‘문송문송해진’ 학부-대학원에서 계속 20대들을 만나온 사람으로서도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성찰을 가진 ‘86세대’라면 그런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다가 아니고, 그걸로 되는 건 없는 것 같다.
1. ‘멘토’의 몰락 : 담론지형의 전환
『아프니까 청춘이다』, 『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따위로 수백 만권의 판매고를 올렸던 김난도 교수가 얼마 전 책 하나를 새로 냈다. 제목이 『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 : 다시 일어서려는 그대에게』이고 “지금 웅크리고 있는 이들이 희망의 상자를 열어볼 용기를 낼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니, 이번에도 ‘달달’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 의미 있는 ‘반란’이 일어났다. <알라딘> 뿐 아니라 <네이버책>에서도 평점은 무려 2점대, 그리고 수십 개의 ‘악플’이 달렸다. 특히 네이버 책의 리뷰들이 신랄했는데, “금수저질 집어쳐라”, “종이가 아깝다”, “쓰레기”, “사기꾼”, “지겹다” 등으로 요약된다. 네티즌들은 또다시 ‘멘토질’에 나선 ‘교수님’께 무수한 ‘악플’로써 화답한 것이다. 사태 전체를 요약하면 ‘멘토의 몰락’이자 ‘힐링의 종말’이겠다.
이런 현상은 2-3년 사이에 그리고 박근혜정권 하에서, 청년-세대담론의 지형이 급격히 바뀐 것을 실증한다. 최근 압도적인 유행어가 된 ‘흙수저’, ‘헬조선’, ‘노오력’ 등도 그 같은 전환을 보여주는 실로 강렬한 언어 표상이다. 인식을 바꾼 청년세대는 이젠 웬만한 ‘어른들’의 충고나 말 자체를 믿지 않을 것 같다. 이는 분명 담론적인 저항이다. 이 저항 앞에서 ‘힐링’은 물론, 능력주의나 자기책임론 같은 신자유주의의 핵심 이데올로기(“공부 못하고 가난한 건 니 탓이야”)도 타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세대담론의 한계
그럼에도 청년 세대담론에는 어떤 ‘결여’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세대담론 자체가 가진 한계와 연관되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 효과의 문제이다. 그 전에 우선 오늘날 ‘청년 세대담론’이 단지 청년세대들을 향해 발화되지만은 않으며, 또한 그들에게만 ‘담론 효과’를 발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짚고 싶다.
첫째, ‘헬조선’은 세대를 초월하는 현상이다.
끔찍하게 높은 노년·중년(특히 남성) 자살률 같은 지표가 이를 보여준다.
그러니 기실 조선의 많은 ‘꼰대’들도 필사적으로 ‘노오오력’ 중이거나, 삶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헬’은 ‘계급의 헬’이다. 대한민국의 상위 계급은 여유롭게 잘 산다.
물론 세대담론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빈곤 담론이면서 ‘미래 담론’이기 때문이다. 즉 세대담론은 젊은 세대를 주요 소재로 이 사회의 치명적인 재생산 불능(3포·5포·N포)를 직접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유념할 점도 있다. 첫째, 임금피크제를 위시한 이번 노동개악 시도에서 보듯 세대담론은 ‘노동’의 분리와 세대 분할 통치를 위해 언제든 역으로 동원될 수 있다. 특히 ‘미러링’된 세대담론(이를테면 김무성의 ‘남 탓’, 박근혜의 ‘젊은 세대에게 사랑이 없다’ 운운)이 보수적인 중ㆍ노년층을 위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상시 제공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세대담론의 스테레오타입화이다.
스테레오타입화한 세대론은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마치 ‘88만원 세대’라는 호명이 의도와 달리 그랬듯 20-30대를 계속 ‘불능’과 ‘미숙’의 주체인 ‘애들(주니어)’에 머무르게 하는 담론 효과를 지닌다.
이는 세대담론 속 세대 전체의 문제이다. 그 속에서 각 세대는 ‘전형’으로 재현·재생산되며, 필요한 역할 전환에 대한 모색은 생략된다. 20-30대는 언제나 소극적·수동적 ‘비주체’로서 언제나 당하는 애들(‘미생’)이거나 ‘노예’이며, 언제나 중간에 낀 90년대 세대는 ‘냉소적’인 ‘신세대’처럼 돼 있다. 반면 86세대와 그 이상의 세대는 ‘꼰대질’만 해대는 ‘주인’이다.
실제와는 다른 이런 담론의 ‘주체화 효과’는 값싼 정동이나 즉자적 인식의 생산이다. 대부분의 세대담론은 문제를 다시 세대에 모두 가두어둔다. 그런 세대담론은 사실 쉽고도 ‘안전’하다.
셋째, 우리를 무력하게 한다.
‘헬’임을 재삼 반복 확인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반복 속에서 인식과 언어는 자조와 한탄으로 화하는 경향이 있다. ‘헬조선’은 사회와 ‘국가 책임’을 적시하는 의의를 갖지만 ‘헬’을 재생산하는 구체적인 책임과 구조에 관한 데로 더 나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3. ‘죽창’과 ‘송곳’
‘꼰대’에게나 20-30대에게나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같은 ‘세대’의 표상 속에 갇히지 않는 사회적 위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세대 연대’가 아닌가 싶다. 각각은 ‘꼰대’와 ‘주니어(애들)’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세대담론 속에서는 언제나 파편화된 개인일 뿐인 존재들을 위한 ‘조직론’이 필요하다. 옛날 말인 ‘조직론’은 일종의 비유인데, 저항의 조건이나 연대의 방법에 대한 인식과 실행을 의미한다.
우선 ‘저항의 조건’에 대한 사유는 ‘인식론적 절차’로써 거의 무조건 요청된다. 즉 ‘짱돌을 들어라’ 같은 당위가 아니라, ‘무엇이 짱돌을 들지 못하게 하는가?’ ‘어떻게 해야 짱돌을 들 수 있는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창’ 같은 키워드가 부상한 것은 상상이 봉기나 저항에 가닿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죽창’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또다시 주체화와 집합적 주체에 관한 사유가 절차상 또 요청된다.
사실 이 사회를 더 나은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에서 파편화돼 있는 주체(성)의 재구성이 핵심이겠다. 오늘날 심각히 병든 대학을 포함한 모든 ‘헬조선’의 영역이 그렇지만, 청년들이라면 ‘알바연대’나 ‘청년유니온’들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궁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청년들만의 과제는 아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깊고도 넓게 씌워진 굴레들, 또 우리들이 우리에게 스스로 들씌운 고정관념의 프레임을 벗는 것은 필요하다. 오해된 ‘포스트모던’은 지속적으로 ‘조직’을 해체해왔다. 이를테면 2천만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률은 여전히 10%밖에 안 되는데, 그 사이에 조직화된 것은 오히려 극우와 노인들이었다. 과연 비정규직은 몇 %나 노조에 가입해 있나?
유연하고도 의미 있는 ‘틀’을 만들고 권력과 거대자본 앞에서 ‘벌거벗은 생명’처럼 된 개별자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게하는 데 한국의 미래가 달린 듯하다.
다음으로 ‘불만’을 저항으로 조직하는 실행 자체가 ‘저항의 조건’에 대해 몸으로 묻는 일이겠다. 그래서 싸움의 기술과 철학을 말하는 <송곳> 같은 서사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자치와 연대의 조직, 즉 학생회·학회·노조·정당 등을 지렛대로 기득권의 ‘체계’와 싸우지 않고 ‘미생’을 벗어나거나 ‘헬’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노령화 절벽’을 맞아야 하는 ‘기성세대’도 포함해서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그럴 수도 있다.
세대담론을 ‘지양’할 때
요컨대, 알맹이를 남기고 이제 세대담론을 지양할 때가 됐다. 그 단초들은 보인다. 이를테면 노동개악과 역사 교과서는 서로 연관성이 거의 없는 사안인데, 구체적인 ‘수행’과 특히 청년세대들의 행동에 의해 연결고리와 총체성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11월 14일의 궐기는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권력의 호도와 달리 이날 나선 사람들 중에는 젊은 역사학자들,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거리의 민주주의’가 전농이나 민주노총 같은 ‘오래된’ 조직과 새로운 세대의 시민들을 같이 움직이게 했다.
나이 든 세대들과 젊은 세대들은 오래된 진리와 새로운 것을 서로 나누고 배워야 한다. 세대의 연대, ‘흙수저’들의 연대, 그것 말고 이 병든 한국사회에 다른 처방약이 뭐가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