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없는 남녀의 애정이 가능한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섹스가 있는 남녀의 우정이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다.”
『로마인 이야기』로 잘 알려진 시오노 나나미가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에서 한 말이다. 섹스 없는 남녀의 애정은 불가능하지만, 섹스가 있는 남녀의 우정은 성립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불온한가?). 생각만 그렇다는 것일 뿐 별 관심은 없다. 대수롭지 않다는 게 아니다. 남녀의 애정, 혹은 우정에서 섹스란 변수이지 상수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중요한, 심지어는 결정적 변수가 되기도 한다.
‘말’과 ‘살’, ‘동무’와 ‘연인’
오히려 관심을 갖는 것은 ‘말’과 ‘살’이다. 남녀의 관계에서 말과 살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규정하는가. 그것에 관심을 갖게 하고 나름 해답을 제시한 이가 있었으니 철학자 김영민이 주인공이다.
철학자이면서도 그는 국내의 몇 안 되는 글쟁이 중에 한 명이다(내가 아는 한 그렇다). 우선 다작이다. 그리고 지적이면서도 날카롭고, 때로는 더없이 문학적이면서 감수성 풍부한 글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을 뽐낸다. 특히 한자어와 순우리말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구사하는 표현의 우아함과 적확성은 범접하기 어렵다.
그는 『동무와 연인』에서 말과 살로 맺어진 당대의 지식인, 혹은 예술가들의 삶을 소개한다. 남녀의 애정이나 우정(?)을 다루면서도, 세속적이거나 통속적이지 않고 복잡한 인간관계를 이토록 지적으로 언급한 책은 만나기 어렵다. 말과 살로 풀어낸 남녀상렬지사라고나 할까. 물론 무게 추는 살보다는 말에 실려있으니 혹시라도 말초신경 자극하는 내용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아예 책을 펴지 않는 게 좋겠다.
연인이자 동지였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이들은 세기의 연인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진보주의자들답게 계약 결혼을 하고 평생을 동지(동무)이자 연인으로 살았다.
사르트르의 여성편력은 그의 사상만큼이나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모국어를 사랑했던 그가 건들지 않는 여성이라고는 외국 여자들뿐” 같은 말을 들었을 정도다. ‘사르트르급’ 바람둥이는 아니었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었던 보부아르의 바람기도 이에 못지않았다. 남자가 지배했던 세속의 시절에도 “나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당당하게 외치던 그녀였다.
여기까지 얘기가 진행됐으면 궁금증이 하나 떠오른다. 그 둘의 관계를 유지하고 지탱시켰던 힘은 과연 무엇일까?
김영민의 말처럼 당대의 누구보다 먼저 ‘동무’의 가치를 꿰뚫어봤던 것은 보부아르였다. 사르트르 못지 않게 그녀는 글을 사랑했다. 죽을 때까지 작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사랑하는 남자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생활”이라고 그녀는 공공연히 말했다.
김영민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그 성취와 가능성의 근간이자 채널은 그들 사이에 오간 ‘말’이었다. 보부아르가 특별한 것은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 ‘귀’였다. 사르트르의 보부아르는 육체(연인)일 뿐 아니라 정작 중요했던 것은 그녀의 귀(동무)였을 것이다.” 천하의 바람둥이었지만 사르트르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지적 반려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남자였다.
그 둘의 사이에는 늘 말이 있었다
보부아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르트르를 유혹하거나 그가 추파를 던지는 ‘육체파’ 미녀는 용서할 수 있어도 지적 교감을 나누는 여자들에게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 둘에게 ‘육체’는 ‘말’ 다음이었고, 몸의 오르가즘보다 더 격정적인 것은 지적 교감이었다. 그래서 말년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사르트르와 나 사이에는 늘 말이 있었어요.”
육체의 교감이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그녀)의 손을, 몸을 만지고 싶다는 건 동물적 본능만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의 육화임을 사랑해 본 사람은 안다. 그가 그립다는 것은 보고 만지고 싶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이별이란 더 이상 그(그녀)를 만질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이별이 죽음과 닮았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그(그녀)의 체온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육체의 교감만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마치 물물교환과도 같다(실제로 성을 사고파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살로 맺은 관계를 연인이라 한다면, 말로 맺은 관계는 동무다. 동무와 연인이 합일을 이룰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나눈다.
사랑의 끝, 침묵
언젠가 만났던 연인이 더 이상 손잡는 것을 거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창피하다고. 그것이 이별의 신호였음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하지만 결정적 결별의 신호는 몸의 거부가 아니라 침묵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나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 비하면야 한참 모자랐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도 당연히 ‘말’이 있었다. 대화는 늘 날 흥분시켰고 무엇보다 즐거움이었다. 비록 허접스러운 잡담 수준이었지만 그 말이 끊긴 순간,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보부아르에게 죽음이란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의 죽음을 놓고 그녀가 가장 슬퍼한 것은 물론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로 그녀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침묵은 (적어도 그때는) 곧 이별이고 죽음이었다.
원문: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