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메갈리아를 바라보는 시각은, 초창기나 지금에나 내가 나꼼수를 바라보는 시각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 의의, 효과와 방식, 그리고 한계까지도.
‘사실관계 취약, 우상ㆍ팬덤화, PC하지 않은 유머, 양극화된 진영논리, 이념에 대한 심화적 논의 부재, 제도권 정당 정치와의 간극, 반발 자극으로 중도층의 우경화…’ 나꼼수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무수한 지적이 가능하고 또 있어왔다. 그래서 나꼼수의 성과는 전무했나? 다른 수단으로 쉽게 대체될 성과였나? 나꼼수가 자기들이 할 일을 하는 동안 제도권 정당, 시민운동, 학계 등의 시도는 어디 사라지기라도 했었나?
2.
나꼼수든, 메갈리아든 – 그것 하나만으로 완전한 진보는 결코 가능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오직 그것만이 이끌어낼 수 있는 진보가 있다. 그렇기에 진보의 수단들은 병행되고, 연대하고, 또 경쟁해야 한다. 진보는 그러한 과정의 누적이다. 각 수단은 그 한계로써 ‘미처 도달하지 못한 진보’의 공백을 드러낼 뿐이지, 그 자신 혹은 다른 수단이 이룩한 진보를 퇴행시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진보에 대한 누군가의 입장은 현존하는 수단들에 대한 그의 비교나 평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선택과 실천으로써 증명된다. 어떤 수단의 한계를 극명하게 체감할수록, 그에 대한 평가만으로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을 뛰어넘을 진보의 수단을 고민해야 한다. 과거의 ‘한계투성이’ 수단이 그 역량을 다해 우리를 밀어올려준, 지금 바로 그 위치에서부터. 그래서 모든 수단들은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며, 지극히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나는 잘나서 그 수단으로부터 얻은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사회의 어느 누구도 그로부터 얻은 것이 없다’고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나. 진보를 주장하기보다, 단지 당신이 선택한 수단과 당신의 전략적 안목이 더 우월하다는 걸 먼저 내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신의 운동이 사회의 진보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는 당신이 평가하는 게 아니다.
3.
메갈리아의 이번 분열 역시, 젠더 억압이 ‘어떤(여성)’ 성소수자 혐오자들의 입을 막는 임시방편이 되어 왔음을 재확시켰을 뿐이다. 그게 그리 놀라울 일인가 싶다. (성소수자 혐오도, 그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젠더 억압도 옳지 않음은 기초적인 전제다.) 분열된 지분만큼이 기존 한국 사회의 성소수자 혐오를 타파하지 못하고 한계를 드러냈을 뿐이다. 이런 고질적인 병폐를 새로운 혐오라 지적하는 건, 차라리 기존 현실에 대한 인식의 부재다.
간단한 이야기다. 스스로의 위치에서 옳다고 믿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면 된다. 본인이 어디보다 얼마나 품격 있고 효과적인 일을 한다고 내세울 시간에. 비단 사회운동뿐 아니라, 다수가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일이면 어디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원문: 한지은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