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지만, 라이선스 뮤지컬은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 무대에 선보이기 무섭게 국내 시장에 들어오고 있고 이에 대응하는 창작뮤지컬 역시 신작 러시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건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는 건 관객 입장에선 즐거운 일이지요.
원작(대부분 소설)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연극이나 영화가 오리지널 희곡이나 시나리오에 기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달리, 뮤지컬은 뮤지컬을 위한 오리지널 대본이 있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뮤지컬의 원작은 소설에서부터 성공한 연극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지난달 13일, 국제게임전시회인 지스타 2015 행사의 일환으로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공연된 <묵화마녀 진서연>은 뮤지컬계에서 드물게 게임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원작은 ‘블레이드 앤 소울’이라는 게임으로, 2006년 ‘프로젝트 M’이라는 타이틀로 개발이 시작되어 2008년 ‘블레이드 앤 소울’이라는 현재의 제목을 확정해 2011년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마치고 2012년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MMORPG 게임입니다. 일러스트와 게임 내에 구현된 3D모델링의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의 뛰어난 기술력과, 영화 <살인의 추억>의 음악감독이었던 이와시로 타로가 참여한 완성도 높은 OST로 2012년에는 한국게임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바람의 나라>처럼, 게임이 뮤지컬로 만들어진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람의 나라>의 경우 게임 이전에 이미 성공한 만화 원작이 있기에 게임 자체가 원작인 블레이드 앤 소울과는 좀 다른 사례라 할 것입니다. 하여 이 작품이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게임의 성공이 뮤지컬 창작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성공적인 원소스멀티유즈의 사례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 게임을 원작으로 한 <묵화마녀 진서연> 속으로 들어가볼까요.
최초의 게임 원작 뮤지컬, 묵화마녀 진서연
공연이 시작되면 부산 영화의전당 특설무대에는 여인 한 명이 칼을 맞고 누워 있고 검은 옷을 입은 다른 여인이 그녀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제목에도 등장하는 진서연, 칼은 이야기에서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되는 귀천검입니다. 그 아래에는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는데 그는 바로 진서연과 운명적인 대결을 하는 홍문파의 막내 화중입니다. 그리고 갑옷을 입은 다른 남자가 등장해 귀천검은 이제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무신 천진권입니다.
귀천검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세 명의 전사, 서로 다른 이유로 귀천검을 손에 넣으려는 세 무리가 대립하는 이 장면은 작품의 핵심을 압축, 요약한 장면입니다.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인상적인 오프닝 이후, 작품은 과거로 돌아가 그들 사이에 얽힌 원한을 추적합니다.
세상을 뒤덮은 마황의 검은 기운과 고통받는 백성들, 마황과 맞서 싸우는 네 명의 무림고수인 천하사절, 천하사절의 일원이자 귀천검의 원래 주인인 비월과 진서연의 인연, 역시 천하사절의 일원이었던 홍문파의 수장 홍석근과 그의 다섯 제자들이 수련하는 장면, 천하사절의 일원이었으나 마황과 함께 봉인된 후 귀천검을 손에 넣어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불태우는 무신 천진권 등 전반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블레이드 앤 소울’을 해보지 않은 관객들 입장에서는 극 진행이 매끄럽지 않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게임의 방대한 서사를 압축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유저가 아니라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극의 클라이맥스까지 도달하면 대강의 서사와 앞서 나열된 장면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클라이맥스에서는 진서연이 홍석근이 숨겨놓은 귀천검을 빼앗기 위해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홍석근의 제자들이 목숨을 잃고 막내인 화중 혼자 남습니다. 홍석근은 화중을 살리기 위해 귀천검을 진서연에게 넘겨주고 죽음을 맞이하죠.
여기서 이어지는 장면이 오프닝의 바로 그 장면입니다. 과거의 사연을 추적하던 서사는 다시 여기서부터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침내 귀천검을 손에 넣게 된 진서연은 마황의 봉인을 풀어 세상을 어둠으로 덮어버리겠다고 다짐하고, 홀로 귀천검을 뒤쫓아온 천진권 역시 더 이상 희생하지 않고 마황을 없애고 자신이 귀천검의 주인이 되겠다는 검은 야심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은 화중은 이들을 막아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게임 원작 뮤지컬만이 할 수 있는 것
이제 화중과 진서연이 마지막 일전을 벌이려는 찰나, 일반적인 뮤지컬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장면이 펼쳐집니다. 갑자기 게임 캐스터와 해설자가 등장하더니 장내는 곧 쇼플레이가 펼쳐지는 행사장으로 뒤바뀝니다. 사물놀이패와 탭댄서들이 춤판을 벌이고, 한바탕 무대가 들썩입니다.
뮤지컬의 관습에 익숙한 관객들로서는 이런 연출이 낯설게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갑자기 극의 흐름이 끊기고 난데없는 춤판이 벌어졌을 때는 다소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이내 이 장면의 의미를 깨닫고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뮤지컬이 공연된 장소가 지스타2015이라는 점을 떠올려 봅시다. 관객들은 일반적인 뮤지컬 애호가들이 아닌 블소의 팬들입니다. 이들에게 뮤지컬 <묵화마녀 진서연>은 화면 속에서 3D 일러스트로만 보던 게임의 세계가 내 눈 앞에서 실사로 펼쳐지는 체험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잘 짜여진 탄탄한 서사 그 자체에의 몰입보다도요. 쇼플레이 행사장으로 무대가 뒤바뀌는 연출은 뮤지컬의 관객들을 다시 게임 유저로 일깨우는 효과가 있습니다. 내가 뮤지컬을 보고 있던 게 아니라, 게임 속에 들어와 있던 것임을 알게 하는 거지요.
연출진은 게임을 원작으로, 게임 팬들을 대상으로, 게임쇼 행사장 무대에서 벌어지는 뮤지컬에 색다른 인장을 찍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뮤지컬 팬으로서는 낯선 연출이었지만, 게임 원작 뮤지컬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이 느껴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물놀이패와 탭댄서들이 퇴장하고 조명은 다시 진서연과 화중을 비춥니다. 그러나 귀천검을 손에 넣은 것은 천진권입니다. 마황을 없애고 세상의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마황은 다름 아닌 천진권 안에 봉인되어 있었던 겁니다. 천진권이 귀천검을 욕심낸 것은 그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의 몸속에 깃든 마황의 조종이었던 거지요.
진서연은 그런 천진권을 비웃으며 귀천검으로 그를 살해하고 이제 자신의 복수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화중에게 “이제 네 차례다” 하며 귀천검을 던집니다. 그러나 화중은 복수를 포기하고 귀천검은 하늘로 올라가며 뮤지컬은 끝나고, 배우들의 커튼콜이 이어집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된 메시지이기도 한데, 과연 화중은 복수를 아예 포기한 것일까요. 화중의 선택으로서 대서사는 종결된 것일지, 다음 편이 또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결말이 다소 명확하진 않았던 것 같군요.
아직은 절반의 성공, 앞으로가 기대된다
전체적으로 작품을 평가하기 전에, 먼저 기준을 세워보려 합니다. <묵화마녀 진서연>은 ‘뮤지컬’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와, ‘게임’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평가가 살짝 엇갈릴 것 같습니다. 앞서 클라이맥스에서의 매우 독특한 연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질문 역시 이 기준에 따라 대답이 갈릴 단적인 사례죠.
우선 뮤지컬로 평가를 하자면, 아주 높은 점수는 주기 어렵다고 보아야 합니다. 드라마틱한 음악, 배우들의 열연과 열창, 앙상블의 아크로바틱한 움직임, 넓은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플라잉 퍼포먼스, 게임 캐릭터에 가깝게 구현된 의상과 분장 등 <묵화마녀 진서연>은 눈과 귀를 붙드는 요소들로 가득했습니다만, 방대한 게임의 스토리텔링이 한 시간 남짓의 제한된 시간 안에 우겨넣어지며 그리 짜임새 있는 극으로 완성되지는 못했습니다.
좀 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캐릭터와 장면들을 무대 위에 그대로 펼쳐 놓는 현재와 같은 방식에서 벗어나 진서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편해야겠죠. ‘구원자 화중’ 같은 속편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결말에 대한 고민도 더 필요할 테고요.
하지만 ‘게임’에 초점을 맞춰 보죠. 일단 ‘코스튬 플레이’로서 매우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배우들의 싱크로율도 좋았거니와, 변수가 많은 야외에 대형무대에도 불구하고 미술이나 음향과 조명 모두 훌륭했습니다.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매회 긴장을 해야 하는 라이브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지요. 게다가 관객들의 집중력이 분산되기 쉬운 야외무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스펙터클하고 긴박하게 진행되는 무대는 어떤 실내공연 못지않은 높은 몰입감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당깁니다. 또 게이머들이 게임에서 플레이한 스토리와 인기 등장인물들을 충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블소의 유저들이라면 <묵화마녀 진서연>이 뮤지컬로서야 어쨌든 매우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을 것 같군요.
전 게임 유저가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뮤지컬’ 쪽에 조금 더 무게를 싣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뮤지컬 <묵화마녀 진서연>이 ‘원소스멀티유즈’에 있어 게임의 ‘소스’로서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물론 아직은 ‘유즈’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떼어내지 못한 절반의 성공입니다만, 이번 <묵화마녀 진서연>을 시작으로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진다면 앞으로를 기대해보아도 좋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