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자키 하야오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하지. 우리 부모부터 아이들까지 3대가 아는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을 필두로 〈이웃집 토토로〉니 〈원령공주〉니 하는 작품들을 거쳐 음악은 참 좋은데 내용은 도통 모르겠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그거보다 더 괴이(?)했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그런데 이 필모그래피 가운데 한국 아이들에게 크게 어필했던 애니메이션이 있지. 바로 〈빨간 머리 앤〉이야.
허긴 이 〈빨간 머리 앤〉이라는 제목 자체가 일본인들이 지은 거다. 원래 제목은 〈그린 게이블스의 앤〉이었고 그 뒤 줄기차게 나왔던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 등 ‘앤 시리즈’의 시즌 원이었지. 앤이 중년의 여자가 되어 애 여섯을 낳아 기르던 것까지 다 읽은 기억은 나는데 그 내용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시즌 원 〈그린 게이블스의 앤〉은 그 대사까지 갈수록 생생해지는데 말이지. 주근깨투성이의 빨간 머리 소녀가 콩콩거리면서 뛰어다니며 재잘대던 말들. 이를테면 이런 거.
“앞일을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상상력 풍부하지만 가정적으로는 행복하지 못했던 한 소녀 앤. 어릴 적부터 다른 아이를 돌보는 데 익숙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절친의 부모로부터 멸시를 받았지만 그 집의 동생을 후두염에서 구해 냄으로써 완벽하게 만회했던 똑똑한 여자 아이 앤, “뒤에 e 자를 붙여서 발음해 주세요~”하면서 따따부따 해도 될 말 안 해도 될 말을 구사하던 앤 셔얼리. 사실은 이 앤은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어린 시절을 무척 많이 닮아 있어.
일단 그녀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가 직장 근무상 떨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외가댁에서 자랐어. 뭐 상원의원이 할아버지였으니 앤 셔얼리처럼 고아로 남의 눈칫밥 먹고 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자라지는 못했지.
그런 콤플렉스랄까 아쉬움이랄까 하는 조건은 그녀를 상상을 즐기는 문학소녀로 크게 만들었고, 또 아이들을 돌보던 앤 셔얼리의 모습은 외할아버지네 집에서 자라던 6남매를 왕언니로서 수발해야 했던 현실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자서전 『내 안의 빨강머리 앤』(황의웅 역, 돌도래)에 이르면 몽고메리의 머리가 빨갛게 변하는 착각을 할 정도지.
우리 머리는 논리력보다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래서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은연중에 쉽사리 믿고는 해가 저물면 죽을 만큼 무서워서 우리 중 누구도 숲에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자서전이 끝난 뒤 갑자기 자서전이 아닌 3인칭 글이 등장해서 어리둥절하게 되는데 그건 번역자가 덧붙인 거더라고.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젊은 날의 사랑 이야기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있는 첫사랑 이야기가 없는 것은 이 책에서 허전함을 준다. 이를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책의 마지막에 몽고메리의 정열적 사랑 이야기를 짧게나마 다루었다.
이 ‘단 한 번뿐인 사랑’ 이야기를 읽다 보면 “아 멋져!”하는 영탄보다는 “이 여자 뭐 이래~”하면서 낄낄대며 읽게 된다. 앤 셔얼리처럼 엉뚱하거든.
그녀는 교사로 일하던 중 먼 친척인 심프슨 가족의 집을 자주 들르게 돼. 거기에는 몽고메리와 육촌지간인 세 아들이 있었지. 몽고메리는 그냥 사람이 그리워서 그 집에 자주 가긴 했지만 오만하고 잘난 척하는 심프슨 가를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해. 그런데 앤 셜리처럼 명랑한 성격에 날렵한 몸매의, 더하여 옷치장도 잘하고 다니는 몽고메리는 그만 이 육촌형제들을 죄다 사로잡고 말아.
첨에는 장남이 대쉬를 했어. 바래다주고 데려다주고… 그런데 이 건장한 남자가 병에 걸려 골골하는 틈에 이번엔 차남이 데이트 신청을 해. 형제는 용감하였다? 몽고메리도 둘째에 호감을 가져 만남이 좀 진행되는가 했는데 장남이 이른바 ‘곤조’를 부려. 뭐 뻔하지 않겠니. “니들이 이럴 수 있어.” 차남은 “형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걸 지켜보는 몽고메리는 “얘들은 왜 이러니” 대충 이런 그림이겠지.
그래서 심프슨 가와도 관계가 소원해지던 즈음 몽고메리는 막내 에드윈으로부터 또 연서를 받아. “사랑하고 있어요.” 이건 형사취수(兄死取嫂)도 아니고! 형들 눈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놈은 또 뭐야. 그런데 에드윈은 우선 문학적 재질과 감수성이 있어서 몽고메리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그 지역의 명문가 심프슨 가문의 자제라는 것 또한 플러스 요인인지라 3형제 가운데에서는 가장 긴밀한 사이가 돼.
실제로 에드윈이 청혼을 해 왔을 때 그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서 “예스!”를 부르짖을 만큼. 꼭 앤 셔얼리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얘기가 나오면 정신 못 차리고 분위기에 몹시 좌우되는 몽고메리. “세상살이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아요. 예상치 못 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에요!”라며 빨간 머리 앤처럼 말했을지도 모르지.
결혼은 에드윈이 대학 마치면 하기로 하고 약혼은 둘만의 비밀에 부치기로 했는데, 이때 에드윈의 불행은 시작되나니. 몽고메리는 친구한테 이런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지. “에드윈의 입맞춤은 조금도 가슴 떨리지 않는다. 마치 친구들과 하는 것처럼.” 차라리 싫은 건 극복이 되는데 ‘아무 느낌 없음’, 이건 참 치명적인 ‘뺀찌’지. 형제 두 명 가슴에 못 박아 놓고 막내랑 사귀면서 청혼에 예스까지 해 놓고 “키스했는데 가슴이 뛰질 않네?” 조잘대는 몽고메리라니.
에드윈은 대학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사랑해요 어쩌고 편지를 보냈는데 여자들은 이러면 더 멀어지잖냐. 느낌 없는데 들이대면 둘은 자석의 같은 극이 되지. 거기다가 몽고메리는 새롭게 구한 하숙집에서 그는 아주 사내답고 씩씩한 농부 하먼에게 필이 꽂히거든. 문학 얘기하면 백경의 모비딕이 고래인지 상어인지 모를 수준의 위인이었지만, ‘억세게 굳은 팔 접은 소매’의 이 농민의 야성은 곱게만 살던 몽고메리의 가슴을 흔들어 놓지. 그녀가 남긴 글을 보면 배를 쥐고 웃게 돼. “하먼과 두 번이나 입맞춤을 했다. 하지만 나는 에드윈과 결혼할 몸이야.” 얘 뭐냐…
〈빨간 머리 앤〉 시리즈를 보면 그녀의 소설은 참 잔잔하다. 고요하고 평안한 마을에서 장단점은 있어도 대충 착한 사람들이 살고 일탈이나 범죄의 태풍은 좀처럼 들이치지 않아. 그처럼 몽고메리는 사랑의 열병을 앓을지언정 그 열병에 활활 타오를 여자가 못됐고 사랑의 열풍에 케세라세라 몸을 내맡길 여자도 아니었어. 정말 좋긴 하지만 계속 좋진 않을 거 같아… 하는 겁 많은 아가씨였다는 거지.
그녀의 이 소심함이 맞닥뜨리는 최악의 상황은 에드윈이 몽고메리의 하숙집에 초대된 상황이겠지. 전혀 영문을 모르는 두 남자가 한 집에서 몽고메리와 마주하게 된 거야. 불쌍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 이 앙큼한(?) 몽고메리의 일기. “한 사람은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 없는 남자. 한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하지만 결코 사랑할 수 없는 남자.” 아마 빨간 머리 앤처럼 부엌을 초조히 오가면서 어우 어떡하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몽고메리는 결국 둘 다와 맺어지지 못해. 에드윈과는 파혼했지만 그 후 8년 동안 에드윈은 줄기차게 몽고메리에게 구애했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조선 속담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속담부터 배우면 좋았을 거야. 몽고메리는 허먼과도 사이를 끊지만 감정까지 잘라 버리지는 못하지. 유감스럽게도 허먼이 독감으로 세상을 뜨면서 그것이 강제로(?) 정리되지만.
“허먼이 세상을 떴어. 이렇게 끝난 게 다행이야. 그가 살아 있다면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테니. 그를 사랑하면서 내겐 인생의 깊이와 여유가 생겼어.”
음, 이제는 좀 이런 못된 소리가 나올라 한다. 여자 입장에서는 좀 다르려나. 아무튼 그렇게 인생의 깊이와 여유를 안 몽고메리는 목사와 결혼해서 아이들 둘 낳고 평범하게 살다 죽는다. 그런데 장남이 어려서 사회적으로 좀 낮은 계층의 여자와 사고를 쳐서 임신을 시키는 등 회오리를 일으켜서 그것 때문에 전전긍긍했었다고 하네.
그녀를 생각하다 보니 〈빨간 머리 앤〉의 장면 장면 대사 대사가 떠올라오는 게 많아서 슬몃 웃음이 나온다. 이런 대사는 참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왔던 것 같아.
“행복한 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그래, 인생 뭐 별거 있겠냐.
원문: 산하의 오역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