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장조 1735~1762)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활동적이었는데 영조의 가르침을 어겼다고 해서 두 상궁을 처형하며 가혹하게 가르쳤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평생의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신병 증세로 발전해 주변을 잔인하게 대하다가 1762년 7월 4일에 뒤주에 갇혔고, 이미 죽은 지 오래였던 그를 7월 12일에 꺼냈습니다.
러시아 역사에도 사도세자와 너무 비슷한 비극이 있었는데, 러시아의 절대영웅 표트르 대제와 그의 아들 알렉세이 사이의 비극이었습니다.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전인 1718년에 벌어진 사건이어서 러시아판 사도세자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바뀌었지만 우리에게는 사도세자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러시아판 사도세자라고 하겠습니다.
러시아판의 경우에는 황태자가 보다 활동적(전쟁 참여)이고 적극적(개혁)이지 못하다는 이유의 가족갈등과 아들을 옹립하려는 불만 세력(구세력)을 일망타진하려는 정치갈등이 원인으로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후계자가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것과 위압적인 아버지가 두려워 이상행동을 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점은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표트르 대제가 18살에 우울하고 은둔형인 예브도키아(Eudoxia Feodorovna Lopukhina)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1690년 2월에 알렉세이(Alexei Petrovich Romanov)가 태어납니다. 나중의 운명을 모르는 표트르는 첫아들의 출생을 몹시 기뻐하며 연회와 폭죽놀이를 열었습니다.
그렇지만 차르가 직접 나서서 전함을 건조하고 아조프 원정에 나서고 대사절단과 함께 서유럽을 순방하며 모스크바를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자 알렉세이는 예브도키아의 손에 자랍니다.
예브도키아는 당시 러시아 정서에 맞게 준비된 현모양처였지만 자유분방한 표트르와는 비극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예브도키아는 남편, 국가와 종교에 헌신적이었고 남편의 사랑을 소극적으로 원했습니다. 표트르가 원하는 여성상이 적극적이고 세련된 유럽식 여성인 데다가, 구세력이 자연스럽게 예브도키아를 추종하자 정치적 위협요소로 간주하고 수즈달(Suzdal) 수녀원에 감금합니다.
자유분방한 표트르는 러시아 전통여성상인 예브도키아와 원래 맞지 않았는 데다가 서유럽 분위기의 평민출신 마르타(Marta Elena Skavronska, 표트르 사후의 예카테리나 1세)와 불륜을 저지르며 예브도키아를 노골적으로 혐오합니다.
모스크바로 돌아와도 아내 근처를 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렉세이와도 거리가 멀어집니다. 더구나 어린 나이였던 알렉세이는 부모의 갈등을 보며 부당한 대우를 받던 어머니를 동정하는 동시에 아버지의 적대감을 느끼며 성장했습니다.
알렉세이는 8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생이별합니다. 1698년, 외국 순방 중이던 차르가 스트렐치 반란을 진압하려고 귀국했고 구세력의 상징인 예브도키아를 수녀원에 감금했습니다. 알렉세이는 개혁세력의 중심지인 프레오브라젠스코에로 보내져 고모 나탈랴가 맡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신식교육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수학, 역사와 지리학을 배웠고, 외국신문을 읽고 성경에 집중했습니다. 여가에는 지구본과 지도를 익혔고 수리기구를 다루고 펜싱, 사교춤, 승마, 축구 등의 운동도 배웠죠. 알렉세이는 영특했고 교육 효과가 좋았습니다.
원래는 차르와 모스크바를 수호하는 군대였던 스트렐치가 반란을 일으켜 구세력을 옹호했고, 표트르가 신식 군대로 개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표트르의 외국 순방 중에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복누이 소피아 공주와 함께 대대적인 처형을 당하며 구세력이 몰락합니다.
어릴 때 겪었던 스트렐치의 반란은 표트르에게 평생의 악몽이 되었고 구세력의 집결을 의심한 끝에 결국에는 아들을 죽이는 일까지 벌입니다. 가정교사 호이슨은 라이프니츠로 보낸 편지에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왕자는 순발력이나 지능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이성과 건전한 판단력, 그리고 뛰어난 후계자의 덕목으로 야망을 잠재웁니다. 그는 순종적이고 학구열이 높아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합니다. 신앙, 정의, 순수한 정신과 태도가 두드러집니다.
그는 수학, 외국어를 좋아하며 외국 방문을 몹시 기대합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통하기를 원하며 사교춤과 군사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매우 즐거워합니다. 차르는 건강과 성장이 염려되어 금식하지 말라고 했지만 독실한 신앙심 때문에 탐식을 조심하고 있습니다.
표트르의 측근 멘시콥이 1705년에 차레비치(황태자) 감독관으로 임명되면서 알렉세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멘시콥은 후계자 교육과 재정을 관장했습니다. 학식이 별로 없는 그가 후계자의 지도와 준비를 맡은 것은 의외였습니다.
표트르가 멥시콥을 일부러 선택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인에게 어린 아들을 맡겼던 시절을 후회했고 외국인 교사는 러시아를 이해하지 못해서 불화를 일으켰죠. 멘시콥 정도의 측근이면 자기 뜻을 잘 알기에 아들을 미래의 차르로 제대로 키워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멘시콥은 온갖 원정을 책임지며 차르보다도 모스크바를 더 자주 비웠고 원격으로 교육에 간섭했습니다. 멘시콥이 알렉세이의 머리를 잡고 끌고 갔고 표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었을 정도로 왕자와 감독관의 불화가 심각했습니다.
알렉세이가 멘시콥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아버지가 임명한 거친 인물에 대해 두려움과 반감을 보입니다. 알렉세이는 나중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 멘시콥을 비난했습니다. 그가 빈에 피난처를 요청했던 마지막 순간, 멘시콥이 자신을 술꾼으로 만들었고 심지어 중독시키려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문제의 근원은 멘시콥이 아니라 표트르였습니다. 멘시콥은 차르의 태도와 의지를 대표하는 사람에 불과했으며 이상할 정도로 변덕을 부리는 표트르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표트르는 왕자를 한순간 자랑스러워하다가 한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미래의 차르가 겪어야 할 중요한 행사에 갑자기 부릅니다.
1702년, 스웨덴 침공 소문이 떠돌자 표트르는 근위병 5개 대대와 당시 12살이던 왕자를 데리고 아르한겔스크로 떠났습니다. 13살 때는 네바 삼각주에서 스웨덴군을 몰아내는 전투에서 포병연대원으로 참전시켰고, 14살 때는 나르바 공성전을 지켜보았습니다.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표트르는 호수 부근에서 썩어가는 요트를 보고는 배와 바다를 꿈꾸었습니다. 관심 있는 것이면 모두 직접 손대야 직성이 풀렸던 표트르는 신분을 숨기고 유럽 조선소에서 조선기술을 배웠습니다.
실제로 몇 개월이나 직접 자르고 붙인 표토르는 결국 러시아 최초의 대양해군을 육성합니다. 자신만으로도 부족해서 사회지도층 자제를 대거 조선소와 해군훈련소로 강제 유학 보냈기 때문에 큰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제가 표트르 대제를 여러분에게 강추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힘과 재능으로 존경을 일궈낸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렇듯이 표트르도 왕자에게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명 의식이 너무 강한 아버지의 눈에는 연약한 아들의 인성은 부수고 개조해야 할 단점으로 보이기 마련이죠.
아르한겔스크와 나르바 원정으로 황태자의 교육은 단절됩니다. 호이슨도 1705년에 외교사절로 러시아를 3년 동안 떠나면서 아버지, 스승과 감독관 모두가 자리를 비웠고 아무도 왕자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미래의 차르가 이런 대접을 받는 일은 이례적이었습니다.
표트르 자신이 소년 시절에 황실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뒤늦게 온갖 힘을 다해 배우려고 했기 때문에 왕자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다만 알렉세이의 유년 및 청소년기에 군사학에만 집중했습니다. 왕자를 원정과 공성전에 데리고 다니면서 독립작전을 맡겼죠.
16살이던 1706년, 알렉세이는 군수품과 신병모집을 위해 스몰렌스크에 5개월 동안 머무른 후에 모스크바에 돌아오자 도시방어 임무가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닮아 은둔형이었던 왕자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고 즐겁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고해신부 이그나티엡(Ignatiev)에게 모스크바 방어강화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차르의 군대가 스웨덴군을 막지 못한다면 모스크바를 무슨 수로 막겠소?”라고 패배 의식을 보였습니다. 표트르는 이 말을 듣고는 몹시 화를 냈다가 지시대로 도시방어가 강화된 것을 알고는 마음을 풀었습니다.
표트르의 노력과 시도에도 알렉세이는 전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임무가 주어져도 소극적이거나 무기력해 보였습니다. 표트르는 결국 아들에게 크게 실망한 데다가 전세가 워낙 급박했기에 아들을 모스크바와 프레오브라젠스코예에 방치했습니다. 알렉세이는 오히려 이 휴식기를 만끽했습니다.
표트르는 서유럽을 향해 상페테부르크를 건설했고 모스크바의 모든 것을 싫어했지만 알렉세이는 반대로 모스크바를 사랑했습니다. 내성적이고 신앙심 깊은 소년과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 역사와 전설로 가득 찬 유서 깊은 도시는 서로에게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그렇지만 알렉세이는 차기 차르였기 때문에 혼자일 수가 없었습니다. 차르의 개혁과 혁신을 두려워하던 모스크바의 구세력은 왕자의 체류를 구질서 회복으로 반깁니다. 감금되어 1704년에 죽은 소피아, 1707년에 죽은 마르타의 밀로슬랍스키 가문, 그리고 예브도키아의 로푸킨 가문은 모두 모스크바 기반이었고 알렉세이를 가문회복의 구명줄로 받아들였습니다.
서유럽인과 신흥 러시아인에게 밀려난 구 귀족 가문도 몰려들었습니다. 표트르의 개혁을 반기독교라고 반대하던 동방정교 성직자는 알렉세이를 러시아의 진정한 종교를 구원할 마지막 희망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알렉세이의 고해신부 야콥 이그나티엡이 성직자 무리의 지도자가 됩니다.
야콥 이그나티엡은 어머니 예브도키아가 감금된 수녀원이 있는 수즈달 출신이었습니다. 1706년, 그는 16살이던 왕자를 어머니에게 데리고 갑니다. 나중에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몹시 화를 내며 다시는 방문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전쟁이 절정에 치달으면서 왕자의 힘도 필요했습니다. 1708년 가을, 표트르는 아들에게 모스크바 일대에서 5개 연대를 편성한 후에 최대한 빨리 우크라이나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알렉세이는 병력을 모아 1709년 1월 중반에 표트르에게 넘겨줍니다.
가장 혹독한 추위가 있던 시기여서 임무를 완수한 왕자는 병에 걸렸고 몸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보로네즈로 가려던 표트르는 10일 동안 아들 곁을 지켰습니다. 알렉세이는 건강을 회복하자 보로네즈로 갔다가 모스크바로 돌아갔습니다. 폴타바 전투 소식을 듣고는 승전행사를 준비하고 아버지와 군대를 축하했습니다.
표트르는 알렉세이의 아내도 서유럽인으로 결정했습니다. 모스크바 공국의 유물에 심취한 아들을 단번에 깨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후도 이미 알렉세이의 유학을 권했습니다. 합스부르크 황제와 자신이 직접 맡아 교육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이 제안 대신에 다른 약속이 실제로 결실을 봅니다. 표트르가 작센의 아우구스트와 12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 아우구스트는 표트르의 후계자 교육을 약속합니다. 알렉세이가 19살이 되자 이 약속을 기억해내고 아들을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으로 보내 아우그스트의 후원 아래 교육했죠.
결혼도 작센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표트르는 오래전에 독일 세력 가문과 결혼시켜 동맹을 맺기로 했고 오랜 협상 끝에 하노버 왕가에서 분가한 볼펜뷔텔(Wolfenbiittel)의 샤를로테(Charlotte)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샤를로테의 언니 엘리차베트(Elizabeth)는 스페인 왕위 후보인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의 아내였기에 정략결혼 대상으로 적합했습니다. 샤를로테는 폴란드 여왕의 후원 아래 작센에서 살았기 때문에 알렉세이의 교육과 결혼은 모두 드레스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샤를로테는 16살이었고 매력적인 외모와 서유럽 궁전관습에 익숙했기 때문에 표트르가 찾던 바로 그 후보였습니다. 그는 세련된 공주를 들여서 알렉세이에게서 구시대의 자취를 없애고 싶었습니다. 알렉세이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포기했지만 드레스덴 스파에서 샤를로테 공주를 처음으로 만난 후에 이런 편지를 고해신부에게 보냈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내 아내가 러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외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면 내가 본 공주와 결혼할 것이며 그녀는 좋은 사람이고 내 기분을 좋게 했다’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소. 이것이 신의 뜻이라면 나를 위해 기도해주기 바라오. 신의 뜻이 다르다면 그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해 주시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 주시오.
결혼식은 표트르의 도착까지 연기되었고 그동안 알렉세이는 드레스덴에서 유럽식 교육을 계속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교회 역사책을 읽으면서 현세와 영적 존재 간의 관계, 그리고 교회와 영주 간의 분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알렉세이는 유학 기간 내내 동방정교 신부를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했습니다.
알렉세이는 표트르가 프루트에서 참패를 당하는 동안에도 드레스덴에 머물렀다. 표트르는 참패에도 1711년 10월 14일 아들의 결혼을 강행합니다. 볼펜뷔텔 공은 신혼부부가 겨울 동안 머무르기를 바랐지만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 아들이 필요하다며 거절합니다. 알렉세이는 나흘의 짧은 신혼여행 후에 토룬(Thorn)으로 가서 포메라니아 주둔 러시아군의 식량을 조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알렉세이는 며칠 동안의 말미를 더 얻은 후에 신부를 뒤에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샤를로테는 6주 후에 토룬으로 갔지만 신혼부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전쟁과 겨울의 황량한 풍경을 한탄하는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냈습니다.
건너편 집은 반쯤 불타 비어 있어요. 저는 수녀원에서 지낸답니다. 가장 큰 마을에서도 어울릴만한 사람이 없어요.
4월에 이들을 방문한 멘시콥은 왕자 부부의 궁핍한 생활에 충격받았습니다. 그는 차르에게 ‘며느리가 돈 때문에 눈물을 흘려서 군자금에서 일단 5,000루블을 빌려주었다’고 편지를 보냅니다. 표트르는 돈을 보낸 후에 예카테리나와 함께 그녀를 방문했습니다.
샤를로테는 남편의 가족관계에 대해 무척 민감했고 시아버지가 남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염려하는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냈습니다. 그녀는 예카테리나에게 도움을 바라며 남편을 변호해줄 것을 간청한 적도 있습니다.
1712년 10월, 표트르는 샤를로테에게 갑자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자리를 잡고 남편을 기다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겨우 17살이었던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러시아에 대해 무서운 소문을 들었다, 자신을 보호해줄 남편 없이 러시아로 가지 않겠다’며 볼펜뷔텔의 집으로 도망칩니다. 알렉세이는 별말 없었지만 표트르는 행동을 꾸짖었고 샤를로테는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샤를로테가 1713년 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알렉세이는 수도를 떠나 핀란드 해안 원정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여름이 다 지나갔을 때 돌아왔고 거의 1년 만에 재회한 부부는 처음에 사이가 좋았다가 점차 어긋났습니다. 알렉세이는 친구와 폭음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하인들 앞에서 아내를 함부로 대했습니다. 결혼을 협상한 골롭킨의 아들 머리를 잘라 꼬챙이에 꽂아 복수하겠다고 맹세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아침에 술이 깨면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고는 다시 온순해졌고 샤를로테는 그를 용서했지만 날이 갈수록 상처는 깊어졌습니다. 알렉세이는 추운 겨울에 폭음을 하고는 병들었는데, 의사는 폐결핵이라고 진단하고 온천휴양을 권합니다.
알렉세이는 당시 임신 8개월째인 아내를 두고 “잘 계시오. 나는 칼스바트로 가오”라며 마차에 오릅니다. 그 후 6개월 동안 그녀는 남편에게서 단 한 줄의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1714년 7월 12일, 남편이 떠난 지 5주 만에 딸 나탈랴를 출산했지만 알렉세이는 어떤 축하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19살에 어머니가 된 그녀는 부모에게 절망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황태자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의 생사여부도 몰라요. 너무 무섭습니다. 지난 6주, 8주 동안 보낸 편지 모두가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반송되었어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요.
1714년 12월 중순, 알렉세이가 독일에서 돌아옵니다. 처음에는 아내를 정중하게 대하며 딸을 보고 기뻐했지만 이전의 나쁜 행동으로 돌아갔고 이제는 아내를 찾는 일도 드물어졌습니다. 그는 전쟁 중 핀란드 소녀 예프로시냐(Afrosina)를 붙잡아 스승 비아젬스키의 집에 숨겼다가 아예 자신의 집에 들여 함께 살았습니다.
알렉세이의 행동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공개적으로 아내와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예프로시냐를 데리고 오른편 공간에서 지냈고 샤를로테와 딸은 왼편 공간에서 지냈다. 한 주에 한 번씩만 방문했고 그 이후에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는 돈도 주지 않았고 집은 심각할 정도로 낡아서 샤를로테 침실로 빗방울이 샐 정도였습니다.
표트르는 이 소식을 듣고는 몹시 화를 내며 아들을 꾸짖었고 알렉세이는 아내가 하지도 않은 고자질을 의심하며 아내를 비난했습니다. 폭음과 외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샤를로테는 침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침묵을 지켰고, 결혼할 때 함께 온 독일 출신 시녀가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렉세이의 건강도 나빠졌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죠. 1715년 4월 한 성당에서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집으로 옮기지 못하고 외국인의 집에서 밤을 보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샤를로테가 그를 보고는 애원하는 편지를 씁니다.
행복한 순간도 가끔 있었습니다. 알렉세이는 딸을 무척 사랑했고 샤를로테는 그 사랑을 간접적으로 느꼈습니다. 1715년 10월 12일, 예상하지 못한 두 번째 사랑의 결실이 태어났습니다. 이번에는 아들이었고 시아버지에게 약속했던 이름 표트르를 붙였습니다. 그렇지만 러시아 왕가를 잇는 의무를 다한 남편은 더 이상 아내를 찾지 않았습니다.
임신과 스트레스로 몸이 약해진 샤를로테는 출산 전에 쓰러졌고 출산 후에는 나흘 동안 열병을 앓았습니다. 샤를로테는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차르의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오지 않았고 표트르는 병환 중인데도 휠체어를 타고 방문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차르가 도착하자 공주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작별을 고하며 두 아이와 하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두 아이를 사랑스럽게 포옹한 후에 눈물을 마구 쏟으며 왕자에게 넘겨주었고 왕자는 아이들을 반대편으로 데려간 후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대기실에서 엎드려 기도하던 하인을 불러 위로하고 몇 가지 당부를 한 후에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약을 권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죽게 해주세요”라며 거절했다.
10월 21일, 5일간의 극심한 고통 끝에 21살의 나이로 불행한 삶을 마쳤다. 그녀가 원한대로 시신은 요새의 큰 성당에 묻혔다.
샤를로테는 오래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다음 날, 예카테리나가 아들을 출산했고 표트르는 일주일 만에 손자 표트르 알렉세에비치와 아들 표트르 페트로비치, 두 명의 후계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며느리의 죽음은 두 번째 아들의 탄생으로 바로 잊혔고 8일 동안 축하연을 열었습니다.
11월 6일 새 왕자의 세례식이 거행되었고 덴마크와 프로이센 왕이 대부가 되었습니다. 축하연에서는 커다란 파이가 남성용 탁자에 올려졌는데 머리 장식과 붉은 리본만 입은 예쁜 여성 난쟁이가 튀어나와 미리 준비한 인사말을 하고는 계속 건배를 들었습니다. 여성 테이블에도 남성 난쟁이가 비슷한 공연을 했습니다. 날이 저물자 일행은 섬으로 가서 어린 왕자를 축하하는 웅장한 불꽃놀이를 즐깁니다.
샤를로테와 아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큰 축하를 받은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겨우 3년 반 후에 세상을 떠난 반면에 잊혀져 있던 예카테리나의 아들 표트르 알렉세에비치는 나중에 표트르 2세로 러시아 황제가 되었습니다.
표트르가 1725년에 후계자 지명 없이 죽자 표트르의 측근이었던 멘시콥과 근위대의 지지를 받아 최초의 여제가 되었습니다. 겨우 2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멘시콥 무리가 실제 통치를 했습니다만, 그녀의 즉위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예카테리나 대제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