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과 대권.’ 수년 전부터 여담처럼 떠돌던 얘기였다. 그런데 작년 들어 ‘본론’으로 부각됐다. 어느새 그의 이름 뒤에 ‘대망론’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쟁탈전이 벌어지며 ‘몸값’도 치솟았다. 야당 일각에서 ‘반 사무총장은 야권 대선주자 중 하나’라고 하면, 여당 친박계는 ‘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맞불을 놓는다.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한 반기문, 그가 한 일
지난해 10월부터다. 친박계 모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담론이 바로 ‘반기문 모시기’였다. 그러다가 올해 5월부터 주춤한다. ‘성완종 사태’에 반 총장의 동생과 조카가 연루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반기문 대망론’이 휴화산이 된 이후에도 반 총장과 박 대통령의 접촉은 계속됐다. 지난 5월 20일 방한 중인 반 총장이 청와대를 찾았고, 이때 두 사람은 꽤 긴 회동을 했다.
9월 초 정치권이 다시 반 총장을 주목한다. 박 대통령이 참석한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그도 자리를 함께했기 때문이다. 유엔사무총장이 특정 국가의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는 게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그는 박 대통령과의 동반을 택했다. 일본은 노골적으로 반발하며 반 총장을 비난했고, 미국 역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반 총장은 박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구공산권 수반으로 채워진 열병식 사열대에서 서방국가원수는 박 대통령뿐이었다. 그러니 가장 머쓱한 순서가 사열대에 앉는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까지 박 대통령의 참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토록 부담스러운 자리인데 그 옆에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이 자리했으니 얼마나 위안이 됐을까.
박(朴)-반(潘) 회동 직후 김무성에게 생긴 변고
오비이락? 아니면 잘 짜인 시나리오? 박(朴)-반(潘)의 ‘중국 회동’ 직후, 여권 대선주자 1위인 김무성 대표에게 ‘변고’가 일어난다. 9월 10일, 그러니까 전승절 열병식이 끝난 지 꼭 일주일만이다. ‘유력 정치인 인척 마약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다. 실명까지 공개됐다. 김무성 대표의 사위가 마약을 상습 투약했지만, 양형기준을 밑도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봐주기 판결’ 의혹까지 겹치며 김 대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근혜 호위무사’로 불리는 윤상현 의원이 폭탄 발언을 한다. “김무성으로는 차기 대선이 어렵다”며 ‘김무성 불가론’을 제기한 것이다. 의미심장한 말도 덧붙였다. “친박계 중에서 차기 대선에 도전할 사람들은 영남에도 있고 충청에도 있다”고 주장했다. 윤 의원은 ‘반기문 모시기’ 친박 모임의 핵심 멤버다.
‘김무성 불가론’은 친박 의원들과 언론에 의해 퍼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다렸던 것일까? 청와대가 나섰다. 이례적인 브리핑이 등장했다. 박 대통령이 유엔 방문 시 반 총장과 여러 번 만날 것을 강조하는 보도자료를 내놓은 것이다. 공식·비공식으로 수차례 회동할 거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UN사무총장, ‘박근혜의 아버지’를 찬양하다
25일 뉴욕에 도착한 박 대통령의 첫 일정은 반 총장과 비공개 면담이었다. 면담 이후에는 만찬이 이어졌다. 26일과 27일 일정은 ‘새마을운동’과 연관이 있었다. 유엔총회와 유엔개발정상회의 참석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새마을운동 홍보와 찬양’을 위해 유엔을 방문한 듯했다.
박 대통령은 뉴욕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고위급 특별행사’에서 아버지를 “신뢰에 기반을 둔 리더십의 지도자”라고 평가하면서, “순수한 열정으로 잘사는 나라를 만든 사람”이라고 찬양했다. 27일 열린 유엔개발정상회의에서도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칭송하는 발언을 했다. 옆에 있던 반 총장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산불처럼 새마을운동이 번지고 있다”며 극찬한 뒤, “한국의 개발경험을 개도국과 공유하고 있는 박 대통령께 감사드린다”며 사실상 유엔 차원에서의 새마을운동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뉴욕에서 새마을운동을 찬양하는 동안 국내언론은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반 총장 지지율은 21.1%. 여야 대표 주자(김무성 14.1%, 문재인 11.2%)보다 월등히 높았다. 대권 주자로서 본격적 조명을 받기 시작한 셈이다.
벌써 ‘차기’ 놓고 피투성이 싸움
졸지에 반 총장에게 밀린 김무성 대표가 반격을 시도했다. 들고나온 카드는 ‘안심 번호 국민공천제’. 내년 총선에서 청와대의 입김을 배제하기 위한 포석이다. 청와대와 친박계를 적절히 제어하지 않고서는 대권을 거머쥘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친박계의 반발은 거셌다. 청와대도 박 대통령이 귀국하자마자 ‘절대 불가’ 입장을 내놓으며 김 대표를 강하게 비난했다.
대통령 임기가 아직 절반이나 남아있다. 그런데 저들은 벌써 차기를 놓고 피투성이 싸움을 하려 든다. 시작한 쪽은 친박계다. 정권 유지와 임기 후 안전보장을 위해 반드시 ‘친박계 대통령’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인물난까지 겹치며 생긴 조급증 때문에 저러는 거다.
‘비박 김무성은 안 된다.’ 청와대와 친박진영이 이런 결론을 내렸다면 당면과제는 ‘인물 찾기’다. 그래서 반 총장을 띄우는 것이다. ‘반기문 카드’라 면 일단 ‘김무성과 비박계’를 제압하는데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반반(半半) 반기문, ‘아바타 대통령’ 되려 할까?
반 총장의 별명은 반반(半半)이다. 여당 성향이지만, 그를 발탁해 유엔사무총장이 되도록 밀어준 건 노무현 정부다. 때문에 ‘여당 반, 야당 반’이라고 불린다. 정치권과의 관계도 ‘자의 반, 타의 반’이다. 출마 여부를 물으면 그 답은 ‘출마 반, 불출마 반’. 정치를 할 거냐고 물으면 국제외교를 얘기한다. 그래서 ‘정치 반, 외교 반’이다.
청와대와 친박계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반(半半)인 반 총장을 ‘온전한 친박’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반 총장의 반(半)은 친박이라는 톱니와 맞물리지 않을 수 있다. 김무성도 포용하지 못하는 청와대가 ‘여당 반, 야당 반’인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반 총장의 역할은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끝날 수 있다. 비박 김무성 대표를 찍어내고 친박 대선주자가 등장할 때까지 필요한 ‘페이스메이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단임제에서 정권을 연장하는 방법은 단 하나. 아바타를 내세워 당선시킨 뒤 그를 조종해 수렴청정하는 것뿐이다. 저들이 ‘친박 대통령’을 강하게 고집하는 이유도 이런 것 아닐까.
원문: 오주르디 ‘사람과 세상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