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야구 선수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로 뛰어든 선수였다. 선수가 보스턴 레드삭스에 의해 드래프트 됐을 때, 그를 관리하던 풋내기 에이전트는 쾌재를 불렀다. 그의 눈에 선수는 무궁무진한 포텐셜을 지니고 있었고, 그 잠재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에이전트가 레드삭스 구단에게서 받은 연락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파워가 없고, 수비에서는 범실이 너무 많고, 기껏 친 공도 수비수 미트로 들어가기 일쑤다.” 구단은 에이전트에게 경고했다. “조만간 나아지는 모습이 없다면 그를 방출할 수 밖에 없다.” 에이전트는 고민했다.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것인가?’
그러나 계약 해지 통보까지 염두에 두고 선수의 집을 찾은 뒤, 에이전트는 마음을 굳혔다. “그 친구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단단히 각오가 되어있는지를 보고나니 감동을 받게 되더군요.” 에이전트의 회상이다. 그는 오히려 선수의 생계가 어려움을 확인하고, 집 살 돈을 구할 수 있게 보증을 서기까지 했다.
그리고 선수는 얼마 안가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믿음에 보답한다. 타율은 마이너 리그 1위인 3할 3푼 5리에 이르렀고, 167 안타를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에 설 기회를 잡는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그는 데뷔 첫해 3할 5푼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고, 훗날 명예의 전당까지 오른다. 야구 선수 웨이드 보그스와, 에이전트 앨런 네로의 이야기다.
‘따듯한’ 에이전트, 앨런 네로
스포츠 에이전트의 세계는 일반인들에게 낯설다. 그런 직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90년대 영화 <제리 맥과이어>를 본 사람이라면, 적어도 피도 눈물도 없는 동네라는 이미지만큼은 확실히 갖고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제리는 대형 에이전시 소속 스포츠 에이전트다. 관리하는 선수가 무리한 플레이로 부상을 당하자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론 ‘더 좋은 계약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결국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업계가 인간적으로 변할 것’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그 순간 에이전트의 세계는 제리를 냉정하게 밀어내 버린다.
제리가 그렇듯, 앨런 네로 역시 에이전트 세계의 ‘튀는’ 존재다. 얼마나 큰 계약을 따내느냐가 가치를 좌우하는 그 세계에서, 네로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어딘가 낯설다. 가령 박동희 기자는 그에 대해 “수많은 이력과 경력보다 따뜻한 인간미와 아버지 같은 넉넉함”을 가졌다고 썼으며, 네로의 고객이기도 했던 추신수는 “인간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라 평가했다. 추신수가 네로에게 에이전트를 바꾸겠다 통보하고나서 네로, 추신수, 그리고 그 부인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는 덤이다.
이런 앨런 네로가 새삼 한국 네티즌들의 입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쪽으로는 아니다. 최근 미국에 진출한 박병호가 미네소타 트윈즈와 맺은 계약 내용이 알려지면서, 그의 에이전트였던 네로에 비판이 쏟아지는 것이다.
박병호의 계약은 기본 계약 4년 1200만 달러에, 팀 옵션이 달려있다. 해외로 진출하는 선수들이 입지를 다지기 위해 흔히 요구하는 트레이드 거부권 조항도 없다. 미국 시장 내 박병호의 가치를 드러내는 포스팅 액수가 1200만 달러를 넘는다(1285만 달러)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염가의 계약이 더욱 아쉽기만 하다.
최민규 기자에 따르면 1200만 달러의 포스팅 금액은 메이저 리그 주전급 1루수를 기대한다는 간접적 표시였다. 그러나 메이저 리그에서 주전급 1루수의 연봉은 박병호 계약 금액의 두배 수준인 600-700만 달러다. 수년 전 미국에 진출한 일본 선수 니시오카 쓰요시의 포스팅 액수는 박병호에 훨씬 못미치는 500만 달러였지만, 연봉은 마찬가지로 300만 달러였다.
네로에 대한 의심이 의미하는 것
앨런 네로의 협상력이 의심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앨런 네로의 인간성에 대해 높이 평가했던 추신수 또한 스캇 보라스로 에이전트를 바꾼 이유에 대해 ‘(네로가) 비지니스 쪽으로는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라며 ‘만약 당신이라면 5년에 2,500만 달러의 계약에 사인하겠는가, 아니면 7년에 1억3,000만 달러를 받아들이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네로였다면 지금 받고 있는 연봉이 불가능했으리란 것을 시사한 것이다.
추신수가 에이전트를 바꿨을 당시 ‘네로를 배신했다’라는 말이 나왔을만큼 둘의 관계는 각별했다. 마이너리그 웨이드 보그스와의 인연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상할만큼, 앨런 네로는 어린 선수들을 지켜보고 투자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입지가 불안한 어린 선수들은 네로의 자상함 밑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나은 선수로 거듭난다. 마이너 리그와 메이저 리그를 오가던 시절의 추신수나, 애매한 포스팅 금액으로 팀 내 입지에 많은 우려가 있었던 데뷔 시절 강정호라면 네로가 알맞은 에이전트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병호는 그렇지 않다. 비록 해외 진출의 부담감을 안고 있지만, 포스팅 금액이 나타내듯 그에게 쏟아지는 기대는 미국 무대에 앞서 발을 딛은 일본 타자들이나, 심지어 강정호와도 궤를 달리 한다. 그런 점에서 네로를 선택한 것은, 박병호와 네로 모두에게 아쉬운 결과가 예견되어있었던 셈이다. 네로가 강정호, 박병호 등 한국 선수는 물론, 구로다 히로키, 왕첸밍 등을 미국에 진출시키며 오랫동안 아시아와 미국 프로야구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그가 받는 비난이 더욱 안타깝다.
한편으로, 프로 스포츠의 세계는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새삼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제리 맥과이어>에서처럼, ‘인간적인’ 영웅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승리조차, 사실은 계약의 크기나 길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잣대로 결정되는 것이다. 제리가 담당하던 선수 ‘롸드’가 결국 눈물을 흘리며 제리를 찾았던 것 역시, ‘돈을 보여주겠다(쇼 미더 머니)’는 제리의 약속이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 드라마가 쓴맛을 남기지 않고, 좋은 기억이 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돈이 함께 할 때다. 영화 속 제리는 돈을 보여줬기에 승리했고, 네로는 그러지 못했다.
원문: 과메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