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을 때 이것이 대중에게 바로 ‘오오~ 세상 많이 좋아졌구만’ 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세상 말세네~’ 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특히 생명과 직접 관련된 기술의 경우 환영보다는 거부감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어떻게 보면 인지상정일지도.
그러나 처음에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류의 기술로 폄하되었지만, 어느덧 보편화되어 대중이건, 정부건 ‘이제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도 없지 않다. 바로 체외수정 (In vitro fertillization)을 포함한 생식보조기술 (Assisted Reproductive Technology)이다.
현재 한국에서 매년 태어나는 아기는 약 40만 명 정도이다. 이중 체외수정 등의 생식보조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태어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정부에서는 전국 가구 월평균 소득의 150%까지에 해당하는 가구(4인 가족 기준 월 725만 원 이하의 소득이 있는 가구) 에 대해서 체외수정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난임 부부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는데, 2010년의 경우 체외수정으로 태어난 아기는 약 8천 명, 인공수정의 경우 3천 명으로 전체 출생인구의 2.4%를 차지한다고 한다. 해당 지원사업을 받지 못하는 가구의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현재 한국에서 출생하는 인구의 약 2% 정도는 시험관 아이인 상황인데, 이 정도면 거의 보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 이 기술이 개발될 때의 대중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고고…가 아니라 역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로 대신 당시의 신문을 들춰보도록 하자. (요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없었으면 블로그 파리 날리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시험관 아기”로 검색했을 때 이 단어가 최초로 나오는 시점은 1970년인데, 그때는 1978년 최초의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키는 주역이었던 패트릭 스탭토(Patrick Steptoe)가 최초로 시험관 아기 계획을 TV에 밝혔을 때의 기사이다. (1970년 2월 25일)
헤드라인만 봐도 세상에 이런 일도, 말세네의 분위기. 인간 대량생산 ㄷㄷ 그리고 이 기사를 보고 충격받은 각계의 의견이 쏟아져 나온다.
당시 고대 영문학 교수라는 김진만이라는 양반이 기고한 칼럼에서도 시험관 아기 시도를 언급하며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이야기를 꺼낸다. 결국은 ‘기술의 발전이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고…’ 류의 이야기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미친 과학자들이 날뛰니 우리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잘 계도해야 한다는 태곳적 레파토리…)
그런데 사실 2011년 이 토픽으로 노벨상을 탄 로버트 에드워드는 1960년대부터 체외에서 난자를 성숙시키는 연구를 하고, 1969년 이미 인간 난자와 정자를 이용하여 체외수정을 한 결과를 네이처에 논문을 냈었다. 그 이후에 인간 수정란 아기 계획을 밝혔다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는데, 당시의 한국 신문의 수준으로는 시험관 아기로의 전초전이 되는 1960년대의 연구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가 없었다.
시험관 아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단순히 일반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수십 년 후에는 이러한 기술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는 산부인과 의사들의 경우에도 극히 부정적이었는데, 1974년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인 장윤석이라는 분은 다음과 같이 기고를 한다.
인간 존엄성 파괴, 남녀분포 균형 깨지고, 일부 다부제, 형제끼리 근친결혼 등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면 그다지 이해가 안 가는 논거를 가지고 시험관 아기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 후 산부인과의 주 수입원은 난임치료가 되는데…)
그러나 스텝토와 에드워드의 시험관 아기 시도는 그 당시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간헐적인 기사만 나오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1978년 최초의 시험관 아기인 루이스 브라운이 태어나니 그냥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렸다.
1978년 7월 26일 시험관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일간신문 1면을 찍었다.
실제로 시험관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도 “별거 아니다.”라는 의견도 있었다.
적십자병원 원장이라는 배병주 박사라는 분은 시험관 아기라고 해서 시험관에서 아기가 나오는 것도 아니므로 지나치게 현혹되지 말아야 하고, 보편화되기에는 해결되어야 할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시험관아기가 우리나라 여성들의 불임을 해결하는 방안은 되지 못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이 아니냐, 인간복제 등등…
멸종한 공룡까지 나왔다..! 인간이 재주를 지나치게 부리다 제 꾀에 빠져서 멸종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동물학 전공 교수.
하여튼, 시험관 아기 탄생의 뉴스는 1978년 해외 10대 뉴스 중 무려 2위에 기록된다.
해외토픽으로 이야기되던 시험관 아기는 1980년대 초반부터 국내에서도 시도된다는 기사가 나오더니, 1985년도에 국내 최초의 시험관 아기 쌍둥이가 태어난다. 이미 그 시점에 해외에서는 약 1천 5백 명 이상의 시험관 아기가 태어난 상태이므로 시험관 아기의 위험성에 대한 의문은 많이 불식된 상태. 이전과 같이 시험관 아기의 위험성에 대한 기사 등은 나타나지 않고 “경사”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1978년 최초로 태어난 ‘시험관 아기’였던 루이즈 브라운은 다시 엄마가 되었고 현재 36세이다.
그리고 시험관 아기의 탄생 주역인 생리학자 에드워드와 산부인과 의사 스텝토 중 스탭토는 1988년 사망했고, 더 오래 살아남은 (…) 에드워드는 2010년 노벨상을 받는다. 그러나 노벨상을 받을 때는 이미 너무 연로해서 제대로 정신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고, 자신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을 인지도 못했다고 한다. 노벨 렉처는 제자가 대신했고, 수상은 부인이 대신했다.
어쨌든 시험관 아기는 이제 보편화된 기술이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이 이 기술을 통해 태어났으며, 국내에서도 평균적으로 약 1만 명 이상이 태어나고 있다.
이러한 시험관 아기의 보편화 과정을 살펴볼 때 생명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대중의 인식은 그리 하루아침에 쉽게 개선되지 않으며, 대중화를 위해서는 당장 가시적인 사회적인 이익 (불임 부부가 자식을 가지게 된다든지 등등)이 얻어져야 한다. 하여튼 그래서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해당 기술을 추진하는 사람은 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대중과 사회의 기술에 대한 공포를 이해하고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편 CRISPR/Cas9 등을 통하여 고등동물의 유전정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된 현시점에 이르러, 과연 인간에 대한 유전자 교정 등은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지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몇십 년 후에는 과연 인간의 유전자를 출생 이전에 교정하는 등의 일이 지금의 시험관 아기 정도로 보편화될까?
그리고 그때도 과거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등을 찾아서 ‘흡 멍청이들 그 당시에는 그랬었구먼…’ 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