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월 14일의 시위와 그 후과로 나온 민주노총의 ‘비폭력’ 방침에 대해 양쪽에서 비판이 쏟아진다. 그런데 애초에 ‘폭력시위’ 프레임은 ‘저들’의 것이다. 여기에 1차원적으로 대응하는 ‘비폭력’ 프레임 또한 ‘코끼리’[1], 즉 저들의 프레임 안에 놓인 것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구식 = ‘아제’ 시위문화에 관한 것으로 번져 간다. ‘쳐 맞을 각오로’ 이를 ‘내부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는데 기실 그리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폭력/비폭력’ 논쟁도 몇 십 년의 지루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식 ‘거리의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져온 연구자[2]로서 집회ㆍ시위 문화의 ‘현재’에 대해 주석 하나 달아본다.
2.
2000년대 이후 ‘촛불-평화-문화제’형 시위도 꽤 충분히 경험해봤다. 그것이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가진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시위는 즐거워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 소위 ‘21세기형 운동’이 가진 힘들도 잘 알고 있다. 특히 2008년의 촛불! 개인적으로는 그 창발성과 새로움에 대한 감복이 『대중지성의 시대』 같은 책을 쓰게도 하였고 동시에 이명박의 검역주권 포기와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대하기 위해 무려 50만 명이 모였던 2008년 6월 10일 밤의 거대한 ‘촛불’의 ‘무능’을 보고 다시 고민하기도 했다.
‘촛불-평화-문화제’형 집회ㆍ시위의 한계는 ‘힘을 시전하고(=시위示威)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애초의 목적과 달리, 자족적이고 내성적인 행위에 머무를 수 있다. 2013~14년 사이에 열린 세월호 진상 규명 운동의 과정에서나 철도 파업 지지ㆍ노동탄압 분쇄 집회 시위도 그런 극명한 사례였다.
그래서 사실 우리만 그런 ‘평화로운’ 시위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그런 시위를 반가워한다. 가두리 같은 차벽 안에서 치뤄진 평화로운 ‘촛불-문화제’는, 저들의 제도화되고 ‘잘 짜여진’ 폭력 앞에 때로는 매우 무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과, 시민단체나 시위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힘은 비대칭적이다. 전자는 철저히 경찰 지도부와 정보기관의 정보 수집ㆍ판단에 따른 예측과 평소의 강도 높은 훈련에 따라 조직적으로 시행된다.(이에서 벗어나는 규모와 행동이 시위대로부터 나올 때 그들은 당황하여 더 큰 폭력을 저질러 사람을 해치거나 갑작스런 무능에 빠진다. 11월 14일의 예도 그러한 것이었다.) 반면 후자는 대개 우발적ㆍ비조직적인 것이며 기본적으로 ‘비폭력’이며 ‘반폭력’을 지향한다.[3] 그래서 ‘폭력 대 비폭력’ 프레임은 공허한 것인데, 시민들이 박근혜와 그 경찰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확인하기 위해 거리에 나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면 집구석에들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3.
반면 우리는 80년대식(사실은 ‘90년대식’이기도 함) 시위의 장단점도 그야말로 오래오래, 수천 번 목격하고 경험해왔다.
생뚱맞은 언어와 자기들만의 희생ㆍ숭고의 정서에, 시꺼먼 ‘무 패션’ 아저씨들의 투박한 팔뚝질과 벌거죽죽한 깃발과, 흘러간 매우 ‘구린’ 옛 노래들과… 그리고 ‘폭력’에, 때론 술 먹은 아저씨들도 등장한다. 그런 시위에서 진정 여성과 개인-참가자들이 ‘소외’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왜 민노총-전농 같은 오래된 ‘조직’의 투박한 ‘민중주의형 시위’가 그런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는지, 그런 시위가 왜 아직도 한국에서 ‘거리의 민주주의’로서 의미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 원론적으로 시위는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는 대의정치의 무능과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이 나라에서 대통령과 의회가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ㆍ농민의 의사를 대변하지 않는다. 국정화와 노동개악 문제에서 보여준 박근혜와 권력의 ‘불통’이 대규모 ‘폭력’ 시위의 진정한 뇌관 아닌가? 시위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요체이다.
둘째,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다. 시민의 기본권인 집회ㆍ시위의 자유를 전혀 보장하지 않아 거리로 나가는 순간, ‘백골단’의 무도한 폭력과 원천봉쇄 앞에 노출돼야 했던 박정희ㆍ전두환시대의 폭압에 맞서기 위해 고안되고 발전해온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질박함과 진정성을 ‘민중(지향)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해온 한국적 운동 정치문화의 오랜 유산이겠다.
마지막으로 한국 노동자ㆍ농민 운동의 현 상황이다. 자본과 권력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개인들이 생존권과 주권을 지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조직운동’ 밖에 없다. 민노총과 전농을 위시한 한국의 대표적 조직 대중운동은 상당히 부진하고 ‘고령화’돼 있다. 그래서 어쩌면 그런 민중주의형 ‘아저씨 스타일’ 시위문화도 좀더 계속 될 가능성이 높다. ‘민중문화’는 90년대 이후 발전을 멈추다시피 했다. 거리에 나가서 무슨 노래를 부를까? 단지 문화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운동 자체도 그렇다. 온통 40-50대, 아니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선생의 경우에서 보듯 60대가 앞장을 서야 하는 경우도 허다할지 모른다.[4]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는 ‘21세기형 운동’은 공허하고, 시위문화에 대한 비판은 지배담론 속으로 곧바로 떨어질 수도 있다.
4.
시위의 양상이란 저들의 폭력과 힘, 그리고 이쪽이 가진 역량과 준비정도가 상호작용하여 결정된다. 그래서 원칙도 간단한 듯하다. ‘위력을 시전’하는 방법에 따라 메시지가 위정자들과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상황(정세)에 맞게 준비하면 된다. 물론 그 판단과 준비가 어렵다. 하지만 선험적 원칙으로서의 ‘폭력/비폭력’은 처음부터 틀린 것이다.
그런데 시위는 일종의 수단이지만, 때로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기도 한다. ‘주권’이 ‘원천봉쇄’될 때 그렇다. 특히 독재 시절에 그랬듯 민은 ‘역량’과 존재 자체를 확인하기 위해 시위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12월 5일, 그들은 군부독재 시절에 준하는 ‘비상경계’를 펼치고 폭력을 휘두를 것이다. 한방 맞은 상대가 독이 올라 마구 덤빌 때 그 주먹을 맞아줄 필요는 전혀 없다. 아웃복싱으로 비키며 카운터를 준비하면 된다. 그런 견지에서 민주노총의 평화 시위 방침이 이해된다. 이번엔 ‘가면무도회’가 총체적으로 더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새민련 의원들이 무조건 가장 앞줄에서 ‘백골단’으로부터 민노총과 전농과, 시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그렇지만 이번엔 아예 모이는 거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 이미 전국민을 상대로 한 협박과 엄포가 시작됐다. 법무장관 등속의 ‘엄단’의 방침과 언어는 박정희ㆍ전두환 때의 것과 놀랍게 비슷하다. 지금 ‘응8’은 정권이 방영하고 있다.(아니 <명량> 찍는 건가? ‘학익진’을 편단다.) 아마 거리 곳곳에서 불법적인 연행과 불심검문이 자행될지 모른다. 많은 시민들이 하릴없이 겨울 거리를 헤매다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 어떤 방법을 썼는지도 문화사 연구자는 기억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가장 유력한 단체니까 10만 군중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10만의 대표는 아니다. 광화문에 무조건 집결할 이유도 없다. 역량과 더 나은 방법론이 있는 시민들은 신촌이든 강남역이든 모여서 레이브파티를 하든 오체투지를 하든, 점거농성을 하든, 랩으로 박근혜를 떼 디스하든, 자유다. 그런 자유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민주주의 그 자체일 테다.
다만 알아서 하더라도 ‘모두를 위해’, ‘의미 있고’ 효과적이었으면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무려 18년 이 땅을 철권통치했던 ‘박정희의 딸’이 우리의 대통령이시다.
덧. 이 글은 12월 1일에 써져, 부산의 가면시위, 경찰의 방침과 서울행정법원의 결정 등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 Don’t think of an elephant!: know your values and frame the debate : the essential guide for progressives라는 원제의 조지 레이코프의 책에서 따온 말. 프레임 정치를 논한 세계적 인지학자의 책(개정판)의 국역본은 조지 레이코프/유나영 역,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와이즈베리, 2015). ↩
- 「해방기 거리의 정치와 표상의 생산」, 『상허학보』 26집 (2009. 6) ; 「1980년대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세대 기억’의 정치」, 『대중서사연구』 제33호 (2014년 12월) ; 「열사의 정치학과 그 전환」, 『문화과학』 2013년 여름호(통권74호) 등. ↩
- 김정한,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소명출판 2013) 참조. ↩
- 따라서 시위문화가 시대에 맞고 ‘섹시’해지려면 여성과 젊은이들이 전농과 민주노총에 들어가서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추론도 나올 수 있겠다. 우리는 2008년의 촛불에서 여성과 젊은이들의 동호회가 대거 참여한 시위가 얼마나 참신하고 재밌을 수 있는지 목격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