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15년 11월 24일에 최초 발행된 게시물입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정글이고, 멀리서 보면 축사인 장소가 한국이다. 치열하게 아귀다툼하는 사방에 커다란 울타리가 처져 있다. 이 곳의 주인은 약자를 홀대하고 강자를 우대한다.”
화제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장강명 저, 민음사 펴냄, 2015년)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설의 도처에서 오늘날의 현실을 직격하는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위의 문장이 뇌리 깊숙이 못질 돼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나 지금이나 현실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다. 여전히 축사 속의 아귀다툼일 뿐이다. 1991년의 5월에 경찰이 쏟아냈던 망발이, 2015년 11월에는 국회의원들의 입을 통해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다.
2015년 11월 14일
2015년 11월 14일, 부슬부슬 내리던 가을비가 지게미 같은 어둠을 내려놓으며 자리를 뜨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늘의 비가 그치자 대지에선 물보라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무거운 침묵이 차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했다. 그도 잠시, 직사의 물대포에서 포연과도 같은 물보라가 일었다. 물보라에는 시큰하고 매캐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오랜만에 맡는 최루액 냄새였다.
경찰이 살수차로 쏘아대는 물대포가 시위대를 직사로 조준했다. 앞에 선 사람들은 물대포를 맞았고, 뒤에 선 사람들은 최루액 냄새를 맡아야 했다. 어둠이 짙어질 무렵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맞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직사의 물대포가 사람의 육체를 구겨진 종잇장처럼 날려버렸다. 태풍의 중심권에 들어선들 그토록 순식간에 날아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태풍은 예측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무섭고 강렬한 대한민국 경찰이 쏘아대는 직사의 물대포는 피할 수도 맞으며 버틸 수도 없다. 대한민국 경찰의 직사 물대포에는 그 누구도 당해낼 수가 없다.
달리는 기차에 부닥친 듯 순식간에 도로 위로 나동그라진 사람은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료 한 사람이 쏜살같이 달려가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늘어져버린 몸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경찰은 쓰러진 몸 위로 연신 물대포를 쏘아댔다. 두어 명이 더 달라붙어서야 겨우 쓰러진 사람을 옮길 수 있었다. 대한민국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 사거리의 시위현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이는 70세를 바라보는 농민 백남기 씨였다. 응급실에 실려 간 그는 5시간의 대수술을 받았지만 열흘이 지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정상적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경찰은 응당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했을 것이다. 그게 상식이고 그게 정상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비정상이 판치는 나라, ‘약자를 홀대하고 강자를 우대하는’ 대한민국에선 그 당연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이 난무할 뿐이다.
백남기 씨가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안 국회에서는 사람의 말이라고 믿기 힘든 말이 국회의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 나선 새누리당의 김도흡 의원과 김진태 의원은 약간의 결은 다르지만, “농민 백남기 씨를 위중하게 만든 건 경찰의 물대포가 아니라 백씨가 쓰러진 직후 달려든 빨간 우비를 입은 사람이 폭행을 가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제도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는 말이 공중에 나부끼는 현실에서도 권력 주변을 맴도는 부나방들의 저열하고 조악한 주둥이는 변하지 않았다. 참으로 무참한 심정이다.
1991년 5월의 그 날
1991년 5월, 한 달여 동안 이어졌던 ‘치사정국’의 한중간,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제4차 범국민대회가 진행되던 도중 성균관대 여학생 한 명이 생명을 잃었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작전 탓이었고, 구체적으로는 경찰의 폭행에 의한 질식사였다.
범국민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일군의 학생과 시민이 도로로 진입하자 경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사복전투경찰(이른바 ‘백골단’)을 투입 일제 검거작전에 나섰다. 놀랍고 당황스러웠던 건 경찰의 진압작전이 이전과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경찰은 시위대의 앞부분에서 밀어붙여서 시위의 대오를 갈라놓는 작전을 편다. 와중에 주동자급 몇 명 연행하면 성공적인 진압작전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날은 달랐다. 애초 시위진압이 목적이 아닌 듯했고, 이참에 모조리 잡아들이거나 흠씬 패버리기로 작정한 듯했다. 시작부터 토끼몰이식 검거작전, 즉 시위대의 앞과 뒤에서 일제히 백골단을 투입했다. 이어서 시위대를 향한 마구잡이식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볼 수 없는 강경진압에 학생과 시민들은 크게 당황했고, 급기야 골목길로 몰려들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자 골목 안은 곧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질서, 질서”를 외치며 천천히 나아가던 시위대는 그러나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앞에 선 누군가가 넘어지자 뒤따르던 시위대는 넘어진 사람 위로 그대로 몸을 누이며 겹겹이 쌓여야 했다. 마치 볏짚을 쌓는 모양새였다.
밑에 깔린 사람은 위에서 짓누르는 사람의 무게만으로도 이미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짜 고통스런 상황은 그 다음에 이어졌다. 시위대를 몰아붙이던 백골단이 볏짚처럼 쓰러진 사람들을 밟고 올라섰다. 올라서서 뭘 했겠나? 곤봉과 방패는 멋으로 들고 있는 게 아니었다. 곤봉이야 그렇다 쳐도 방패가 사람을 내리찍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줄은 그날 처음 알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경찰은 시위대 위에 올라서서 내리찍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괘성을 내질렀다. 악마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옆구리에 차고 있는 주머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최루탄가루였다. 그걸 시위대의 얼굴에 뿌려대기 시작했다.
급기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그것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몸의 울부짖음이었고, 발악적 몸부림과 기승이었다.
“악, 아악, 아아아.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사람이 죽어요, 아악, 정말로 죽을 것 같아요.”
“엄마, 엄마아~”
비명은 점점 거칠어졌고, 또한 짧아졌다. 급기야 “엄마, 엄마아~~”를 외치던 어느 여학생의 단말마를 끝으로 화면과 시간이 멈춰서 버렸다.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던 필자 역시 바로 그 순간 긴장을 놓아버렸다. 단말마의 비명은 필자의 바로 옆에서 버티고 버티던 여학생의 것이었다.
1991년의 그날도 부슬부슬 비가 내렸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뒤 정지해버린 시간 속에서 순간이동이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필자는 어느새 골목 안쪽으로 들어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눈앞이 흐렸다. 발이 시렸고,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무엇보다 무서웠다. 세상 끝의 공포. 안경도, 신발도 없이 몸만 겨우 빠져나왔던 것이었다. 흐릿한 정신이었지만 방금 전까지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던 그 여학생의 비명소리는 계속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아…”
내리는 비를 피할 생각도 없이 골목 안쪽에 쭈그려 앉아 넋을 놓았다. 소름끼치는 공포를 이겨낼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였다. 희미한 시선 위로 무언가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때로 분노의 절규가 골목 안을 떠돌았다. 그중 누군가 외쳐댔다.
“사람이 죽었어요, 사람이 죽었어요, 경찰의 강경진압에 사람이 죽었어요.”
그제서야 비명을 내지르던 여학생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고(故) 김귀정 열사였다. 그렇게, 시장 한 켠의 노점에서 채소장사를 하며 어렵사리 딸을 대학에 보냈던 한 어머니의 대학생 딸이 거리에서, 경찰의 폭력에 스러져갔다. 명백한 질식사였다. 사람을 밟고 올라서서 곤봉과 방패로 내리찍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최루가루를 뿌려댔으니 그 밑에 깔려서 누군들 버텨낼 수 있었을까. 하물며 여성이라면.
다음날 경찰은 사과나 진실규명 대신 ‘압사’라는 말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이 말하는 압사란 이런 뜻이었다. 어제 시위도중 숨을 거둔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 씨는 경찰의 진압작전과 상관없이 도망치던 시위대들이 자기들끼리 뒤엉키고 넘어져서 시위대에 깔려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참을 수 없었다. 우선은 성균관대학교의 학생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고, 뒤이어 몇몇 학교에서 동조하면서 김귀정 씨 사망사건은 결국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문익환)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기로 했다. 필자는 현장증인이었다. 열사의 바로 옆에 깔려 있던 사람으로서 성균관대 학생들의 외로운 시신사수와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외면할 수 없었다.
2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들의 후안무치를 목도해야 한다
어쩌다 보니 필자는 1991년의 충무로와 2015년의 광화문, 고 김귀정 열사와 농민 백남기 씨가 쓰러진 날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참을 수 없는 노여움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필자를 분노케 하는 건 두 가지이다. 첫째, 24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목도하고 있는 현실. 둘째, 자신들의 폭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와 정치인의 망발.
곤봉과 방패로 내리찍고 얼굴에 최루가스를 뿌려 사람을 죽여 놓고선 시위대에 깔려죽었다고 하는 천연덕스러움이나 사람에게 직사 물대포를 쏴서 쓰러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쓰러진 몸 위에, 급기야 엠블런스에까지 물대포를 쏘아대고서는 단지 실수였다고, 물대포가 아니라 시위대의 폭력 때문이었다고 떠들어대는 경찰과 정치인들의 후안무치.
24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목도하고 있다.